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8권 하
晉 愍帝 建興 원년(313)~晉 元帝 太興 원년(318)
癸酉年(313)
孝愍皇帝建興元年이라
漢嘉平三年이라
春二月 漢主劉聰 弑帝於平陽注+壽, 三十.하니 하다
正月朔 漢主聰 宴群臣於光極殿할새 使帝著靑衣行酒注+劉淵起光極殿於平陽.하니
庾珉, 王儁等 不勝悲憤하여 因號哭한대 惡之러니
有告珉等 謀以平陽應劉琨等이어늘 遂殺珉, 儁等하고 帝亦遇害하니 諡曰孝懷라하다
漢主聰 爲劉后하여 起䳨儀殿注+䳨, 本作凰, 䳨儀, 義取鳳凰來儀.한대 廷尉陳元達 切諫하여 以爲 天生民而樹之君 使司牧之
非以兆民之命으로 窮一人之欲也 是以 先帝身衣大布하고 居無重茵하며
后妃不衣錦綺하고 乘輿馬不食粟注+衣, 於旣切.하니이다 陛下踐祚以來 已作殿觀四十餘所하고
加之軍旅數興하여 餽運不息하고 饑饉, 疾疫으로 死亡相繼어늘 而益思營繕하시니 豈爲民父母之意乎잇가
大怒하여 曰 朕 爲天子하여 營一殿 何問汝鼠子乎 命左右하여 曵出斬之하고 幷其妻子하여 梟首東市하다
在逍遙園李中堂이러니 元達 先鎖腰而入하여 卽以鎖 鎖堂下樹하고
呼曰 臣所言者 社稷之計어늘 而陛下殺臣하시니 朱雲有言호되 臣得與龍逢, 比干遊 足矣라하니이다 左右曳之호되 不能動이라
大司徒任顗等 叩頭出血하여 曰 元達 爲先帝所知하여 盡忠竭慮하여 知無不言하니
臣等 毎見之 未嘗不發愧니이다 今言雖狂直이나 願陛下容之하소서 黙然이러라
劉后聞之하고 密勅左右停刑하고 手疏上言호되 今宮室已備하니 無煩更營이요
四海未一하니 宜愛民力이니이다 廷尉之言 社稷之福也 宜加封賞이어늘
而更誅之하시면 四海謂陛下何如哉잇가 夫忠臣進諫者 固不顧其身也 而人主拒諫者 亦不顧其身也
陛下爲妾營殿하여 而殺諫臣이면 使忠良結舌者由妾이요 遠近怨怒者由妾이요
公私困弊者由妾이요 社稷阽危者由妾注+阽音, 反坫之坫, 又音屋檐之檐, 近邊, 知墮意.하여 天下之罪 皆萃於妾하리니 妾何以當之리잇고
妾觀自古敗國喪家 未始不由婦人하고 心常疾之러니 不意今日 身自爲之호니
使後世視妾 由妾之視昔人也注+由, 與猶通. 誠無面目復奉巾櫛하오니 願賜死此堂하노이다
覽之하고 變色하여 命顗等하여 冠履就坐하고
引元達上注+上, 升堂也.하여 以表示之하고 曰 外輔如公하고 內輔如后하니 朕復何憂리오하고
更命園曰納賢園이라하고 堂曰愧賢堂이라하고 謂元達曰 卿當畏朕이어늘 而反使朕畏卿邪
懷帝凶問 至長安하니 皇太子擧哀하고 因加元服하고 卽帝位하여 以梁芬爲司徒하고 麴允, 索綝爲僕射하니
是時 長安城中 戸不盈百하고 蒿荊成林하고 公私有車四乘이요 百官 無章服, 印綬하고 唯桑版署號而已러라
尋以綝爲衛將軍하여 領太尉하여 軍國之事 悉以委之하다
寇長安하니 僕射麴允 拒之하다
◑石勒 遣石虎하여 攻陷鄴而據之하다
劉琨 用焦求하여 爲兗州刺史러니 荀藩 又用李述爲之하니 召求還하다
及鄴城失守 復以劉演爲兗州하여 鎭廩丘注+廩丘縣, 前漢屬東郡, 後漢屬濟陰郡, 晉屬濮陽國.하다
前中書侍郞郗鑑 少以淸節著名이러니 帥高平千餘家하여 避亂하여 保嶧山注+鑑, 隆之兄子也. 隆, 慮之玄孫. 高平縣, 舊屬梁國, 晉爲高平國, 泗水逕其西. 有高平山, 山東西十里, 南北五里, 高四里. 其山最高頂上方平, 故謂之高平山, 縣亦取名焉. 水經註 “嶧山在鄒縣北, 繹邑之所依以爲名也. 山東西二十里, 高秀獨出, 積石相臨, 殆無土壤. 石間多孔穴, 洞達相通, 往往有如數間屋處, 其俗謂之嶧孔. 遭亂, 輒將家入嶧, 外寇雖衆, 無所施害.”이어늘
琅邪王 就用爲兗州하여 鎭鄒山注+鄒山, 在魯郡鄒縣.하니 三人 各屯一郡이라 兗州吏民 莫知所從이러라
琅邪王睿 以華譚爲軍諮祭酒하고 陳頵爲譙郡太守하다
嘗在壽春 依周馥이러니 至是하여 睿謂譚曰 周祖宣 何故反注+祖宣, 馥字.
譚曰 周馥 雖死 天下尙有直言之士니이다 見寇賊滋蔓하고 欲移都以紓國難이어늘
執政 不悅하여 興兵討馥이러니 死未踰時 而洛都淪沒하니 若謂之反이면 不亦誣乎잇가
睿曰 馥 位爲征, 鎭하여 召之不入하고 危而不持하니 亦天下之罪人也니라
譚曰 然하니이다 危而不持 當與天下共受其責이니 非但馥也니이다
睿參佐多避事自逸이어늘 參軍陳頵 言於睿曰 洛中承平之時 朝士以小心恭恪으로 爲凡俗하고
偃蹇倨肆 爲優雅하니 流風相染하여 以至敗國이러니
今僚屬 皆承西臺餘弊하여 養望自高注+江東謂洛都爲西臺.하니 前車已覆이어늘 而後車又將隨之也
請自今으로 臨使稱疾者 皆免官이니이다 不從하다
三王之誅趙王倫也 制己亥格以賞功이러니 自是 循而用之하니
頵曰 昔 趙王簒逆하여 惠皇失位어늘 三王 討之 故厚賞以懷嚮義之心이러니
今功無大小 皆以格斷注+言功之輕重差次, 皆以己亥格例決斷之.하여 乃至金紫佩士卒之身하고 符策委僕隷之門하니
非所以重名器, 正紀綱也 請一切停之하노이다 出於寒微하여 數爲正論하니 府中 多惡之하여 出爲譙郡太守하다
玘宗族 彊盛하니 琅邪王睿 頗疑憚之하고 睿左右用事者 多中州亡官失守之士 駕御吳人하니 吳人 頗怨이러라
玘自以失職하고 又爲刁協所輕이라하여 陰與其黨으로 謀誅執政하고 以南士代之러니 事泄하여 憂憤而卒하다
將死 謂其子勰曰注+勰, 音協. 殺我者 諸傖子也 能復之라야 乃吾子也注+傖, 士行切. 吳人謂中州人曰傖.라하니라
慕容廆攻段氏하여 取徒河하다
中國民避亂者 多依王浚이러니 政法不立하니 往往去之하고
段氏兄弟 專尙武勇하여 不禮士大夫로되 唯廆政事修明하고 愛重人物이라 故多歸之러라
廆以裴嶷, 陽耽으로 爲謀主하고 遊邃, 逢羨, 封抽, 裴開 爲股肱하고 宋該, 皇甫岌, 岌弟眞 及封奕, 封裕 典機要注+裕, 抽之子也.하다
淸方有幹略이러니 兄武爲玄菟太守라가커늘
與武子開 以其喪歸할새 過廆한대 廆敬禮之하다
行及遼西 道不通하여 欲還하니 開曰 等爲流寓인댄 段氏彊하고 慕容氏弱하니 何必去此而就彼也잇고
嶷曰 欲求託足之地인댄 豈可不愼擇其人이리오 汝觀諸段 豈有遠略이리오 且能待國士乎注+諸段, 謂段疾陸眷‧段匹磾‧段文鴦‧段末柸等.
