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有司請立太子한대 王이 愛次子宣城公裒하여 欲立之하여 謂王導曰 立子를 當以德이니라
導曰 世子, 宣城이 俱有朗雋之美어늘 而世子年長하니이다 王이 從之하여 立世子紹爲王太子하고
封裒爲琅邪王
하여 奉恭王後
하여 鎭廣陵
注+帝後大宗, 故以裒奉琅邪國祀.하고 以西陽王羕爲太保
注+羕, 汝南王亮之子也. 太康末, 封西陽縣公, 及楚王瑋誅, 進爵爲王, 元康初, 進封郡王. 羕, 音漾.하고 封譙王遜之子氶爲譙王
注+遜, 宣帝弟進之子也, 武帝初, 受封, 氶音拯.하다
王敦爲大將軍하고 王導爲揚州刺史, 領中書監, 錄尙書事하고
刁協爲僕射하고 周顗爲吏部尙書하고 賀循爲太常하다
時에 承喪亂之後하여 江東이 草創이러니 協은 久宦中朝하여 諳練舊事하고
循
은 爲世儒宗
하여 明習禮學
하니 凡有疑議
에 皆取決焉
注+諳, 烏含切, 悉也, 記也.이러라
目
初에 流民張平, 樊雅 各聚衆在譙하여 爲塢主어늘 王之爲丞相也에 遣行參軍桓宣하여 說而下之하다
及逖屯蘆洲에 使參軍殷乂로 詣平, 雅한대 乂意輕平하여
視其屋
하고 曰 可作馬廐
로다 見大鑊
하고 曰 可鑄鐵器
注+鼎無足曰鑊, 江‧淮人謂之鍋, 浙人謂之鑊.로다 平曰 此乃帝王鑊
이니 天下淸平
에 方用之
리라
乂曰 卿未能保其頭而愛鑊邪아하니 平이 大怒하여 於坐斬乂하고 勒兵固守하니
逖이 攻之歲餘에 不下라 乃誘其部將하여 使殺之로되 雅猶據譙城이어늘 逖이 攻之不克하다
目
曾
이 先攻左右甄
이어늘 訪
이 於陳後
에 射雉
하여 以安衆心
注+陳, 讀曰陣.하고
令其衆曰 一甄敗어든 鳴三鼓하고 兩甄敗어든 鳴六鼓하라
自旦至申
에 兩甄
이 皆敗
한대 訪
이 選精銳八百人
하여 自行酒飮之
注+飮, 於禁切.하여 勅不得妄動
하고 聞鼓音乃進
하다
曾兵이 未至三十步에 訪이 親鳴鼓하니 將士皆騰躍犇赴하여 曾이 遂大潰라
訪이 夜追之하니 諸將이 請待明日이어늘 訪曰 曾이 驍勇能戰하니 向者에 彼勞我逸故로 克之라
宜及其衰하여 乘之면 可滅也라하고 乃鼓行而進하여 遂定漢, 沔하다
曾
이 走保武當
하니 廙始得至荊州
注+武當縣, 漢屬南陽郡, 晉屬順陽郡, 縣以武當山得名.하다 訪
이 以功遷梁州刺史
하여 屯襄陽
하다
目
[目] 張寔이 司馬 韓璞 등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漢나라(前趙)를 공격할 적에, 相國인 司馬保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皇室에 위태로운 일이 있으므로 몸을 바쳐 충성할 것을 잊지 아니하여,
지난번에
賈騫을 보내서
公의 거동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중간에 내려보낸
符節을 받고서 가건에게 명하여 군대를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注+“符命”은 司馬保가 張寔에게 符節을 내린 것이다.
마침 조정이 이미 전복되었다는 말을 들어 충성할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몹시 비분강개하여 죽어도 남은 죄책이 있습니다.
이제 한박 등을 보내어 오직 公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한박 등은 끝내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目
[目] 有司가 太子를 세울 것을 청하자, 王은 둘째 아들인 宣城公 司馬裒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여 王導에게 이르기를 “태자를 세울 때에는 마땅히 德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하였다.
왕도가 말하기를 “세자와 선성공이 모두 총명하고 준걸스러운 美德이 있는데, 세자는 나이가 많습니다.” 하니, 王이 그의 말을 따라서 세자 司馬紹를 세워 왕태자로 삼고,
사마부를 봉하여
琅邪王으로 삼아서
의 뒤를 이어
廣陵에 진주하게 하였으며,
注+황제는 大宗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司馬裒로 琅邪國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다. 西陽王 司馬羕(사마양)을
太保로 삼고,
注+司馬羕은 汝南王 司馬亮의 아들이다. 太康 말년에 西陽縣公에 봉해졌었는데 楚王 司馬瑋가 주살을 당하자 작위가 높아져서 王이 되었으며, 元康 초기에 승진하여 郡王에 봉해졌다. 羕은 音이 漾이다. 譙王 司馬遜의 아들
司馬氶(사마증)을 봉하여
譙王으로 삼았다.
