目
苟晞移檄諸州하여 陳越罪狀하니 帝亦惡越專權違命하고
所留何倫等이 抄掠公卿하고 逼辱公主하여 密賜晞詔하여 使討之러니
越亦下檄하여 罪狀晞하고 遣兵攻之하다 晞遣騎하여 收越黨尙書劉曾과 侍中程延하여 斬之하니
越이 憂憤成疾하여 以後事付王衍而卒하다 衆이 共推衍爲元帥하니 衍이 不敢當하여 奉越喪하여 還葬東海하다
倫等이 以裴妃及世子毗로 自洛陽東走하니 城中士民이 爭隨之러라
帝追貶越爲縣王하고 以晞爲大將軍하여 都督靑徐兗豫荊揚諸軍事하다
目
衆人
이 畏死
하여 多自陳述
호되 獨襄陽王範
이 神色儼然
하여 顧呵之曰 今日之事
는 何復紛紜
注+範, 瑋之子也, 永寧元年受封.고
勒이 謂孔萇曰 吾行天下多矣로되 未嘗見此輩人하니 當可存乎아 萇曰 彼皆晉之王公이니 終不爲吾用이니이다
勒曰 雖然이나 要不可加以鋒刃이라하고 夜에 使人排牆殺之하다
剖越柩하여 焚其尸하고 曰 亂天下者는 此人也니 吾爲天下報之라하다
世子毗及宗室四十八王이 皆沒於勒하고 裴妃爲人所掠賣라가 久之에 渡江하다
初에 琅邪王睿之鎭建業은 裴妃意也라 故睿德之하여 厚加存撫하고 以其子沖으로 繼越後하다
目
南陽王模 使牙門趙染
으로 戍蒲坂
注+劉聰在平陽, 欲窺關中. 蒲坂, 兵衝也.이러니 染
이 帥衆降漢
하니
漢이 遣染與將軍劉雅하여 攻模于長安하고 劉曜, 劉粲이 繼之하다
染
이 敗模兵於潼關
하고 長驅至下邽
注+下邽縣, 前漢屬京兆, 後漢省, 倂入鄭縣, 桓帝復置, 晉屬馮翊郡. 應曰 “有上邽, 故稱下, 秦武公伐邽戎置.”한대 涼州將北宮純
이 自長安
으로 帥衆降漢
이어늘
漢兵이 圍長安하니 模倉庫虛竭하고 士卒離散이라 遂降于漢하니 粲이 殺之하다
關西饑饉하여 白骨이 蔽野하고 士民存者 百無一二라 漢主聰이 以曜爲雍州牧하여 封中山王하고 守長安하다
模都尉陳安이 帥衆하고 歸世子保於上邽하니 保遂據有秦州러니
尋稱大司馬하고 承制署하니 隴右氐, 羌이 皆從之하다
目
晞驕奢苛暴
하니 前遼西太守閻亨
이 數諫
한대 殺之
注+亨, 纘之子也.하다
從事明預有疾
이러니 自轝入諫
注+明, 姓也.한대 晞怒曰 我殺閻亨
이 何關人事
완대 而轝病罵我
오
預曰 明公이 以禮待預라 故預以禮自盡하노니 今明公이 怒預면 其如遠近怒明公何오
桀爲天子로되 猶以驕暴而亡이어든 況人臣乎아 願明公은 且置是怒하고 思預之言하라
晞不從하니 由是로 衆心離怨하고 加以疾疫, 饑饉하다
勒이 襲蒙城하여 執晞及豫章王하여 鎖晞頸하여 以爲左司馬하다
目
[目] 처음에 譙周의 아들이 巴西에 거주하다가 成나라 太守 馬脫에게 살해를 당하니, 그의 아들 譙登이 복수하기 위해 劉弘을 찾아가서 병력을 청하였다.
유홍이 표문을 올려 초등을
梓潼內史로 삼고 그로 하여금 직접
巴,
蜀의
流民들을 모집하게 하여 2천 명을 얻자 서쪽으로 올라가
宕渠縣을 공격하게 하였다. 초등이 마탈을 참수하여 그의
肝을 먹고 마침내
涪城을 점거하니,
注+宕渠縣은 漢나라 때에는 巴郡에 속하였는데, 蜀漢 이래로 巴西에 속하였다.
成나라 사람들이 부성을 공격하였으나 여러 번 그에게 패하였다. 3년이 지난 이때에 양식이 다하고 후원이 끊기니, 백성들이 쥐를 잡아 구워먹고 굶어 죽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한 사람도 이반하는 자가 없었다.