慕容公 修仁行義하여 有霸王之志하고 加以國豐民安하니
今往從之하면 高可以立功名이요 下可以庇宗族이니 汝何疑焉이리오 旣至 廆大喜러라
邃嘗避地於薊러니 後歸廆하다 王浚 屢以手書 招其兄暢하니 欲赴之어늘
邃曰 彭祖必不能久 宜且磐桓以俟之注+磐桓, 旋也.니이다
暢曰 彭祖忍而多疑하니 今手書殷勤이어늘 而稽留不往이면 將累及卿注+累, 謂事相緣及也.하리라
且亂世 宗族宜分하여 以冀遺種이라하니 遂從之러니 卒與浚俱沒하니라
五月 以琅邪王睿爲左丞相하고 南陽王保爲右丞相하여 分督陝東西諸軍事하다
詔曰 今當掃除鯨鯢하고 奉迎梓宮이라 令幽, 幷兩州 勒卒三十萬하여 直造平陽注+鯨鯢, 大魚, 鉤網所不能制, 以比敵人之魁桀者. 奉迎梓宮, 謂懷帝遇害於平陽, 梓宮未返也.하노니
右丞相 宜帥秦, 涼, 梁, 雍之師하여 徑詣長安하고 左丞相 帥所領精兵하여 造洛陽하여 同赴大期하여 克成元勳하라하다
又詔睿以時進軍하여 與乘輿會하여 除中原이라하니
睿辭以方平定江東하여 未暇北伐이라하고 以刁協爲丞相左長史하고 劉隗爲司直하니
隗雅習文史하고 善伺候睿意故 特親愛之러라
主簿熊遠 上書하여 以爲軍興以來 處事 不用律令하여 主者不敢任法하여 毎輒關諮하니 非爲政之體也注+關, 白也.
愚謂凡爲駁議者 皆當引律令, 經傳이요 不得直以情言하여 無所依準하여 以虧舊典이니이다
若開塞隨宜하고 權道制物 此人君之所得行이니 非臣子所宜用也니이다 睿不能從하다
左丞相睿 以祖逖爲豫州刺史하다
范陽人注+漢涿郡, 魏文帝更名曰范陽郡.이라 少有大志하여 與劉琨으로 俱爲司州主簿러니 同寢이라가 中夜 聞鷄鳴하고
蹴琨覺하여 曰 此非惡聲也라하고 因起舞注+蹴, 蹋也. 覺, 居効切, 寤也.하니라
及渡江 左丞相睿 以爲軍諮祭酒하니 居京口하여 糾合驍健注+吳孫權自吳徙丹徒, 謂之京城. 有京峴山在其東, 其城因山爲壘, 俯臨江津, 故曰京口. 繩三合爲糾. 糾, 言合三爲一也.하고
言於睿曰 晉室之亂 非上無道而下怨叛也 由宗室爭權하여 自相魚肉하여 遂使戎狄乘隙하여 毒流中土
今遺民思奮하니 大王 誠能命將出師하고 使如逖者統之하여 以復中原이면 郡國豪傑 必有望風響應者矣리이다
睿素無北伐之志 以逖爲豫州刺史하여 給千人廩 布三千匹注+給千人糧廩及布三千匹而已.하고 不給鎧仗하여 使自召募하다
將其部曲百餘家하고 渡江할새 中流 擊楫而誓曰 祖逖 不能淸中原而復濟者 有如大江이라하고
遂屯淮陰하여 起冶鑄兵하고 募得二千餘人而後注+淮陰縣, 前漢屬臨淮郡, 後漢屬下邳國, 晉屬廣陵郡.하다
陶侃 破走杜弢하니 하다
周顗屯潯水城하여 爲杜弢所困注+潯, 本作尋. 廬山記曰 “尋陽縣, 在大江之北‧尋水之陽.” 潯水城, 無乃古之尋陽城乎.이러니 陶侃 使將軍朱伺救之하니 弢退保泠口注+泠, 音聆. 胡三省曰 “水經註 ‘泠水南出九疑山, 北流逕泠道縣西南, 又北流, 注于都溪水, 又西北入于營水, 所謂泠口也.’ 余攷此泠口, 去武昌甚遠. 又水經註 ‘江水自蘄春故城南, 又東得銅零口.’ 此無乃是乎.”어늘
使伺 逆擊大破之하니 弢遁歸長沙하다 乃表侃刺荊州하여 屯沔江注+水經注 “林障故城, 在沔南.” 沔江, 謂林障也.하니 左丞相睿召顗하여 復爲軍諮祭酒하다
氐王楊茂搜之子難敵 遣養子하여 販易於梁州어늘 刺史張光 殺之하다
及光 與王如餘黨楊虎 相攻 求救於茂搜하니 茂搜遣難敵救光한대 虎厚賂難敵하여 與夾擊光하여 大破之하다
嬰城自守하여 憤激成疾이어늘 僚屬 勸光退據魏興한대
按劍하고 曰 吾受國重任하여 不能討賊하니
今得死如登仙이니 何謂退也오하고 聲絶而卒하니 難敵 竟攻拔之하다
陶侃 復擊杜弢하여 大破之하다
◑漢劉曜寇長安이어늘 十一月 麴允 破走之하다
曜使趙染으로 帥精騎하고 襲長安하여 夜入外城하니 帝奔射雁樓하다
焚龍尾及諸營하고 退屯逍遙園注+龍尾者, 依城築道, 陂陁而漸高, 登陴所由之路也. 又水經曰 “秦時有黑龍, 從南山出, 飮渭水. 其行道因山成跡, 長六十餘里, 頭臨渭水, 尾達樊川. 漢蕭何起未央宮, 斬龍首山而營之, 頭高二十丈, 尾漸下, 高五六丈. 所謂龍尾者, 此山之尾也.” 水經註 “沈水, 上承皇子陂於樊川, 北逕長安城西, 與昆明池水合. 沈水又東北流, 逕鄧祠南, 又東分爲二水. 一水東入逍遙園.”이어늘 將軍麴鑑 帥衆救長安이러니 與曜遇於零武하여 鑑兵 大敗注+前漢北地郡, 有靈武縣, 後漢‧晉省.하다
曜恃勝不設備러니 麴允 引兵襲之하여 漢兵大敗하고 殺其將軍喬智明하니 曜引歸平陽하다
十二月 石勒 遣使하여 奉表於王浚하다
謀稱尊號어늘 劉亮, 高柔切諫한대 皆殺之注+此又一高柔, 非魏之高柔.하다 燕國霍原 志節淸高하여 屢辭徵辟이러니
浚以尊號事問之한대 不答이어늘 誣以罪하여 殺而梟其首하다
於是 士民駭怨이로되 而浚 矜豪日甚하여 不親政事하다
所任 皆苛刻小人이요 棗嵩, 朱碩 貪橫尤甚注+棗嵩, 姓名.하니
北州謠曰 府中赫赫 朱丘伯이요 十囊五囊 入棗郞注+丘伯, 碩字. 嵩, 浚之壻, 故曰棗郞.이라하니라
石勒 欲襲之로되 未知虛實하여 將遣使覘之러니 參佐請用羊祜, 陸抗故事하여 致書於浚注+欲用敵國交隣之禮이어늘
勒以問張賓한대 賓曰 浚 名爲晉臣이나 實欲廢晉自立이로되 但患四海英雄莫之從耳
將軍 威振天下하니 今折節事之라도 猶懼不信이어늘 況爲羊, 陸之亢敵乎잇가
夫謀人而使人覺其情이면 難以得志矣리이다
勒曰 善타하고 遣舍人王子春하여 奉表於浚하여 曰 勒 本小胡 遭世饑亂하여
流離屯厄하여 竄命冀州하여 竊相保聚하여 以救性命이니이다
今晉祚淪夷하고 中原無主하니 爲帝王者 非公復誰 願殿下應天順人하여 早登皇祚하라
奉戴殿下 如天地父母하니 殿下察勒微心이면 亦當視之如子也리이다
甚喜하여 謂子春曰 石公 可信乎 子春曰 殿下 中州貴望으로 威行夷, 夏하니
自古胡人 爲輔佐名臣則有矣어니와 未有爲帝王者也 石將軍 非惡帝王不爲而讓於殿下
顧以帝王 自有歷數하여 非智力之所取故也 又何怪乎잇가
大悅하여 遣使報聘하다 遊綸兄統 爲浚鎭范陽이러니 遣使私附於勒注+遊綸保據苑鄕, 僞降於勒, 勒已襲禽之.이어늘
斬其使以送浚하니 雖不罪統이나 益信勒爲忠誠하여 無復疑矣러라
左丞相睿 遣世子紹하여 鎭廣陵하다
以丞相掾蔡謨爲參軍하다
代城盛樂及平城하다
代公猗盧城盛樂하여 以爲北都하고 治故平城하여 爲南都注+平城, 漢屬雁門郡.하고
又作新平城於灅水之陽하여 使右賢王六脩居之하여 統領南部注+灅, 魯水切. 灅水, 蓋出於馬邑, 而東北流, 逕平城之南.하다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8권 하