注+司馬遜은 晉 宣帝(司馬懿)의 아우인 司馬進의 아들로, 晉 武帝 초년에 封地를 받았다. 氶은 音이 拯이다.
또 王敦을 大將軍으로 삼고, 王導를 揚州刺史 領中書監 錄尙書事로 삼고,
刁協을 僕射로 삼고, 周顗를 吏部尙書로 삼고, 賀循을 太常으로 삼았다.
이때 군주가 죽고 나라가 혼란한 뒤를 이어 江東 지역에서 처음으로 政權이 세워졌는데, 조협은 오랫동안 중원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조정의 옛일을 잘 알았고,
하순은 대대로 이어온
儒學의
宗主로서
禮學을 밝게 익혔으니, 의심스러운 의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이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注+諳은 烏含의 切이니, 앎이고 기억함이다.
目
[
目]
相國 劉粲이 자기
黨을 시켜
劉义에게 이르기를 “마침 궁중의 조령을 받았는데, ‘
京師가 장차 변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마땅히
衷甲(옷 안에 갑옷을 입는 것)을 하고 대비하여야 한다.”
注+옷 안에 갑옷을 입는 것을 衷甲이라 한다. 하였다.
유차가 이 말을 믿고 동궁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모두 충갑을 하게 하였다. 유찬이 사람을 보내어 靳準과 王沈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근준이 漢主 劉聰에게 아뢰기를 “太弟가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하여 이미 충갑을 했습니다.” 하였다.
유총이 이에 동궁의 관속들을 주살하고 동궁의 사졸 1만 5천여 명을 산 채로 묻어 죽이고,
注+산 채로 묻어 죽인 자들은 東宮 四衛의 병사들이다. 유차를 폐하여
北部王으로 삼았는데, 얼마 후 유찬이 근준을 시켜 그를 죽이게 하였다.
注+北部는 바로 匈奴의 後部이니, 新興에 있었다.
유차는 모습과 정신이 수려하고 명랑하고 너그럽고 인자하며 도량이 있어서, 선비들 중에 내심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유총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피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오직 두 사람이 남았는데도 내 그를 포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目
[目] 처음에 유민인 張平과 樊雅가 譙城에서 각자 병력을 모아 塢主(성채의 주인)가 되었는데, 晉王(司馬睿)이 丞相으로 있을 적에 行參軍인 桓宣을 보내어서 장평과 번아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祖逖이 蘆洲에 주둔하자, 參軍인 殷乂로 하여금 장평과 번아를 찾아가게 하였다. 은예는 마음속으로 장평을 무시하여,
그의 집을 보고는 “마구간으로 쓰면 좋겠다.”라고 하고, 큰 솥을 보고는 “철물을 주조하면 되겠다.”
注+발이 없는 솥을 鑊이라 한다. 江‧淮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鍋라 하고, 浙江 사람들은 이것을 鑊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장평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제왕의 가마솥이니, 천하가 깨끗이 평정된 뒤에 비로소 쓰겠다.” 하였다.
은예가 말하기를 “卿은 자기 머리도 보존하지 못하면서 이 가마솥을 아끼는가.” 하니, 장평이 크게 노하여 앉은 자리에서 은예를 참수하고 군대를 무장하여 굳게 지켰다.
조적이 1년이 넘게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여, 마침내 部將을 유인하여 장평을 죽이게 하였다. 그러나 번아가 여전히 譙城을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조적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目
[目] 祖逖이 譙城으로 들어가자 石勒이 石虎를 보내어 초성을 포위하였는데, 王含이 또다시 桓宣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니, 석호가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조적은 표문을 올려 환선을 譙國內史로 삼았다.
晉王이 천하에 격문을 돌려서 말하기를 “석호가 감히 개와 양 같은 오랑캐들을 거느리고서 黃河를 건너와 멋대로 해독을 끼치니,
이제 琅邪王 司馬裒 등을 보내어 수로와 육로 네 길로 출동하여 곧바로 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하노니, 조적의 지휘를 받으라.” 하였다. 얼마 후 다시 사마부를 불러 建康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몇 달 만에 卒하였다.
目
[目] 鄭攀 등이 함께 王廙를 막을 적에, 사람들의 마음이 통일되지 못하였다. 정반이 두려워하여 왕이에게 항복을 청하고, 杜曾 또한 第五猗를 공격하여 스스로 속죄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가
荊州로 부임하려 할 적에
長史를 남겨두어
揚口의 보루를
鎭守하게 하니,
注+≪水經註≫에 “龍陂水는 郢城을 지나 동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揚水라 한다. 이 물이 북쪽으로 竟陵縣의 서쪽을 지나서 또 북쪽으로 沔水에 주입되는데, 이곳을 ‘揚口’라 하니 中夏口이다.” 하였다.