城이 함락되자 초등이 사로잡혔는데, 成主 李雄이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초등이 어조를 굽히지 않자 마침내 그를 죽였다.
目
[目] 苟晞가 여러 州에 격문을 보내어 司馬越의 죄상을 열거하니, 황제 또한 사마월이 권력을 독단하고 명령을 어기고
그가 도성에 남겨놓은 何倫 등이 公卿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公主를 핍박하여 욕보인 것을 미워하여 은밀히 구희에게 詔書를 내려 사마월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사마월도 격문을 내려서 구희의 죄상을 나열하고 군대를 보내어 그를 공격하였다. 구희가 기병을 보내어 사마월의 도당인 尙書 劉曾과 侍中 程延을 체포하여 참수하니,
사마월은 근심하고 분노하던 끝에 병이 나서 死後의 일을 王衍에게 부탁하고 卒하였다. 사람들이 함께 왕연을 추대하여 元帥로 삼으려 하니, 왕연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 하여 사마월의 영구를 받들고 東海로 돌아가 장례하였다.
하륜 등이 裴妃와 世子 司馬毗를 데리고 洛陽에서 동쪽으로 달아나니, 성안에 있던 선비와 백성들이 다투어 따라갔다.
황제는 사마월을 追貶하여 縣王으로 삼고, 구희를 大將軍 都督靑徐兗豫荊揚州諸軍事로 삼았다.
目
[
目]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부분 스스로
晉나라가 패망하게 된 이유를 진술하였으나, 유독
襄陽王 司馬範은 정신과 기색을 엄숙히 하고서 사람들을 돌아보며 꾸짖기를 “오늘의 일을 어찌 다시 분분하게 말하는가.”
注+司馬範은 司馬瑋의 아들이니, 永寧 원년(301)에 봉지를 받았다. 하였다.
石勒이 孔萇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많이 다녀보았으나, 일찍이 이런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마땅히 살려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공장이 말하기를 “저들은 모두 晉나라의 王公이니 끝내 우리에게 쓰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석륵이 말하기를 “그렇지만 그에게 칼날을 가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밤에 사람을 시켜서 담장을 떠밀어 압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司馬越의 관을 깨서 그의 시신을 불태우고 말하기를 “천하를 어지럽힌 자는 바로 이 사람이니, 내가 천하 사람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 하였다.
世子 司馬毗와 宗室 48명의 왕이 모두 석륵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裴妃는 남에게 붙들려 팔려갔다가 오랜 뒤에야 長江을 건너왔다.
처음에 琅邪王 司馬睿가 建業에 진주한 것은 裴妃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사마예는 그 일을 고맙게 여겨서 그녀를 극진하게 위문하고, 자기의 아들 司馬沖으로 하여금 사마월의 뒤를 잇게 하였다.
目
[目] 처음에 劉曜는 王彌가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洛陽에 들어갔다 하여 그를 원망하였다.
왕미가 유요를 설득하기를 “낙양은 천하의 중앙입니다. 산과 江河가 사방으로 둘려 있고 城池와 宮室은 굳이 수리하고 경영할 필요가 없으니, 主上에게 아뢰어서 平陽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유요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고 낙양이 四面으로 적의 침공을 받으므로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왕미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불을 질렀다.
왕미가 유요를 꾸짖기를 “
屠各(저각)의 자식에게 어찌 제왕의 뜻이 있겠는가.”
注+屠는 直於의 切이다. ≪晉書≫에 “北狄은 部落을 族類로 삼는바, 변방 안에 들어와 산 자 중에 屠各 등 19종류의 족속이 있는데 모두 部落이 따로 있어서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그중 屠各이 가장 호걸스럽고 귀하였으므로 單于가 되어 여러 종족들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유요와 틈이 생겨서 병력을 인솔하고 동쪽으로 가서
項關에 주둔하였다.
注+陳郡 項縣에 項關이 있다.
劉暾이 왕미를 설득하기를 “장군은 不世出의 공을 세우고 또 始安王(유요)과 사이가 좋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자신을 보전하려 합니까.
