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石勒이 築壘於葛陂하고 課農造舟하여 將攻建業이어늘
睿大集江南之衆於壽春하고 以紀瞻爲揚威將軍하여 討之러니
會에 大雨하여 三月不止하니 勒軍中이 飢疫하여 死者太半이라
集將佐議之하니 刁膺이 請送款於睿하여 求掃平河朔以自贖하고 俟其軍退하여 徐圖之한대 勒이 愀然長嘯러라
孔萇等이 請分道하여 夜攻壽春하여 據城食粟하고 要以今年에 定江南한대
勒
이 笑曰 是勇將之計也
注+言其不逆計勝敗, 但勇於赴敵耳.라하고 顧謂張賓曰 於君意
에 何如
오
目
賓曰 將軍이 攻陷京師하여 囚執天子하고 殺害王公하고 妻略妃主하니
擢將軍之髮
이라도 不足以數將軍之罪
니 奈何復相臣奉乎
注+擢, 拔也.잇가
今天이 降霖雨於數百里中하니 示將軍不應留此也니이다
鄴有三臺之固
하고 西接平陽
하고 山河四塞
하니 宜北據之
하여 以營河北
이니 河北旣定
이면 天下無處將軍之右者矣
注+水經注 “鄴城西北, 有三臺, 皆因城爲之基, 漢建安十五年, 魏武所起. 中曰銅臺, 高十丈. 其後石虎更增二丈. 南則金雀臺, 高八丈. 北則冰井臺, 亦高八丈.” 西接平陽, 謂近漢都, 可以壯聲援. 處, 昌呂切.리이다
宜使輜重으로 從北道先發하고 將軍이 引大兵하여 向壽春이니
輜重旣遠
하고 大兵徐還
이면 何憂進退無地乎
잇가 勒
이 攘袂鼓髯曰 張君計是也
注+攘袂, 揎袖出臂也. 揎, 息全切. 手發衣也. 皷髯, 謂皷頰須也.라하다
於是에 黜膺하고 擢賓爲右長史하여 號曰右侯라하다
遇晉運船하여 虎將士爭取之라가 爲紀瞻所敗하여 追奔百里하여 前及勒軍이러니 勒이 結陳待之하니 瞻이 不敢擊이러라
目
劉琨이 移檄州郡하여 期十月會平陽하여 擊漢이러니 琨이 素奢豪하고 喜聲色이라
徐潤이 以音律得幸하고 驕恣하여 于預政事어늘 護軍令狐盛이 數以爲言하니 琨이 收盛殺之하다
琨母曰 汝不能駕御豪傑하여 以恢遠略하고 而專除勝己하니 禍必及我라하더니
盛子泥奔漢하여 具言虛實하니 漢主聰이 大喜하고 遣粲, 曜하여 將兵寇幷州할새 以泥爲鄕導하다
琨이 聞之하고 東出하여 收兵於常山하고 且遣使求救於代러니 粲, 曜乘虛襲晉陽하니
琨이 還救不及하여 帥數十騎하고 奔常山하니 泥殺琨父母하다
目
王浚이 遣督護王昌하여 帥諸軍하고 及段疾陸眷與弟匹磾, 文鴦과 從弟末柸로 攻勒於襄國이러니 勒兵出戰에 皆敗하다
勒이 召將佐하여 曰 吾欲悉衆決戰하노니 何如오 諸將이 皆曰 不如堅守하여 俟其退而擊之니이다
張賓, 孔萇曰 鮮卑段氏最爲勇悍而末柸尤甚하고 其銳卒이 皆屬焉이라
今刻日來攻北城하니 必謂我孤弱하여 不敢出戰이라하여 意必懈惰라
宜且勿出하여 示之以怯하고 鑿北城하여 爲突門二十餘道라가
俟其來至하여 列守未定에 出其不意하여 直衝末柸帳하면
彼必震駭
하여 不暇爲計
리니 破之必矣
라 末柸敗
면 則其餘
는 不攻而潰矣
注+墨子備突篇曰 “城, 百步一突門. 突門, 用車兩輪, 以木束之, 塗其上, 維置突門內. 度門廣狹之. 令人入門四尺中, 置窐突. 門旁爲橐, 充竈 又置艾. 寇卽入, 下輪而塞之, 鼓橐薰之也.” 杜佑曰 “突門, 鑿城內爲闇門, 多少臨事, 令五六寸勿穿. 或於中夜, 於敵初來, 營列未定, 精騎從突門躍出, 擊其無備, 襲其不意.”리이다
目
勒이 從之하여 密爲突門이러니 旣而요 疾陸眷이 攻北城이어늘
勒이 登城望之라가 見其將士或釋仗而寢하고 乃命孔萇하여 督銳卒하고 從突門出擊之라가 不克而退하다
末柸逐之하여 入其軍門이라가 爲勒衆所獲하니 疾陸眷等軍이 皆退走어늘 萇이 乘勝追擊하니 枕尸三十餘里라
疾陸眷이 以鎧馬, 金銀賂勒하고 且以末柸三弟爲質而請末柸어늘
諸將
이 皆勸勒殺之
한대 勒曰 遼西鮮卑
는 健國也
라 與我素無仇讐
요 爲王浚所使耳
注+疾陸眷, 時爲遼西公.니
今殺一人而結一國之怨은 非計也라 歸之하면 必深德我하여 不復爲浚用矣라하고
乃遣石虎
하여 與疾陸眷
으로 盟于渚陽
하여 結爲兄弟
注+水經註 “絳瀆, 北逕信都城東, 散入澤渚, 西至信都城, 東連于廣川縣張甲故瀆, 同歸于海.” 疾陸眷蓋屯是渚之陽也.하다 疾陸眷等
이 引歸
하고 王昌亦還薊
어늘
勒이 召末柸하여 與之燕飮하고 誓爲父子하여 遣還한대 由是로 段氏專心附勒하니 浚勢遂衰하니라
目
[目] 漢主 劉聰이 太保 劉殷의 딸을 貴嬪으로 들이려 할 적에 太弟 劉义가 굳이 諫하자, 유총이 太宰인 劉延年과 太傅인 劉景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
太保가 스스로 자신은
