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時에 荀崧이 都督荊州하여 屯宛하니 曾이 引兵圍之라
崧이 兵少食盡하여 欲求援於故吏襄城太守石覽하다 崧의 小女灌이 年十三이라
帥勇士數十人하고 踰城突圍하고 夜出하여 且戰且前하여 遂達覽所하고 又爲崧書하여 求救於周訪하다
訪이 遣子撫하여 帥兵하여 與覽共救崧하니 曾이 乃遁去하다
曾
이 復致牋於崧
하여 求自效
한대 崧
이 許之
注+通鑑 “求討丹水賊以自效.”하다
侃
이 遺崧書曰 杜曾
이 凶狡
하니 所謂䲭梟食母之物
이라 此人不死
면 州土未寧
이니 足下當識吾言
注+識, 音誌.하라
崧以兵少라하여 藉爲外援하여 不從이러니 曾이 復帥流亡二千餘人하여 圍襄陽이라가 不克而還하다
目
[目] 周勰은 자기 아버지의 유언이라 하여 吳 지방 사람들이 원망하는 틈을 타서 亂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吳興功曹인 徐馥으로 하여금 숙부인 周札의 命이라고 사칭하고 무리들을 거두어 모으게 하여 王導와 刁協을 토벌하려 하니, 豪傑들이 크게 따랐다.
이달에 서복이 吳興太守 袁琇(원수)를 죽이고 주찰을 받들어 君主로 삼고자 하였는데, 주찰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義興太守 孔侃에게 통고하였다.
주협은 주찰의 뜻이 자기와 같지 않음을 알고서 감히 亂을 일으키지 못하니, 서복의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서복을 공격하여 죽였다.
目
[目] 周莚이 길을 서둘러 하루에 이틀 길을 가서 郡府에 도착하여 막 들어가려 할 적에, 문에서 周續을 만나 협박하여 함께 孔侃에게 나아갔다.
자리에 앉은 뒤에 주연이 공간에게 이르기를 “府君께서는 어찌하여 역적을 이 자리에 두십니까.” 하니, 주속이 즉시 옷 속에서 칼을 꺼내어 주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주연이
郡의
傳敎에게 큰소리로 명령하여 주속을 쳐서 죽이게 하고, 이어서
周勰을 주살하려고 하였는데,
注+傳敎는 郡의 관리이니, 敎令을 선전하는 자이다.
周札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죄를 從兄인 周邵에게 전가하여 그를 주살하니, 주연은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문안도 하지 않고 마침내 먼 길을 떠나갔다.
司馬睿는 주찰을 吳興太守로 삼고 주연을 太子右衛率로 삼았으며, 周氏가 吳나라의 호걸이고 명망 있는 집안이므로 끝까지 죄를 다스리지 않고 주협을 예전과 같이 慰撫하였다.
目
[目] 漢主 劉聰이 中護軍인 靳準의 두 딸인 月光과 月華를 들여 월광을 세워 上皇后으로 삼고 劉貴妃를 左皇后, 월화를 右皇后로 삼았다.
陳元達이 지극히 諫하기를 “세 명의 后를 동시에 세우는 것은 禮가 아닙니다.” 하니, 유총이 좋아하지 않았다.
진원달이 또다시 월광에게 부정한 행실이 있다고 아뢰자, 유총이 부득이하여 그녀를 폐하였다. 월광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자살하니, 유총이 이 때문에 진원달을 원망하였다.
目
[目] 처음에 王如가 항복할 적에 王敦의 종제인 王稜이 왕여의 날래고 용맹함을 사랑하여 왕돈에게 청해서 자기의 휘하로 배속시키고 매우 총애하고 후대하였다.
왕여가 왕돈의 장수들과 활쏘기를 하면서 자주 싸우므로 왕릉이 곤장을 치니, 왕여가 이 일을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왕돈이 남몰래 晉나라에 대해 딴마음을 품자 왕릉이 매번 諫하니, 왕돈이 노하여 은밀히 사람을 시켜서 왕여를 격노하게 하여 왕릉을 죽이게 하였다. 왕돈이 이 일을 듣고 거짓으로 놀라는 체 하고는, 왕여도 체포하여 주살하였다.
目
[目] 이때에 荀崧(순숭)이 荊州都督으로 宛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杜曾이 병력을 이끌고 가서 그를 포위하였다.
순숭은 병력이 적고 식량이 다하여 옛 관리인 襄城太守 石覽에게 구원을 청하고자 하였다. 순숭의 작은 딸 荀灌은 이때 나이가 13세였는데,
수십 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성을 넘어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싸우면서 전진하여 마침내 석람의 처소에 도달하고, 또 순숭을 대신하여 편지를 써서 周訪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주방이 아들 周撫를 보내어 병력을 인솔하고 석람과 함께 순숭을 구원하게 하니, 두증이 마침내 도망하였다.
두증이 다시 순숭에게 편지를 보내어 직접
功을 세워 속죄할 것을 청하자, 순숭이 이를 허락하였다.
注+≪資治通鑑≫에는 “丹水賊을 토벌하여 功을 세워 속죄할 것을 청하였다.” 하였다.
陶侃이 순숭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두증은 흉악하고 교활하니, 이른바 제 어미를 잡아먹는 솔개와 올빼미 같은 자입니다. 이 사람이 죽지 않으면
荊州 지역이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足下는 마땅히 내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注+識(기억하다)는 音이 誌이다. 하였다.
그러나 순숭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두증의 힘을 빌려 외부의 원조로 삼으려 해서 도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두증은 다시 유민 2천여 명을 거느리고서 襄陽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目
[目] 王敦이 총애하는 사람 錢鳳이 陶侃의 功을 시기하여 여러 번 도간을 헐뜯었다. 도간이 왕돈에게 가서 직접 해명하자,
왕돈은
荊州로 보내지 않고
廣州刺史로 좌천시키고는, 자신의
從弟 王廙를
荊州刺史로 삼았다.
注+“左轉(좌천시키다)”은 左遷이라는 말과 같다.
형주의 將吏인 鄭攀 등이 왕돈에게 찾아가 도간의 유임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여러 사람들이 내심 원망하고 분개하여 마침내 杜曾과 第五猗를 맞이하여 왕이를 막았다.
왕돈은 정반 등이 도간의 뜻을 받들었다고 생각하여,
注+風(의지)은 본음대로 읽는다.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는 장차 도간을 죽이려 하였는데, 이때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서너 차례 하였다.
注+復(다시)는 扶又의 切이다. 王敦이 속으로 陶侃을 해치려고 하다
도간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使君은 영명하게 결단하여 응당 천하를 제재해야 하는데, 어찌 이처럼 결단하지 못합니까.” 하고는 바로 일어나서 측간에 갔다.
參軍 梅陶가 왕돈에게 말하기를 “
周訪은 도간과 친하고 또 인척관계여서 마치 왼손과 오른손처럼 가깝습니다.
注+周訪은 陶侃과 친구이고, 또 도간의 아들 陶瞻에게 딸을 시집보내었다. 남의 왼손을 잘랐는데, 오른손이 응하지 않는 경우가 어찌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돈의 마음이 풀려서 마침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도간을 전송하니, 도간이 곧바로 그날 밤에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