동쪽으로
本州(
靑州)를 점거하고 서서히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는 것만 못하니,
注+王彌는 靑州 東萊 사람이다. 〈그리하여 靑州를 本州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잘 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잘못되더라도 솥발의 형세를 이루어
三分天下의
功業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왕미가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目
[
目]
南陽王 司馬模가
牙門 趙染을
蒲坂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注+劉聰이 平陽에 있으면서 關中 지역을 엿보려 하였다. 蒲坂은 군대의 요충지이다. 조염이 병력을 거느리고
漢나라(
前趙)에 항복하니,
漢나라는 조염과 將軍 劉雅를 보내 長安에서 사마모를 공격하게 하고 劉曜와 劉粲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였다.
조염이 사마모의 군대를
潼關에서 패퇴시키고 승승장구하여
下邽까지 이르자,
注+下邽縣은 前漢 때에는 京兆에 속하였는데, 後漢 때에는 없애고 鄭縣으로 합병하였다가 桓帝 때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晉나라 때에는 馮翊郡에 속하였다. 應劭가 말하기를 “上邽가 있기 때문에 下邽라고 칭하였으니, 秦나라 武公이 邽 지역의 戎族을 정벌하고 설치했다.” 하였다. 涼州의 장수
北宮純이 장안에서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漢나라 군대가 장안을 포위하자, 사마모가 창고가 텅 비고 병졸들이 뿔뿔이 흩어져 마침내 漢나라에 항복하니, 劉粲이 그를 죽였다.
關西 지역에 기근이 들어서 白骨이 들판을 뒤덮고, 병사와 백성 중에 살아남은 자가 백 명 중에 한두 명 밖에 없었다. 漢主 劉聰은 劉曜를 雍州牧으로 삼아 中山王을 봉하고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사마모의 都尉 陳安이 병력을 거느리고 上邽에 있는 세자 司馬保에게 돌아가니, 사마보가 마침내 秦州를 점거하였다.
얼마 후 사마보가 大司馬를 칭하고 制命을 받들어 부서를 설치하니, 隴右 지역의 氐族과 羌族이 모두 따랐다.
目
[
目]
苟晞가 교만하고 사치하고 가혹하고 포악하니,
前 遼西太守 閻亨이 여러 번
諫하자, 그를 죽였다.
注+閻亨은 閻纘의 아들이다.
從事 明預가 병이 있었는데도 직접 수레를 타고 들어가서 간하자,
注+明은 姓이다. 구희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閻亨을 죽인 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와서 나를 꾸짖는가.” 하니,
명예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明公이 나를 禮로 대우하였기 때문에 나도 禮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제 明公이 나를 노여워하면 遠近에서 명공을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桀王은 天子인데도 교만함과 포악함으로 망하였는데 하물며 남의 신하된 자의 경우이겠습니까. 원컨대 명공은 우선 이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저의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구희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離反하고 원망하였으며, 게다가 역병과 기근이 들었다.
石勒이 蒙城을 습격하여 구희와 豫章王을 사로잡고는 구희의 목에 쇠사슬을 채워 左司馬로 삼았다.
目
[目] 漢나라(前趙) 大將軍 王彌가 石勒과 겉으로는 서로 친하였으나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마침 왕미의 장수 徐邈이 배반하고 떠나가니, 왕미의 군대가 점점 쇠약해졌다.
왕미는 석륵이 苟晞를 사로잡았다는 말을 듣고 내심 언짢아하면서도 편지로 석륵에게 축하하기를 “公이 구희를 사로잡아 등용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신묘합니까. 만일 구희가 공의 왼손이 되고 제가 공의 오른손이 되면 천하를 평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석륵이 張賓에게 이르기를 “王公이 지위가 높은데 말을 겸손하게 하니, 틀림없이 나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장빈이 인하여 석륵에게 왕미의 군대가 다소 쇠약한 틈을 타서 그를 유인하여 죽일 것을 권하였다.
目
[目] 이때에 王彌가 劉瑞와 서로 대치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왕미가 石勒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석륵이 허락하지 않았다.
張賓이 말하기를 “公이 항상 王公을 제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는데, 지금 하늘이 왕공을 우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니, 석륵이 마침내 군대를 인솔하고 유서를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왕미는 크게 기뻐하여 석륵이 실제로 자기와 친하다고 생각해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다. 석륵이 왕미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왕미가 술에 취하자 그의 목을 베고 그 병력을 자기 휘하에 병합하였다.
漢主 劉聰은 〈이 일을 알고〉 크게 노하고 사자를 보내어 ‘마음대로 公輔(大臣)를 살해하여 君主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고 석륵을 책망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석륵에게 鎭東大將軍을 加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苟晞가 점차 석륵을 배반할 것을 모의하자, 석륵이 그를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서
豫州의 여러
郡을 노략질하다가 장강에 이르러 군대를 되돌려
葛陂에 주둔하였다.