愍帝 建興 원년(313)~ 元帝 太興 원년(318)
癸酉年(313)
[] 나라 孝愍皇帝 建興 원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嘉平 3년이다.
[] 봄 2월에 漢主 劉聰이 황제( 懷帝)를 平陽에서 시해하니,注+ 懷帝는〉 향년이 30세였다. 庾珉王儁이 이때 죽었다.
[] 정월 초하루에 漢主 劉聰光極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황제로 하여금 푸른 옷을 입고 차례로 술을 따라 술잔을 돌리게 하니,注+劉淵平陽光極殿을 세웠다.
庾珉王儁 등이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흐느껴 통곡하자, 유총이 그들을 미워하였다.
이때 마침 어떤 사람이 유민 등이 平陽을 가지고 劉琨 등에게 內應할 것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자, 유총은 마침내 유민과 왕준 등을 죽였다. 황제 또한 살해를 당하니, 시호를 孝懷라 하였다.
[] 3월에 나라가 貴嬪 劉娥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 漢主 劉聰劉后를 위하여 䳨儀殿을 지으려 하자,注+는 본래 으로 되어 있으니, “䳨儀”는 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廷尉 陳元達이 다음과 같이 간절히 하였다. “하늘이 백성을 내고 군주를 세운 것은, 군주로 하여금 백성을 맡아 기르게 한 것이요,
결코 만백성의 목숨으로 군주 한 사람의 욕망을 만족시키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先帝(劉淵)께서는 몸소 삼베옷을 입고 거처하는 곳에 이중으로 된 깔자리가 없었으며,
后妃들도 얇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황제의 수레를 끄는 말은 곡식을 먹지 않았습니다.注+(입다)는 於旣이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이미 궁전과 누각 40여 곳을 지었고
게다가 군대를 자주 일으켜서 끊임없이 군량을 운반하였으며 또 기근과 역병으로 죽는 자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궁실을 경영하고 수선할 것을 생각하시니, 어찌 하늘이 폐하를 백성의 부모로 세운 뜻이겠습니까.”
유총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천자가 되어서 궁전 하나를 경영하는 것이 쥐새끼 같은 너희들에게 어찌 물을 것이 있단 말인가.” 하고는, 좌우 신하에게 진원달을 끌어내어 참수하고 그 처자식까지 아울러 참수하여 동쪽 시장에 梟示하라고 명하였다.
[] 이때에 劉聰逍遙園 李中堂에 있었는데, 陳元達이 먼저 허리에 쇠사슬을 감고 들어왔다가 즉시 쇠사슬로 아래의 나무에 자신의 몸을 묶어 매고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 말씀드린 것은 社稷을 위한 계책인데, 폐하께서는 신을 죽이려 하십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그를 끌어내려 하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陳元達이 쇠사슬로 허리를 묶고 漢王에게 간언하다陳元達이 쇠사슬로 허리를 묶고 漢王에게 간언하다
大司徒 任顗 등이 피가 나도록 땅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진원달은 先帝에게 知遇를 받아 충성과 사려를 다해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등은 매번 그를 볼 때마다 일찍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그의 말이 비록 거칠고 솔직하나 폐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유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劉后가 이 말을 듣고 은밀히 좌우에게 명하여 의 집행을 중지하게 하고, 손수 상소문을 써서 다음과 같이 上言하였다. “지금 궁실이 이미 구비되어 있으니, 번거롭게 다시 경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백성들의 힘을 아껴야 합니다. 廷尉(陳元達)의 말은 社稷이니, 封爵을 내리셔야 마땅한데,
도리어 그를 죽이신다면 천하 사람들은 폐하를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간언을 올리는 忠臣은 진실로 자기 한 몸의 安危를 돌아보지 않고, 간언을 거절하는 군주 또한 자기 한 몸에 대한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을 위하여 궁전을 경영해서 간언하는 신하를 죽이신다면, 충직하고 선량한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간하지 않는 것도 첩 때문이요, 遠近에서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것도 첩 때문이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곤궁하고 피폐해지는 것도 첩 때문이요, 사직이 위태로움에 빠지는 것도 첩 때문입니다.注+反坫(술잔을 놓는 자리)의 이요, 또 屋檐(처마)의 이니, 가장자리에 가까우면 떨어질 줄 아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천하의 죄가 모두 첩의 몸에 모일 것이니, 첩이 어떻게 이것을 감당하겠습니까.