劉康公의 후손이라고 해서 폐하와 근원이 다르니, 그의 딸을 귀빈으로 들이는 것이 어찌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
注+劉康公은 周나라의 卿士로서 劉 땅에 식읍을 갖고 있었는데 그 뒤에 인하여 氏로 삼았다. 劉聰은 匈奴의 후손인데 漢나라 황실의 생질이라 하여 劉氏 姓을 사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근원이 다르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유총이 기뻐하여 유은의 두 딸인 劉英과 劉娥를 左右貴嬪으로 삼으니 그들의 지위가 昭儀보다 높았고, 또 유은의 손녀 네 명을 들여서 모두 貴人으로 삼으니 지위가 貴妃의 다음이었다.
이에 여섯 劉氏에 대한 총애가 後宮을 진동하였다. 유총이 다시는 궁 밖에 나가는 일이 드물었고 정사도 모두 환관인 中黃門이 아뢰어 결정하였다.
目
[目] 石勒이 葛陂에 보루를 축조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독촉하고 배를 건조하게 하여 장차 建業을 공격하려 하였다.
司馬睿가 壽春에 江南의 병력을 크게 집결시키고 紀瞻을 揚威將軍으로 삼아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서 3개월 동안 그치지 않으니, 석륵의 軍中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석륵이 장수와 보좌관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하니, 刁膺이 우선 사마예에게 투항하고서 河朔 지역을 깨끗이 평정하여 속죄하기를 청하고 사마예의 군대가 후퇴하기를 기다려서 서서히 도모하자고 청하자, 석륵이 표정을 엄숙히 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孔萇 등이 길을 나누어 밤중에 壽春을 공격하여 城을 점거하고 성안에 있는 곡식을 먹으면서 기어이 금년에 江南 지역을 평정할 것을 청하자,
석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용맹한 장수의 계책이다.”
注+〈“勇將之計”는〉 미리 승패를 계산하지 않고, 다만 적에게 용감하게 달려갈 뿐임을 말한 것이다. 하고는
張賓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目
[目] 張賓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이 京師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天子를 잡아 가두고 王公들을 살해하고 妃와 공주들을 겁탈하였으니,
장군의 머리털을 뽑아 세더라도 장군의 죄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다시
晉나라의 신하가 되어 받들 수 있겠습니까.
注+擢은 뽑음이다.
이제 하늘이 수백 리 지역에 장맛비를 내리니, 이는 하늘이 장군에게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보이는 것입니다.
鄴城은
三臺의 견고함이 있고 서쪽으로
平陽과 인접하였으며, 산과 강하가 사방으로 둘러 있는 요새이니, 마땅히 북쪽으로 업성을 점거하여
河北 지방을 경영해야 합니다. 하북 지방이 평정되면 천하에 장군의 위에 있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注+≪水經註≫에 “鄴城의 서북쪽에 三臺가 있는데 모두 城을 따라 세웠으니, 漢나라 建安 15년(210)에 魏나라 武帝(曹操)가 세운 것이다. 가운데를 銅臺라 하니 높이가 10丈인데, 그 뒤에 石虎가 다시 2丈을 증축하였다. 남쪽은 金雀臺이니 높이가 8丈이고, 북쪽은 冰井臺이니 이 또한 높이가 8丈이다.” 하였다. “西接平陽”은 漢나라(前趙) 도성과 가까워서 크게 성원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處(자리하다)는 昌呂의 切이다.
