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目] 曹志가 탄식하기를 “어찌 이와 같은 재주와 이와 같은 친함이 있으면서 근본을 세우고 교화를 돕지 못하고 멀리 바다 귀퉁이로 나간단 말인가. 晉나라의 융성함이 이제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奏議하였다. “옛날 왕실을 좌우에서 보필한 분으로
同姓인 경우에는
周公이 있고
異姓인 경우에는
太公이 있었는데, 모두 자신이 조정에 거주하여 5대가 지나도록
反葬하였습니다.
注+≪禮記≫ 〈檀弓〉에 말하기를 “太公이 齊나라의 營丘에 봉해졌었는데, 5대에 이르도록 모두 周나라로 反葬했다.” 하였다. 陳澔가 말하기를 “태공이 비록 齊나라에 봉해졌으나 周나라에 남아 太師가 되었으므로 죽어서 마침내 周나라에 장례하였다. 자손들이 감히 그 근본을 잊을 수가 없으므로 또한 齊나라에서 周나라로 反葬하여 先塋을 따르다가 5대가 지나 親이 다한 뒤에야 그친 것이다.” 하였다.
周나라가 쇠하게 되자 비록
五霸가 번갈아 일어났으나, 어찌
周公,
召公의 정치와 똑같이 논할 수 있겠습니까.
注+〈“雖有五霸代興……而論哉”는〉 五霸가 번갈아 일어나서 周나라 왕실을 높였으나 周公, 召公이 좌우에서 보필한 정치와 똑같이 논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伏羲氏 이래로 어찌 한
姓氏가 홀로 천하를 소유했겠습니까.
마땅히 지극히 공평한 마음을 미루어서 천하와 利害를 함께하여야 비로소 국가를 장구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秦나라와 魏나라의 경우 황제가 〈대권을 독점하여〉 자신이 죽을 때까지만 나라를 보유하였고, 周나라와 漢나라는 〈천하와 이익을 함께하여〉 친한 자와 소원한 자가 모두 쓰임이 되어 제 역할을 하였으니, 이것은 지난 일 중에 분명한 증거입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마땅히 博士 등이 논의한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황제가 크게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조지가 아직도 내 마음을 밝게 알지 못하니, 하물며
四海의
人心이겠는가.
注+曹志는 본래 魏나라 陳思王 曹植의 아들이고, 조식이 魏 文帝와 형제간이었는데, 문제가 조식을 禁하고 制裁한 것이 어떠하였기에 아직도 내 마음을 밝게 알지 못하는가 한 것이다.
또 박사는 내가 물은 바에 답하지 않고 묻지 않은 것에 답하여 멋대로
異論을 만들어내는구나.”
注+물은 것은 齊王에게 禮物을 높이 하사하는 것뿐이었고, 제왕을 마땅히 내보내야 하는가의 여부를 묻지 않은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조지의 관직을 파면하고 나머지를 모두
廷尉에 회부하였다.
目
[
目]
司馬攸가 분하고 원통해하여 병이 났다. 그래서
先后의
陵을 지킬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고,
注+先后는 文明皇后를 이른다. 御醫가 가서 진찰할 적에 임금의 뜻에 맞추어 모두 병이 없다고 말하였다.
注+診은 止忍의 切이니, 안후를 살피고 진맥하는 것이다.
河南尹 向雄(상웅)이 간하기를 “폐하의 子弟가 비록 많으나 덕망이 있는 자는 적습니다. 齊王이 서울에 거처하면 유익한 바가 실로 크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상웅은 분하고 원통해하며 卒하였다. 사마유의 병이 더욱 위독하였으나 오히려 封國으로 출발할 것을 재촉하니, 사마유가 피를 토하고 薨하였다.
황제가 가서 喪에 곡하자 아들인 司馬冏(사마경)이 울부짖고 발을 구르며 하소연하니, 詔令을 내려서 즉시 어의를 誅殺하게 하였다.
目
[目] 처음에 황제는 司馬攸를 매우 돈독히 사랑하였는데, 荀勗과 馮紞에게 모함을 받아 황제가 자신이 죽은 이후에 문제가 될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를 내보내려고 하였다.
그가 薨하자 황제가 끊임없이 애통해하였는데, 풍담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말하기를 “齊王은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쳐서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 돌아갔는데 지금 스스로 薨하였으니, 이는 사직의 복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지나치게 슬퍼하십니까.” 하니,
황제는 눈물을 거두고 슬픔을 그쳤다. 사마유는 행동거지를 예법에 맞게 하여 잘못하는 일이 적으니, 황제가 그를 경외해서 引見하여 함께 거처할 때마다 반드시 말을 가린 뒤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