첩이 보건대,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망하는 것이 일찍이 婦人 때문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첩은 마음속으로 항상 이것을 미워했는데, 뜻밖에 오늘 첩이 바로 이런 사람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첩을 보기를, 지금 첩이 옛날 나라와 집안을 망친 부인을 보듯 할 것입니다.注+(같다)는 한다. 첩은 진실로 다시 수건과 빗을 받들고 폐하를 모실 면목이 없으니, 원컨대 이 에서 첩에게 죽음을 내려주소서.”
[] 劉聰劉后의 상소문을 보고 얼굴빛이 변하여 任顗 등에게 명하여 을 쓰고 신을 신고 자리로 나오게 하고,
陳元達을 인도하여 堂上으로 오르게 해서注+堂上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유후의 상소문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밖에서는 과 같은 사람이 보필하고 안에서는 황후와 같은 사람이 보필하니, 이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고는,
逍遙園의 이름을 고쳐 納賢園이라 하고 李中堂愧賢堂이라 하였다. 진원달에게 이르기를 “을 두려워해야 마땅한데, 도리어 으로 하여금 을 두려워하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 여름 4월에 太子 司馬業長安에서 즉위하니, 索綝(삭침)이 太尉를 겸하였다.
[] 懷帝凶問(부음)이 長安에 이르니, 皇太子을 발표하여 애도하고 인하여 冠禮를 행하고 帝位에 올라 梁芬司徒로 삼고, 麴允索綝僕射로 삼았다.
이때 長安城 안에는 戶口가 채 100호가 되지 못하였고 쑥과 가시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보유한 수레가 4대뿐이었다. 또 백관들은 印綬가 없고 오직 뽕나무 판에 관직명을 썼을 뿐이었다.
얼마 후 삭침을 衛將軍으로 삼아 太尉를 겸하게 하고서 軍國의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겨 처리하게 하였다.
[] 나라(前趙)가 長安을 침략하니, 僕射 麴允이 막았다.
[] 石勒石虎를 보내어 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점거하였다.
[] 처음에 劉琨焦求를 등용하여 兗州刺史로 삼았는데, 荀藩이 또 李述을 등용하여 연주자사로 삼으니, 유곤이 초구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鄴城이 함락되자, 유곤은 다시 劉演을 연주자사로 삼아서 廩丘縣에 진주하게 하였다.注+廩丘縣前漢 때에는 東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濟陰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濮陽國에 속하였다.
中書侍郞 郗鑑(치감)은 어려서부터 청백한 절개로 이름이 났었는데, 高平의 천여 가호를 거느리고 을 피하여 嶧山을 지키자,注+郗鑑郗隆의 형의 아들이고, 치융은 郗慮玄孫이다. 高平縣은 옛날에는 나라에 속하였다가 나라 때에는 高平國이 되었는데, 泗水가 그 서쪽을 지나갔다. 여기에 高平山이 있는데, 산은 동서가 10리이고 남북이 5리이며 높이가 4리이다. 이 산의 최고 정상이 사방으로 평평하기 때문에 고평산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고평현 또한 여기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다. ≪水經註≫에 “嶧山鄒縣의 북쪽에 있으니, 繹邑은 이 산을 따라 이름한 것이다. 이 산은 동서가 20리인데 높이 빼어나 홀로 우뚝 솟아 있으며, 쌓인 돌들이 마주하고 있는데, 거의 흙덩이가 없다. 돌 사이에 구멍이 많아서 훤하게 뚫려 서로 통하였으며, 도처에 여러 칸의 집과 같은 동굴이 있다. 세속에서는 이곳을 일러 嶧孔이라 하는데, 을 만날 때마다 가솔을 거느리고 역공으로 들어가면, 밖에 적이 아무리 많아도 〈안에 있는 사람을〉 해칠 방법이 없었다.” 하였다.
琅邪王(司馬睿)이 역산에 가서 그를 등용하여 연주자사를 삼아서 鄒山에 진주하게 하였다.注+鄒山魯郡 鄒縣에 있다. 그리하여 이술, 유연, 치감 세 사람이 모두 한 고을에 주둔하게 되니, 연주의 관리와 백성들은 누구를 따라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 琅邪王 司馬睿華譚軍諮祭酒로 삼고, 陳頵(진균)을 譙郡太守로 삼았다.
[] 華譚이 일찍이 壽春에 있을 적에 周馥에게 의지해 있었다. 이때 司馬睿가 화담에게 이르기를 注+祖宣周馥이다. 하니,
화담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복이 비록 죽었으나 천하에는 아직도 직언하는 선비가 있습니다. 주복은 적들이 점점 불어나는 것을 보고 都邑을 옮겨 國難을 늦추려고 하였는데,
執政大臣이 좋아하지 않아서 군대를 일으켜 주복을 토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복이 죽은 지 한 철이 지나지 않아서 都城洛陽이 함락되었으니, 만약 그가 배반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마예가 말하기를 “주복은 지위가 , 인데도 불구하고 불러도 들어오지 않고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붙들어 지키지 않았으니, 그도 천하의 죄인이다.” 하니,
화담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붙들어 지키지 않은 것은 비단 주복 한 사람뿐만이 아니니, 마땅히 천하 사람과 함께 그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하였다.
[] 司馬睿의 참모들이 대부분 일을 피하면서 자신의 편안함을 꾀하자, 參軍 陳頵이 사마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洛陽이 태평하던 때에 조정의 관리들이 조심하고 공손하고 근신하는 것을 평범하고 속되다 하고,
교만하고 방자한 것을 優雅하다 하니, 그 풍속에 물들어서 나라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관속들이 모두 西臺(낙양)의 남은 병폐를 계승하여 虛名을 길러 높은 체하니,注+江東에서는 도성인 洛陽을 일러 西臺라고 하였다. 이는 앞의 수레가 이미 전복되었는데 뒤의 수레가 또 그 前轍을 뒤따라 밟으려 하는 꼴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使命을 받고도 병을 핑계하는 자는 모두 관직을 파면하여야 합니다.” 사마예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 齊王 司馬冏, 成都王 司馬穎, 河間王 司馬顒의 세 왕이 趙王 司馬倫을 주벌할 적에 〈己亥格〉을 제정하여 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명하였는데, 이후로 이것을 따라 사용하니,
陳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趙王이 찬탈하고자 역모를 꾸며 孝惠皇帝가 지위를 잃었는데, 三王이 이들을 토벌하였으므로 후하게 상을 내려서 로움에 향하는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기해격〉의 예로 결단하여,注+〈“今功無大小 皆以格斷”은〉 輕重에 따른 차등을 모두 〈己亥格〉에 준하여 결단함을 말한 것이다. 마침내 金紫士卒의 몸에 채우고 符策을 노예의 집에 맡기니,
이는 名器를 소중히 여기고 紀綱을 바로 잡는 방도가 아닙니다. 일절 정지할 것을 청합니다.” 진균은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자주 올바른 의논을 하니, 府中이 거의 다 그를 미워하여 譙郡太守로 내보냈다.
[] 吳興太守 周玘하였다.
[] 周玘宗族이 강성하니 琅邪王 司馬睿가 그를 몹시 의심하고 꺼려하였다. 사마예의 좌우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대부분 중원에서 관직을 잃고 지키던 지역을 잃은 인사들이었는데, 이들이 지역 사람들을 통솔하니 지역 사람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주기는 자신이 직책을 잃었고 또 刁協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여겨서 은밀히 그 무리와 함께 執政大臣을 주살하고 남쪽 인사로 대신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어 근심하고 울분을 터뜨리다가 하였다.