마땅히 輜重隊로 하여금 북쪽 길을 따라 먼저 출발하게 하고, 장군은 대군을 인솔하고서 壽春으로 향해야 합니다.
치중대가 이미 멀리 떠나가고 대군이 서서히 철수하여 돌아간다면, 전진하고 후퇴함에 근거할 땅이 없음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석륵이 소매를 걷고 수염을 실룩거리며 말하기를 “
張君의 계책이 옳다.”
注+“攘袂”는 소매를 걷어 팔뚝을 드러내는 것이다. 揎은 息全의 切이니, 손으로 옷을 걷어 올리는 것이다. “皷髯”은 뺨에 난 수염을 실룩거리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이에 刁膺을 내치고 장빈을 右長史로 발탁하여 ‘右侯’라고 칭하였다.
석륵이 군대를 이끌고 葛陂를 출발할 적에 石虎를 보내어 수춘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晉나라의 운반선을 만나 석호의 장병들이 다투어 곡식을 취하다가
紀瞻에게 패하여 백 리를 쫓겨 달려가서 앞에 있는 석륵의 군대와 만났다. 석륵이 진영을 설치하고 대비하니, 기첨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紀瞻이 石虎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다
目
[
目]
漢主 劉聰이 황제에게 이르기를 “
卿이 옛날
豫章王으로 있을 적에
朕이
王武子와 함께
卿을 찾아가니,
卿이
朕에게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은으로 만든 벼루를 주었는데,
卿은 그 일을 모두 기억하는가?”
注+武子는 王濟의 字이다. 柘(산뽕나무)는 之夜의 切이니, 산뽕나무는 가지가 길게 뻗어 올라가는데 단단하고 곧고 길며 잎이 작고 두터워서 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硏(벼루)은 硯과 같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臣이 어찌 감히 그것을 잊겠습니까. 다만 그날 진즉에 龍顔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劉聰이 말하기를 “卿의 집안은 骨肉 간에 어찌 이와 같이 서로 해쳤는가?”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大漢이 장차 하늘의 뜻에 응하여 天命을 받게 될 것이므로 폐하를 위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몰아낸 것이니, 이는 아마도 하늘의 뜻이요 사람의 일이 아닌 듯합니다.
또 臣의 집안이 만약 武皇帝(司馬炎)의 大業을 받들어서 九族이 화목하였으면, 폐하가 어떻게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유총은 기뻐하여 작은 劉貴人을 황제에게 주어 妻를 삼게 하고는, 말하기를 “이는 名公의 손녀이니, 卿은 잘 대우하라.” 하였다.
目
[目] 漢主 劉聰은 물고기와 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 하여 左都水使者를 참수하고,
溫明殿과
徽光殿 두 궁전을 지을 적에 완성하지 못했다 하여
將作大匠을 참수하였으며,
汾水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느라 밤이 늦도록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注+≪晉書≫ 〈百官志〉에 “都水使者는 漢나라 水衡의 직책이다.” 하였다.
이에 王彰이 諫하기를 “지금 어리석은 백성들이 漢나라(前趙)로 귀의하는 뜻은 견고하지 못하고, 晉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직도 지극합니다.
게다가
劉琨이 지척에 있어
刺客이 도처에서 횡행하니,
注+〈“劉琨咫尺”은〉 漢나라(前趙)의 도성인 平陽이 劉琨이 있는 晉陽과 거리가 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帝王이 함부로 출행하면 한 지아비의 상대가 될 뿐입니다.” 하니,
유총이 크게 노하여 그를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왕창의 딸이 유총의 夫人이었는데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 친정아버지의 생명을 애걸하자, 마침내 왕창을 가두었다.
目
[
目]
太后 張氏는
劉聰의 형벌이 지나치다 하여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고,
注+張氏는 劉淵의 側室인데, 劉聰을 낳아 태후로 높여졌다. 또
太弟 劉义와
單于 劉粲이
棺을 수레에 싣고 가서 간절히 간하니,
유총이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桀‧紂와 같은 폭군이겠는가. 너희들은 내가 살아 있는데도 와서 곡하는가.” 하였다.