竟陵內史 朱伺가 왕이에게 이르기를 “두증은 교활한 적입니다. 겉으로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니, 우리는 마땅히 부대를 크게 만들어 대비해야지 곧바로 서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注+分(부대)은 扶問의 切이니, 〈“宜大部分”은〉 마땅히 부대를 크게 만들어서 杜曾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왕이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여, 주사를 늙어서 겁이 많다 하고는 마침내 그대로 출동하였다. 두증 등이 과연 돌아와 揚口를 공격해서 함락시키고는 승세를 타고 곧바로 沔口에 이르렀다.
晉王(司馬睿)이 豫章太守 周訪으로 하여금 두증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주방은 8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바,
沌陽까지 진군하여
注+沌은 音이 篆이다. 沈約이 말하기를 “沌陽縣은 江東에서 세웠으니 江夏郡에 속하였다.” 하였고, ≪水經註≫에 “沔水가 沌陽縣 북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林障의 옛 城 북쪽을 지나간다.” 하였다. 沌陽은 沌水의 북쪽이다. 將軍 李恒으로 하여금
左甄을 감독하게 하고
許朝로 하여금
右甄을 감독하게 하고 자신은
中軍을 거느렸다.
注+甄은 音이 堅으로 군대의 칭호이니, 晉나라 사람은 左翼과 右翼을 左甄과 右甄이라 하였다.
目
[
目]
杜曾이 먼저
左甄과
右甄을 공격하자,
周訪이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자〉 진영의 뒤에서 화살로 꿩을 쏘아 잡아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注+陳(진영)은 陣으로 읽는다.
병사들에게 명령하기를 “좌견과 우견 중 한쪽이 패하면 3번 북을 울리고, 좌우 양쪽이 모두 패하면 6번 북을 울려라.” 하였다.
아침부터
申時(오후 3~5시)에 이르기까지 좌견과 우견이 모두 패하자, 주방은 정예 기병 8백 명을 선발하여 직접 술을 따라주어 마시게 하고서,
注+飮(마시게 하다)은 於禁의 切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북소리를 들은 뒤에 전진할 것을 명하였다.
두증의 군대와의 거리가 30보가 되기 전에 주방이 직접 북을 울리니, 장병들이 모두 뛰쳐나가 싸워서 마침내 두증의 군대가 크게 궤멸되었다.
주방이 밤중에 두증의 군대를 추격하니, 여러 장군들이 날이 밝기를 기다려 추격할 것을 청하였다. 주방이 말하기를 “두증은 날래고 용맹하여 전투에 능하다. 지난번에 저들은 피로하고 우리는 편안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마땅히 그의 기력이 쇠했을 때를 틈타 추격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멸망시킬 수 있다.” 하고는, 북을 치고 행군하여 전진해서 마침내 漢水와 沔水 지역을 평정하였다.
두증이 달아나
武當을 지키니,
王廙가 그제야 비로소
荊州에 부임할 수 있었다.
注+武當縣은 漢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順陽郡에 속하였으니, 무당현은 武當山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주방은 이
功으로
梁州刺史로 승진하여
襄陽에 주둔하였다.
目
[目] 漢主 劉聰이 나가 사냥할 적에, 愍帝가 車騎將軍을 대행하여 군복을 입고 창을 잡고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이 모습을 보는 자들이 민제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분은 옛 長安의 天子이다.” 하였고, 노인 중에는 눈물을 떨구는 자도 있었다.
太子 劉粲이 유총에게 말하기를 “옛날 周나라 武王이 어찌 殷나라 紂王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였겠습니까. 바로 惡을 함께하는 자들이 서로 구하여 후환이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속히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유총이 말하기를 “예전에 庾珉 등을 죽였는데도 민심이 아직도 이와 같으니, 내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 우선 다소 관망하라.” 하였다.
目
[目] 12월에 劉聰이 신하들에게 연향을 베풀 적에 황제로 하여금 술을 따르고 술잔을 씻게 하고는 잠시 후 또 日傘을 잡게 하니, 晉나라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고 흐느껴 우는 자도 있었다.
尙書郞 辛賓이 일어나 황제를 안고 크게 통곡하자, 유총이 그를 참수하였다.
洛陽守將 趙固와 河內太守 郭黙이 漢나라(前趙)의 河東 지역을 침공하고 크게 말하기를 “마땅히 劉粲을 산 채로 포박하여 天子와 맞교환하겠다.” 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살해당하니, 시호를 孝愍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