죽을 적에 그의 아들 周勰(주협)에게 이르기를注+이다. “나를 죽인 자는 저 들이니, 나를 위해 복수를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나의 아들이라 할 것이다.”注+士行이니, 지역 사람들은 중원 사람을 일러 이라 한다. 하였다.
[] 慕容廆段氏를 공격하여 徒河를 점령하였다.
[] 처음에 중원의 백성 중에 난리를 피하는 자들이 대부분 王浚에게 의지했었는데, 왕준이 政事와 법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자, 도처로 떠나갔다.
段氏 형제는 오로지 武勇을 숭상하여 士大夫들을 예우하지 않았으나, 오직 慕容廆는 정사를 분명하게 처리하고 인재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으므로 그에게 귀의하는 자가 많았다.
모용외가 裴嶷(배억)과 陽耽(양탐)을 謀主로 삼고 遊邃(유수)와 逢羨(봉선), 封抽裴開股肱으로 삼고 宋該皇甫岌과 그의 아우 皇甫眞封奕封裕에게 중요한 機務를 맡게 하였다.注+封裕封抽의 아들이다.
[] 裴嶷은 청렴결백하고 방정하며 일을 주관하는 지략이 있었다. 배억은 형 裴武玄菟太守로 있다가 하자,
배무의 아들 裴開와 함께 형의 영구를 모시고 돌아갈 적에 慕容廆를 방문하니, 모용외가 공경히 예우하였다.
상여의 행차가 遼西에 이르렀을 적에 길이 막혀 배억이 모용외에게 돌아가려고 하니, 배개가 말하기를 “똑같이 더부살이를 할 것이라면, 段氏는 강하고 慕容氏는 약한데, 어찌 굳이 이곳의 단씨를 버리고 저 모용씨에게 나갈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배억이 말하였다. “발을 붙일 곳을 구하려고 한다면, 어찌 의탁할 사람을 신중히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가 보건대, 여러 단씨들이 원대한 經略을 갖고 있으며, 또 우리들을 國士로 대우할 수 있겠는가.注+여러 段氏段疾陸眷段匹磾, 段文鴦, 段末柸 등을 이른다.
慕容公를 닦고 행하여 霸王의 뜻이 있고 게다가 나라가 풍족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니,
이제 우리가 가서 그를 따르면, 높게는 功名을 세울 수 있고 낮게는 우리 宗族을 비호할 수 있는데, 너는 무엇을 의심하는가.” 배억이 모용외의 처소에 도착하자, 모용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 遊邃가 일찍이 薊城에 피난하였었는데, 뒤에 慕容廆에게 귀의하였다. 王浚이 여러 번 손수 편지를 써서 그의 형인 遊暢을 부르니, 유창이 부름에 달려가고자 하자,
유수가 말하기를 “彭祖(왕준)는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우선 떠나지 말고 머뭇거리면서 기다려야 합니다.”注+磐桓”은 머뭇거림이다. 하였다.
유창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팽조는 잔인하고 의심이 많다. 이제 손수 편지를 써서 간곡하게 청하였는데 내가 지체하고 가지 않으면, 장차 에게 가 미칠 것이다.注+는 일이 서로 연루되어 가 미침을 이른다.
亂世에는 종족이 마땅히 흩어져서 종족을 남기기를 바라야 한다.” 유수가 그의 말을 따랐는데, 유창은 마침내 왕준과 함께 죽었다.
[] 5월에 琅邪王 司馬睿左丞相으로 삼고 南陽王 司馬保右丞相으로 삼아서, 陝東陝西의 여러 軍事를 나누어 감독하게 하였다.
[] 詔令을 내려 “이제 마땅히 큰 고래와 같은 적을 깨끗이 소탕하고 황제( 懷帝)의 梓宮을 받들어 맞이하여야 한다. 幽州幷州로 하여금 30만의 병력을 무장하여 곧바로 平陽으로 달려가게 하였으니,注+고래는 큰 물고기로, 갈고리와 그물로 잡을 수 없으니, 들 중에 출중하고 호걸스러운 자를 비유한 것이다. “奉迎梓宮”은 懷帝平陽에서 살해당하였는데 재궁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음을 이른다.
右丞相은 마땅히 秦州, 涼州, 梁州, 雍州의 병력을 인솔하여 곧바로 長安으로 나아가고, 左丞相은 거느리고 있는 정예병을 인솔하고서 洛陽으로 가서 회합하기로 한 날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 큰 공을 이루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려 司馬睿에게 제때 진군해서 乘輿와 만나 함께 모여 中原의 적을 소탕하자고 하였다.
사마예는 막 江東 지역을 평정하여 북쪽을 정벌할 겨를이 없다고 사양하고는, 刁協丞相左長史로 삼고 劉隗司直로 삼았는데,
유외가 평소 文史에 익숙하고 사마예의 뜻을 잘 살폈으므로, 특별히 그를 친애하였다.
[] 主簿 熊遠이 글을 올려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사무를 처리함에 律令을 따르지 않아서, 사무를 주관하는 자가 감히 법에 따라 행하지 못하고 매번 아뢰어 자문하니, 政事를 처리하는 바른 방도가 아닙니다.注+은 아룀이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건대, 반박하는 의논을 하는 자는 모두 율령과 經傳을 인용해야 할 것이요, 의거하고 기준 삼는 바가 없이 곧바로 사사로운 을 말하여 옛 법전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개방하고 금지하는 것을 편의대로 하고 시의적절하게 변통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人君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신하가 쓸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司馬睿는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 左丞相 司馬睿祖逖(조적)을 豫州刺史로 삼았다.
[] 祖逖范陽 사람이다.注+나라 涿郡나라 文帝가 이름을 고쳐 范陽郡이라 하였다.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劉琨과 함께 司州主簿가 되었었는데 함께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는
유곤을 발로 차서 잠을 깨우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 하고, 인하여 일어나 검무를 추며注+은 발로 참이다. 居効이니, 잠을 깨우는 것이다. 〈무술을 연마하였다.〉
[] 長江을 건넌 뒤에 左丞相 司馬睿祖逖軍諮祭酒로 삼으니, 조적은 京口에 머물면서 날래고 건장한 자들을 규합하고는,注+나라 孫權 지역에서 丹徒로 도읍을 옮기고 京城이라 하였다. 京峴山이 그 동쪽에 있는데 그 이 산을 이용하여 보루를 만들고 강 나루터를 굽어보기 때문에 京口라고 하였다. 끈 3개가 합쳐진 것을 라 하니, 는 3개를 합하여 하나로 만듦을 말한 것이다.
사마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가 혼란한 것은 윗사람이 無道하여 아랫사람이 원망하고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요, 宗室이 권력을 다투느라 자기들끼리 서로 殺戮하여 마침내 오랑캐로 하여금 틈을 타고 침입하게 하여 그 가 중국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라의 遺民들이 분발할 것을 생각하니, 大王이 진실로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키고 저와 같은 자로 하여금 군대를 통솔하여 中原을 회복하게 하면, 郡國의 호걸들 중에 소문을 듣고 부응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사마예는 평소 북쪽을 정벌할 뜻이 없었으므로 조적을 豫州刺史로 삼아 천 명이 먹을 곡식과 3천 필의 삼베만 지급하고注+〈“給千人廩 布三千匹”은〉 천 명이 먹을 양식과 3천 필의 삼베를 공급했을 뿐이다. 갑옷과 병기를 지급하지 않고서는, 조적으로 하여금 직접 병사들을 불러 모집하게 하였다.