太保 劉殷 등 백여 명이 모두 冠을 벗고 눈물을 흘리며 간하자, 유총이 서글퍼하며 말하기를 “朕이 어제 크게 취하여 그리하였을 뿐, 나의 본심이 아니다. 公 등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朕이 잘못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는,
그들에게 각각 비단 백 필을 하사하고, 侍中으로 하여금 節을 잡고 가서 왕창을 사면하게 하고 관직을 더하고 定襄郡公으로 봉하였다.
目
[目] 劉殷은 漢主 劉聰의 얼굴을 범하거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나, 일에 따라 간언을 올려서 유총을 보익하는 바가 매우 컸다. 한주 유총이 여러 신하들과 政事를 의논할 적에, 유은은 내내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하지 않다가,
여러 신하들이 나가면 홀로 남아서 조리 있게 설명하면서 일에 마땅함을 헤아리고 요점을 드니, 유총이 일찍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注+商은 헤아림이다. 搉은 그 대략을 드는 것이다.
유은이 항시 자기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君主를 섬길 적에는 마땅히 은미하게 간할 것을 힘써야 하니, 보통 사람들에게도 대면하여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萬乘의 군주에 있어서이겠는가.
은미하게 간하는 것은, 그 효과가 군주의 얼굴을 범하여 直諫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면서도 군주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 때문에 훌륭한 방도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유은은
公卿들 사이에 있으면서 항상
信實하여 자신을 낮추고 사양하는 기색이 있었다.
注+“恂恂”은 信實한 모양이다. 그러므로 교만하고 포악한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 있으면서도 부귀를 보존하고 훌륭한 명성을 잃지 않아서
天壽를 누릴 수 있었다.
目
[目] 劉琨이 형의 아들 劉演을 鄴城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石勒이 황하를 건너가니, 유연이 三臺를 지켜 스스로를 견고히 하였다.
석륵의 여러 장수들이 유연을 공격하려고 하자, 張賓이 다음과 같이 만류하였다. “공격하면 대번에 함락하기가 쉽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저들이 장차 스스로 궤멸할 것입니다.
지금
王彭祖(
王浚)와
劉越石(
劉琨)은
公의 큰 적입니다. 마땅히 먼저 이들을 공격해야 하니, 유연은 굳이 돌아볼 상대가 못 됩니다.
注+彭祖는 王浚의 字이고, 越石은 劉琨의 자이다.
또 천하가 기근이 들고 혼란한데, 明公이 병력을 보유한 채 타향에 기거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안정된 뜻이 없으니, 공격하는 것은 萬全을 기하여 사방을 제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편리한 지역을 가려 점거해서 식량과 물자를 널리 모아 서쪽으로
平陽에 보내서
幽州와
幷州를 도모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霸王의
基業입니다.”
注+위의 永嘉 3년(309)에, 漢나라가 도읍을 平陽으로 옮겼다. 幽州는 王浚을 이르고, 幷州는 劉琨을 이른다.
석륵이 마침내 전진하여
襄國을 점거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명해서
冀州의
郡縣을 공격하고 곡식을 운반하여 양국으로 수송하게 하니,
漢나라(
前趙)가 석륵을
冀州牧으로 삼았다.
注+襄國縣은 秦나라 때에는 信都라고 하였고, 項羽가 襄國으로 고쳤으며 漢나라 때에는 趙國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廣平에 속하였으며 信都는 따로 縣이 되었다.
目
[目] 劉琨이 州郡에 격문을 보내어 10월에 平陽에서 크게 모여 漢나라(前趙)를 공격하기로 기약하였는데, 유곤은 평소 사치스럽고 호방하였으며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였다.
徐潤이 音律로 유곤의 총애를 얻고는 교만하고 방자하여 政事에 간여하자, 護軍 令狐盛이 여러 번 이에 대해 말하니, 유곤이 영호성을 체포하여 죽였다.
유곤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豪傑들을 제대로 통솔하여 원대한 方略을 넓히지 못하고, 오로지 너보다 나은 자를 제거하려 하니, 禍가 반드시 나에게 미칠 것이다.” 하였다.
영호성의 아들 令狐泥가 漢나라로 달아나서 유곤의 虛實을 자세히 말하니, 漢主 劉聰이 크게 기뻐하고 劉粲과 劉曜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幷州를 침략하게 하였는데, 이때 영호니를 鄕導로 삼았다.
유곤은 이 말을 듣고 동쪽으로 출발하여 常山에서 병력을 규합하고 또 사자를 보내어 代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유찬과 유요가 빈틈을 타고 晉陽을 기습하니,
유곤이 미처 제때에 돌아와 구원하지 못하여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常山으로 달아났다. 이에 영호니가 유곤의 부모를 죽였다.