注+≪續漢書≫ 〈郡國志〉에 “汝南郡 鮦陽縣에 葛陂가 있다.” 하였다.
目
[目] 처음에 石勒이 남에게 붙잡혀 팔려갈 적에 그 어머니 王氏와 헤어졌다. 劉琨이 그녀를 찾아내고는 사자를 보내어 그 從子 石虎와 함께 석륵에게 보내고,
인하여 편지를 보내기를 “將軍의 용병술이 귀신과 같으나, 천하를 두루 떠돌아다녀도 발을 용납할 땅이 없으니, 이는 훌륭한 군주를 얻으면 의로운 군대가 되고, 역적에게 붙으면 역적의 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가 나뉘는 이치는 마치 호흡과 같으니, 급히 숨을 내쉬면 차갑게 느껴지고 서서히 내쉬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注+숨을 급히 내쉬는 것을 吹라 하고, 천천히 내쉬는 것을 噓라 한다. 지금 내가 그대에게
侍中을 제수하고
護匈奴中郞將을 겸하게 하니, 장군은 이것을 받으라.” 하였다.
석륵이 답장을 보내기를 “
功을 세우는 것은 길이 다르니, 이는 진부한
儒者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注+腐는 썩어 문드러진 모양이니, “腐儒”는 儒者가 진부한 견해만을 지키면서 時宜를 알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그대는 마땅히 그대의 조정(
晉나라)에 충절을 다할 것이요, 나는 직접 난을 평정하여
功效를 바치겠다.”
注+夷는 평정함이고, 難은 환란이고, “爲効”는 그 수고한 공효를 바치는 것이니, 〈“吾自夷難爲効”는〉 내(석륵)가 난을 평정하는 일로 스스로 공효를 바치겠다는 것이다. 하고는,
유곤에게 名馬와 진귀한 보물을 보내고 사자를 후하게 예우였으나, 그의 제의는 사절하였다.
目
[目] 遼東의 변방에 사는 鮮卑族인 素喜連과 木丸津이 요동의 여러 縣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郡의 군대를 여러 번 격파하였으나, 東夷校尉 封釋이 이들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백성들 중에 생업을 잃고
慕容廆에게 귀의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모용외의 작은아들
慕容翰이 모용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注+≪晉書≫ 〈載記〉에 근거해보면, 慕容翰은 慕容皝에게 庶兄이 되고 모용황은 慕容廆의 셋째아들이니, 그렇다면 모용한은 작은아들이 아니다. “예로부터 훌륭한 일을 한 군주는 모두
天子를 높여 백성들의 바람을 따르고서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소희연과 목환진이 끊임없이 포악하게 도둑질을 하니, 그들의 죄를 열거하여 토벌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위로는 어지러운 요동을 다시 회복하고 아래로는 소희연과 목환진 두
部를 병탄할 수가 있으니, 그리되면 우리의
忠義가
晉나라 조정에 드러나고 사사로운 이익이 우리나라로 돌아옵니다. 이는
霸王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注+2部는 素喜連과 木丸津을 이른다.
모용외가 웃으며 말하기를 “어린아이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소희연과 목환진을 공격할 적에 모용한을 선봉으로 삼아서 이들을 격파하여 참수하고, 소희연과 목환진 두 部의 무리를 모두 병합하였다.
봉석이 병이 위독해지자, 손자인 封奕을 모용외에게 부탁하였다.
봉석이
卒하자 모용외가 봉혁을 불러 함께 말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기이한 선비이다.”라 하고
小都督으로 임용하였다.
注+說(기뻐하다)은 悅로 읽는다.
봉석의 아들 封悛(봉전)과 封抽가 喪에 달려왔는데, 모용외는 이들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이 집안사람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千斤의 거세한 황소이다.” 하였다.
봉석의 아들들은 길이 통하지 않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 머물러 모용외에게 벼슬해서, 봉추는
長史가 되고 봉전은
參軍이 되었다.
注+抎은 羽敏의 切이니,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犍은 居言의 切이니, 거세한 황소이다. 千斤의 거세한 황소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인간 세상에서 많이 얻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一說에 “‘抎抎’은 강건하여 힘이 있는 모양이니, 犍은 바로 거세한 소로 강건하고 온순한데, 여기서는 다만 그 무겁고 큰 것만을 말했을 뿐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