[] 祖逖은 자기 백여 가구를 거느리고 長江을 건너갈 적에 中流에서 노를 두드리면서 맹세하기를 “나 조적은 중원의 적을 쓸어내고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니 만일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내가 벌을 받을 것을〉 장강의 신에게 맹세하노라.” 하고는,
祖逖이 노를 두드리며 豫州를 취하다祖逖이 노를 두드리며 豫州를 취하다
淮陰에 주둔하고서 대장간을 세워 병기를 주조하고 2천여 명을 모집한 뒤에 계속 전진하였다.注+淮陰縣前漢 때에는 臨淮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下邳國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廣陵郡에 속하였다.
[] 陶侃杜弢를 격파하여 패퇴시키니, 王敦이 표문을 올려 도간을 荊州刺史로 삼았다.
[] 周顗潯水城에 주둔하여 杜弢에게 곤궁을 당하였는데注+은 본래 으로 되어 있다. 에 “尋陽縣大江(장강)의 북쪽 尋水의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潯水城은 옛날의 尋陽城이 아니겠는가. 陶侃將軍 朱伺를 보내어 구원하니, 두도가 泠口로 후퇴하여 수비하였다.注+이다. 胡三省이 말하였다. “≪水經註≫에 ‘泠水가 남쪽 九疑山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泠道縣의 서남쪽을 지나서 또다시 북쪽으로 흘러 都溪水로 유입하며 또 서북쪽으로 흘러서 營水에 들어가니, 이곳이 이른바 泠口이다.’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상고해보건대, 이 泠口武昌과 거리가 매우 멀고, 또 ≪수경주≫에 ‘江水蘄春의 옛 남쪽에서 흘러 또다시 동쪽으로 銅零口를 만난다.’ 하였으니, 이곳이 泠水가 아니겠는가.”
도간이 주사를 보내어 두도를 맞아 공격하여 대파하니, 두도가 도망하여 長沙로 돌아갔다. 王敦은 마침내 표문을 올려 도간을 荊州刺史로 삼아서 沔江에 주둔하게 하니,注+水經註≫에 “林障의 옛 沔水의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沔江은 임장을 이른다. 左丞相 司馬睿가 주의를 불러 다시 軍諮祭酒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氐族楊難敵梁州를 침략하여 함락시키니, 刺史 張光하였다.
[] 처음에 氐族楊茂搜의 아들 楊難敵이 자신의 養子를 보내어 梁州에서 물건을 판매하자, 刺史 張光이 그를 죽였다.
장광이 王如의 잔당인 楊虎와 교전할 적에 양무수에게 구원을 청하니, 양무수가 양난적을 보내어 장광을 구원하게 하였다. 양호가 양난적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함께 협공해서 장광을 대파하였다.
장광이 성벽을 둘러싸고 스스로 지키다가 격분한 나머지 병을 얻게 되자, 관속들이 장광에게 魏興으로 후퇴하여 수비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장광은 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내가 국가의 중한 책임을 맡아서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싸우다가 죽을 수 있다면, 이는 마치 신선이 되는 것과 같다. 어찌 후퇴하라고 말하는가.” 하고는 말을 마치고 하니, 양난적이 끝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陶侃이 다시 杜弢를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 나라(前趙) 劉曜長安을 침략하자, 11월에 麴允이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 劉曜趙染을 보내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장안을 기습하게 하여 조염이 밤중에 外城으로 들어가니, 황제가 射雁樓로 달아났다.
조염이 龍尾와 여러 에 불을 놓고서 후퇴하여 逍遙園에 주둔하자,注+龍尾에 의지하여 길을 낸 것으로 구불구불 우회하여 점점 높아지는데, 성가퀴에 오를 때에 경유하는 길이다. 또 ≪水經≫에 “나라 때에 黑龍이 남산에서 나와 渭水의 물을 마셨는데 그 용의 행적이 산을 따라 흔적을 이루어서 길이가 60여 리에 이르렀는바, 용의 머리는 渭水에 닿고 꼬리는 樊川에 도달하였다. 나라 蕭何未央宮을 지을 적에 龍首山을 잘라 궁궐을 경영하였는데, 머리 부분의 높이가 20이고 꼬리 부분은 점점 낮아져 높이가 5, 6이었으니, 이른바 龍尾는 이 산의 꼬리 부분이다.” 하였다. ≪水經註≫에 “沈水는 위로 樊川에서 皇子陂를 이어서 북쪽으로 長安城 서쪽을 지나 昆明池의 물과 합하며, 침수는 또 동북쪽으로 흘러 鄧艾를 모시는 사당의 남쪽을 지나 또다시 동쪽으로 두 개의 물줄기로 나뉘는데, 한 물줄기는 逍遙園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將軍 麴鑑이 병력을 거느리고 장안을 구원하였는데, 零武에서 유요와 만나 국감의 병력이 대패하였다.注+前漢北地郡靈武縣이 있었는데, 後漢나라 때에는 없앴다.
유요가 승리한 것을 믿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麴允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기습하여 나라(前趙) 군대를 대패시키고서 나라의 장군 喬智明을 죽이니, 유요가 병력을 인솔하고 平陽으로 돌아갔다.
[] 12월에 石勒이 사자를 보내어 王浚에게 표문을 받들어 올렸다.
[] 王浚尊號를 칭할 것을 도모하자, 劉亮高柔가 간절히 하니, 그들을 다 죽였다.注+이것은 또 다른 高柔요, 가 아니다. 燕國 사람 霍原志節淸高하여 왕준의 부름을 여러 번 사양하였다.
왕준이 尊號하는 일로 물었는데 곽원이 대답하지 않으니, 왕준은 죄를 엮어 모함하여 죽여서 梟首하였다.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놀라고 원망하였으나, 왕준은 날로 점점 더 교만과 호기를 부리면서 정사를 직접 다스리지 않았다.
또 그가 신임하여 정사를 맡긴 사람들은 모두 가혹하고 각박한 소인이었고, 棗嵩朱碩이 특히 심하게 탐욕스럽고 횡포를 부리니,注+棗嵩은 사람의 성명이다.
북쪽 지방에서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 안에서 〈권세가〉 赫赫한 자는 朱丘伯(주석)이요, 열 주머니 중에 다섯 주머니는 棗郞(조숭)에게 들어간다.”注+丘伯朱碩이다. 棗嵩王浚의 사위이므로 棗郞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 石勒王浚을 기습하고자 하였으나, 虛實을 알지 못하여 장차 사자를 보내어 엿보려 하였는데, 보좌들이 를 따라 왕준에게 편지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注+〈“請用羊祜 陸抗故事”는〉 敵國이 이웃나라와 사귀는 를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석륵이 張賓에게 물으니, 장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준이 명목상으로는 나라 신하라고 하나 실제는 나라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즉위하고자 하는데, 다만 四海의 영웅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근심할 뿐입니다.
장군은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니, 지금 허리를 굽혀 그를 섬기더라도 그가 믿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양호와 육항이 서로를 대등한 적수로 여겼던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남을 도모하면서 남으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게 하면 뜻을 얻기 어렵습니다.”