目
[目] 王浚이 督護 王昌을 보내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段疾陸眷과 그의 아우 段匹磾, 段文鴦과 從弟 段末柸와 함께 襄國에서 石勒을 공격하게 하니, 석륵의 군대가 출전할 때마다 모두 패하였다.
석륵이 장수와 보좌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결전을 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말하기를 “견고히 지키면서 저들이 후퇴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張賓과 孔萇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鮮卑 중에 段氏가 가장 용맹하고 사나운데, 그중에도 단말배가 특히 더 심하고 또 정예병이 모두 다 그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제 저들이 날짜를 정하고 와서 우리의 北城을 공격하니, 저들은 우리가 고단하고 약하여 감히 출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 반드시 마음이 해이해질 것입니다.
우선 출격하지 말고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북성에 지하도를 파서 突門(성문 이외의 비밀 출구) 20여 개를 만들었다가,
저들이 쳐들어올 때를 기다려 적진이 아직 정해지기 전에 저들이 뜻하지 않은 때에 출동해서 곧바로 단말배의 막하를 충돌하면,
저들이 반드시 진동하고 놀라서 계책을 세울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말배가 패하면 그 나머지는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注+≪墨子≫ 〈備突篇〉에 “城 백 步마다 突門 하나를 설치한다. 돌문에는 수레바퀴 두 개를 사용하는데 수레바퀴에 나무를 묶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서 돌문 안에 매어둔다. 문의 너비에 따라 수레바퀴의 크기를 조절한다. 사람을 문 안의 4尺 정도 되는 곳에 들여보내 아궁이와 굴뚝을 설치하게 한다. 문 옆에 불을 일으키는 풀무를 만들며 아궁이에는 나무와 쑥을 가득히 채워 넣는다. 적이 쳐들어오면 수레바퀴를 떨어뜨려 문을 막고 풀무질을 하여 연기를 피운다.” 하였다. 杜佑가 말하기를 “突門은 城 밑을 파서 비밀 문을 만들되 많고 적음은 때에 따라 알맞게 하며 5, 6寸은 파지 말고 그대로 둔다. 혹 한밤중이나 적이 처음 쳐들어와서 대오와 진영이 정해지기 전에, 정예 기병이 돌문을 통하여 뛰쳐나가 적이 대비함이 없을 때 공격하고 적이 뜻하지 않을 때 기습한다.” 하였다.
目
[目] 石勒이 그의 말을 따라 은밀히 突門을 만들었는데, 얼마 후 段疾陸眷이 北城을 공격하였다.
석륵이 城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단질륙권의 장병들이 혹 병기를 놓고 잠을 자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孔萇에게 명하여 정예병을 이끌고 돌문을 따라 나가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게 하였다.
段末柸가 추격하여 공장의 軍門으로 들어갔다가 석륵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히니, 단질륙권 등의 군대가 모두 후퇴하여 달아났다. 공장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니, 시신이 30여 리에 이어졌다.
단질륙권이 석륵에게 갑옷을 입혀 무장한 말과 金銀을 뇌물로 보내고, 또 단말배의 세 아우를 인질로 보내고 단말배와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석륵에게 단말배를 죽이기를 권하였으나, 석륵이 말하기를 “
遼西의
鮮卑는
強健한 나라이다. 평소 우리와 원한이 없고 다만
王浚에게 사주를 받았을 뿐이니,
注+段疾陸眷이 이때 遼西公으로 있었다.
이제 단말배 한 사람을 죽여서 한 나라와 원한을 맺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그를 돌려보내면 반드시 우리를 매우 고맙게 여겨서 다시는 왕준에게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石虎를 보내어 단질륙권과
渚陽에서 맹약하고서 형제가 되기로 결의하였다.
注+≪水經註≫에 “絳瀆은 북쪽으로 信都城 동쪽을 지나 흩어져 澤渚로 들어가는데, 서쪽으로 신도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廣川縣의 張甲 옛 냇물과 이어져서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段疾陸眷이 아마도 渚水의 북쪽에 주둔한 듯하다. 이에 단질륙권 등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고,
王昌 또한
薊縣으로 돌아갔다.
석륵이 단말배를 불러 연회를 베풀어 함께 술을 마시고 父子가 되기로 맹세하고서 그를 돌려보내자, 이로부터 段氏가 오로지 한마음으로 석륵에게 귀의하니, 왕준의 형세가 마침내 쇠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