[] 石勒이 말하기를 “좋다.” 하고는, 舍人王子春을 보내어 王浚에게 다음과 같이 표문을 올렸다. “저 석륵은 본래 작은 오랑캐로 기근이 들고 혼란한 세상을 만나서
살 곳을 잃고 流離하면서 곤궁하여 冀州 지역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삼가 서로 모여 지키면서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國統이 망하고 中原에 군주가 없으니, 이 아니면 帝王이 될 자가 다시 누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殿下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인심에 순응하여 속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석륵은 천지와 부모처럼 전하를 받들어 섬기니, 전하께서 저의 보잘것없는 마음을 헤아리신다면, 또한 응당 저를 자식처럼 여기실 것입니다.”
[] 王浚石勒이 올린 표문을 보고 몹시 기뻐하여 王子春에게 이르기를 “石公을 믿을 수 있는가?” 하니, 왕자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殿下中州의 현달하고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위엄이 오랑캐와 中夏 지역에 진동합니다.
예로부터 오랑캐 사람 중에 제왕을 보좌한 名臣은 있으나 제왕이 된 자는 있지 않습니다. 石將軍이 제왕의 지위를 싫어하여 제왕이 되려 하지 않고 전하에게 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왕은 본래 歷數(運數)가 있어서 지혜와 힘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또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십니까.”
왕준이 크게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어 聘問에 답하였다. 遊綸의 형 遊統이 왕준을 위하여 范陽鎭守하고 있었는데, 사자를 보내어 은밀히 석륵에게 귀의하려 하였다.注+遊綸苑鄕을 점거하고서 거짓으로 石勒에게 항복하였는데, 석륵이 끝내 그를 습격하여 사로잡았다.
석륵이 그 사자를 참수하여 왕준에게 보내니, 왕준은 비록 유통을 처벌하지는 않았으나, 석륵의 충성을 더욱 믿어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다.
[] 左丞相 司馬睿世子 司馬紹를 보내어 廣陵에 진주하게 하였다.
[] 丞相蔡謨參軍으로 삼았다.
[] 나라가 盛樂平城에 성을 쌓았다.
[] 代公 拓跋猗盧盛樂에 성을 쌓아 北都로 삼고 옛 平城을 수리하여 南都로 삼았으며,注+平城나라 때에는 雁門郡에 속하였다.
灅水(누수)의 북쪽에 새로운 平城을 쌓고서 右賢王 拓跋六脩로 하여금 이곳에 거주하면서 南部를 통솔하게 하였다.注+魯水이니, 灅水馬邑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平城의 남쪽을 지나간다.


역주
역주1 漢主劉聰……死之 : “戰國의 篇에서는 魏나라 사람이 衛나라 君主를 죽였을 때 ‘殺’이라고 썼으니, 이는 다른 나라의 군주를 죽였을 때 쓰는 말이다.(己酉年(B.C.252)) 그런데 劉聰을 漢主라고 썼다면 그에게 ‘弑’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上下尊卑를 구분한 것이다. 이 때문에 황제를 ‘會稽郡公에 봉했다.’라고 썼는데, 이때 다시 ‘황제’라고 쓰고 漢主는 ‘유총’이라고 지척하여 썼으니, 이는 낮은 발을 높은 머리 위에 둘 수 없어서이다. 庾珉과 王儁이 처음에 슬퍼하고 분노했다는 이유로 유총에게 미움을 샀고 뒤이어 어떤 사람이 그들이 劉琨에게 호응할 것이라고 고발하자, 이에 그들을 죽였고 황제 또한 살해를 당했으니, 그렇다면 두 신하의 죽음이 황제보다 먼저인 것이다. 그런데 ≪資治通鑑綱目≫에서 어찌하여 시해를 먼저 썼는가. 시해를 먼저 쓴 것은 두 신하의 죽음이 황제를 위하여 죽은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死之’라고 크게 썼으니, 그가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것을 권면하는 뜻이 깊다.[戰國之篇 魏人殺衛君 書殺 異國辭也(己酉年) 聰書漢主 則其書弑 何 首足之分也 是故帝書封會稽郡公矣 此復書帝 而漢主斥書劉聰 不以足加首也 珉儁始以悲憤 見惡(오)於聰 繼有告其應劉琨者 於是殺之 而帝亦遇害 則二臣之死 先於帝矣 綱目曷爲先書弑 先書弑 所以著二臣之死 爲帝而死也 大書死之 其爲死節之勸 深矣]” ≪書法≫
“劉淵이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즉위했을 적에 그가 반란했다고 쓰지 않은 것은 晉나라가 중화와 오랑캐를 엄격하게 분별하지 않고 골육 간에 서로 해쳐서 적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劉聰의 平陽의 禍에서 ‘弑’라고 쓴 것은 유총은 본디 晉나라의 신하였기 때문이고 또 바깥 오랑캐로 하여금 중국을 능멸할 수 없게 하려 한 것이다. 아! 夷狄의 禍가 이에 이르러 지극하였다. 천지가 이 때문에 어두워지고 일식과 월식이 이 때문에 일어났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의 큰 변고로서 보통 일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庾珉과 王儁에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고 쓴 것은, 바로 오랑캐와 중화의 구분을 엄격히 하고 군주와 신하의 뜻을 보존하여 三綱을 붙들고 사람된 도리의 표준을 세워서 먼 후대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人君이 이것을 본다면, 또한 은미할 때 방비하고 禍亂의 근원을 막아서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도모하여 공경히 예를 닦아 나라를 다스리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아 천하를 통치하고, 힘써 덕을 밝혀서 천하 사람들이 귀의해오게 하고, 게으르거나 방탕하지 않아서 사방 오랑캐가 왕으로 받들게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 반딧불이 저절로 꺼지고 중국이 다스려지면 外患이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거의 옳을 것이다. 천하를 소유한 자는 부디 이를 거울삼을지어다.[劉淵擧兵自立 不書其反者 晉氏不謹華戎之辨 且又骨肉相殘 有以致寇也 劉聰平陽之禍 則書弑者 聰固晉之臣子 且不使外夷得以加中國也 嗚呼 夷狄之禍 至此極矣 天地爲之晦冥 日月爲之薄蝕 斯固古今之大變 而非可以常事論者 庾珉王儁書其死節 正以嚴夷夏之分 存君臣之意 扶三綱 立人極 爲萬世之戒也 人君觀此 其亦防微杜漸 不見是圖 謹於禮以處國 勤於政以御宇 務明其德而天下歸 無怠無荒而四夷王 必使大明旣升 而爝火自熄 中國旣治 而外患自弭 則亦庶乎其可也 有天下者 尙監玆哉]” ≪發明≫
역주2 漢立其貴嬪劉娥爲后 : “娥는 무엇인가. 字이다. 后를 세울 적에 氏를 쓰고 字를 쓴 적이 있지 않았은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字를 썼는가. 비난한 것이다. 무엇을 비난하였는가. 劉英과 劉娥가 똑같이 貴嬪의 지위에 있었는데 나이가 적은 유아를 황후에 붙인 것을 비난한 것이다. 유아는 漢나라(前趙)와 同姓이었으니, 妾이 동성인 것도 잘못인데, 하물며 동성을 세워 황후로 삼는단 말인가.[娥者 何 字也 立后書氏 未有書字者 此則曷爲書字 譏也 何譏 英娥同位 譏屬少者也 娥漢同姓 妾同姓 非矣 況立爲后乎]” ≪書法≫
역주3 봉황이……것 : 帝王의 德化가 지극하여 靈物인 봉황에게까지 미쳤음을 이른다. ≪書經≫ 〈虞書 益稷〉에 “堂 아래에는 관악기와 鼗鼓를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柷과 敔(어)로써 하며 笙과 鏞(큰 종)을 번갈아 연주하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추고, 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거동에 맞게 춤을 추었다.[下管鼗鼓 合止柷敔 笙鏞以間 鳥獸蹌蹌 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보인다.
역주4 옛날……족합니다 : 漢나라 成帝 때 朱雲이 大臣의 무능함을 지적하고 丞相이며 황제의 師傅인 張禹를 죽여 나머지 사람들을 격려하라고 청하자, 성제가 노하여 주운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御史가 주운을 끌어내리려 하자 주운은 殿의 난간을 잡고 버티니, 난간이 부러졌다. 이때 주운이 큰소리로 “신은 죽어 충신 關龍逢(관용방)과 比干을 따라 지하에서 노닐면 족합니다.” 하였다.(≪漢書≫ 권67 〈朱雲傳〉) 관용방은 직간을 하다가 桀王에게 살해된 夏나라의 현인이고, 비간은 殷나라 왕실의 종친으로, 포학하고 음란한 紂王에게 직간을 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역주5 太子業……領太尉 :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索綝에게 ‘以’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태자가 아직 어려서 삭침을 좌지우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自’라고 쓴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이는 ≪資治通鑑綱目≫의 變例이다. 그러므로 황태자에게 ‘奉’이라고 쓴 적이 있지 않았는데, 司馬業에게는 특별히 ‘奉’이라고 썼으며(懷帝 永嘉 6년(312)), 上의 명령이 아니면 ‘自’라고 쓰지 않은 적이 없는데 麴允과 삭침에게는 ‘領’이라고만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일의 輕重을 따지는 것이 분명하다.[太子卽位矣 綝不書以 何 太子尙幼沖 非能以之也 然與書自者 有間矣 此綱目之變例也 故皇太子未有書奉者 業特書奉(懷帝永嘉六年) 非上命 未有不書自者 允綝止書領 綱目之權衡 審矣]” ≪書法≫ 사마업에게 특별히 ‘奉’이라고 쓴 것은 본서 296쪽 綱의 “奉秦王業爲皇太子”를 가리킨다.
역주6 章服 : 해, 달, 별 등의 무늬를 수놓은 예복이다. 그림 하나가 1章인데, 천자는 12장의 예복을 입고 신하들은 품계에 따라 9장, 7장, 5장, 3장으로 등급을 낮췄다.
역주7 周祖宣(주복)이……배반했는가 : 周馥이 洛陽이 위태롭다 하여 표문을 올려 壽春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였는데 당시 太傅였던 司馬越이 주복이 먼저 자기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불렀으나 주복이 가지 않았다. 이에 司馬睿가 주복을 공격하여 죽였다. 이는 본서 265쪽에 보인다.
역주8 吳興太守周玘卒 : “太守에게는 ‘卒’이라고 쓰지 않는데 周玘에게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태수를 ‘卒’이라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태수에게 ‘卒’이라고 쓴 것이 4번이다.(周玘, 郝超, 謝瞻, 馮寳)[太守不書卒 卒玘 何 錄功也 太守書卒始此 終綱目 太守書卒四(周玘 郝超 謝瞻 馮寳)]” ≪書法≫
역주9 傖子 : 魏晉南北朝時代에 남쪽 지방 사람들이 북쪽 지방 사람들을 멸시하여 부른 호칭이다.
역주10 部曲 : 원래 군대의 편제를 지칭하는 말로 大將軍의 營이 五部이고 部에는 校尉가 한 명 있다. 部 아래에는 曲이 있는데, 曲에는 軍候가 한 명 있다.(≪後漢書≫ 권34 〈百官志〉) 따라서 部曲은 將軍의 휘하 부대 또는 將軍의 부하를 의미한다. 특히 後漢 末과 삼국시대에 부곡은 장군이나 호족의 사적 예속성을 띤 무장세력을 지칭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예속민까지 지칭하게 된다. 또한 이를 良賤制의 입장에서 南北朝時代를 거쳐 일반 民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賤民의 일종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辛聖坤, 〈魏晉南北朝時期 部曲에 대한 再考察〉, ≪東洋史學硏究≫ 40, 1992)
역주11 王敦 表侃爲荊州刺史 : “王處仲(王敦)이 표문을 올려 陶侃을 荊州刺史로 삼았는데, 그 일을 씀에는 애당초 폄하하는 말이 없다. 그러나 또한 그가 專橫하려는 조짐을 볼 수 있으니, 닥쳐올 禍를 미리 알고 방비해야 하는 경계로 삼을 만하다.[王處仲表陶侃刺荊州 書之 初無貶詞 然亦足見其專輒之漸 可爲履霜之戒]” ≪發明≫
역주12 廬山記 : 宋나라 陳聖兪가 熙寧 5년(1072)에 유교, 불교, 도교의 연고지로 유명한 廬山을 직접 돌아보고 지은 地理誌이다.
역주13 氐楊難敵……刺史張光卒 : “이때에 張光이 卒한 뒤에 城이 함락되었는데, 먼저 ‘梁州를 침략하여 함락시켰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양주를 함락당하게 한 잘못을 가지고 장광을 죄책한 것이다. 어찌하여 그를 죄책하였는가. 장광이 楊難敵의 자식을 죽이고서 楊茂搜에게 구원을 청하였다면, 양난적이 올 때 그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마땅하다. 비상사태에 대비하지 않으면 군대를 지휘할 수가 없으니, 梁州城이 함락된 것은 장광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먼저 함락되었다고 쓰지 않는다면, 장광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於是光卒而後城陷 先書寇陷 何 以失守之罪 罪光也 曷爲罪之 光殺難敵之子 而求援於茂搜 則難敵之來 宜有以備之矣 不備不虞 不可以師 城之陷 光爲之也 不先書陷 則光得以逃其責矣]” ≪書法≫
역주14 (文)[艾] : 저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艾’로 바로잡았다.
역주15 魏나라의 高柔 : 陳留郡 圉縣 출신으로 자는 文惠이다. 袁紹 진영의 사람이었으나 원소가 멸망한 뒤에는 曹操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후 魏나라 文帝(曹丕), 明帝(曹叡) 대까지 활약하였다. 249년 반란을 일으킨 司馬懿를 진압하기 위하여 曹爽 진영에서 行大將軍事로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太尉로 승진하였다. 법을 존중한 장수였으며,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역주16 羊祜와 陸抗의 故事 : 晉나라 양호가 鉅平侯에 봉해져 都督荊州諸軍事로 10년간 襄陽에 진주해 있었는데, 재임하는 동안 屯田을 실시하여 식량을 비축하면서 吳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지만, 평일에는 갑옷을 입지 않고 가벼운 갖옷에 허리띠를 느슨히 맨 차림으로 吳나라 장수 陸抗과 使臣을 교환하면서 우호를 유지하여, 江漢과 吳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일을 말한다.(≪晉書≫ 권34 〈羊祜列傳〉)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