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僖九年
이라 初
에 獻公使荀息傅奚齊
하다 公疾
에 召之曰
하니 其若之何
오
稽首而對曰 臣竭其股肱之力하고 加之以忠貞이어니와 其濟는 君之靈也요 不濟면 則以死繼之하리이다
及里克將殺奚齊
에 先告荀息曰
하고 하니 子將如何
오 荀息曰 將死之
하리라
里克曰 無益也라 荀叔曰 吾與先君言矣니 不可以貳라 冬十月에 里克殺奚齊于次하다
荀息將死之
한대 人曰 不如立卓子而輔之
니라 荀息立公子卓
하다 十一月
에 하니 荀息死之
하다
傳
[左傳]僖九年
이라 晉
使夷吾賂秦以求入
會秦師納晉惠公
하다
傳
[左傳]僖十年
이라 夏四月
에 會齊隰朋立晉侯
하다 하다
將殺里克할새 公使謂之曰 微子면 則不及此라 雖然이나 子弑二君與一大夫하니 爲子君者 不亦難乎아
對曰 不有廢也
면 君何以興
이릿가 잇가 臣聞命矣
라하고 伏劍而死
하다
㔻鄭如秦
에 言於秦伯曰
시면 臣出晉君
하리니 君納重耳
가 蔑不濟矣
리이다
冬
에 秦伯使
報問
하고 且召三子
하다 郤芮曰 幣重而言甘
하니 誘我也
라하고 遂殺㔻鄭
及
라
奔秦
하야 言於秦伯曰
하니 民弗與也
니이다 伐之
면 必出
하리이다
傳
[左傳]僖十三年
이라 冬
에 하야 使乞糴于秦
하다 秦伯謂子桑
호되 與諸乎
아
謂
호되 與諸乎
아 對曰
요 救災恤
은 道也
니 行道
면 有福
이리이다
㔻鄭之子豹在秦
이러니 한대 秦伯曰 其君是惡
어니와 其民何罪
오 秦於是乎輸粟于晉
하야
傳
[左傳]僖十四年이라 冬에 秦饑하야 使乞糴于晉한대 晉人弗與하다
曰 背施無親
이요 이요 怒隣不義
니 四德皆失
이면 何以守國
이릿가
리오 慶鄭曰
릿가 無信患作
하고 失援必斃
니 是則然矣
니이다
傳
[左傳]僖十五年이라 晉侯之入也에 許賂秦伯以河外列城五호되 旣而不與하고 晉饑에 秦輸之粟이로되 秦饑에 晉閉之糴하다
故秦伯伐晉하다 九月에 晉侯逆秦師하고 壬戌에 戰于韓原할새 秦獲晉侯以歸하다
正始者는 萬事之本也라 始其始而不終其始者는 蓋有之矣어니와 不始其始而能終其始者는 理之所必無也라
吾未聞種稗而得穀者也요 吾未聞植棘而得檟者也요 吾未聞造醯而得醪者也요 吾未聞網魚而得禽者也요
吾未聞學墨而得儒者也요 吾未聞圖伯而得王者也니 失其始而求其終은 理之所必無也라
自古及今히 失於始而蹈禍釁者가 豈惟一人耶아 荀息은 受獻公不正之託이라가 國危身死하야 死無所名하니 失之於始也요
秦穆公은 不置德而置服이라가 親被晉惠反噬之辱하니 失之於始也며
晉惠公
은 攬一國之利
하야 不見輕諾之害
하고 竟
內外之賂
라가 自取囚縶
하니 失之於始也
라
失之於始면 良平不能爲之謀요 儀秦不能爲之辨이요 孫吳不能爲之戰이요 墨翟田單不能爲之守니 百補千營이라도 終亦必敗而已矣리라
雖然이나 是說也는 爲始謀者言之可也어니와 不幸而已失其始者는 雖聞吾言이라도 不過拊膺搏髀하야 爲無益之悔리니
果何術而救之乎아 曰 見其無始而絶之者는 君子之正也요 見其無始尙欲扶持之者는 君子之恕也라
父母之於子에 雖其始不遵敎戒하야 已在憲網하고 已在縲紲이라도 自非甚不可救인댄 父母之心에 豈遽已乎아
經度赴援하야 使得末減其罪하야 降重爲輕이 亦父母之所屑爲也라
君子視天下가 猶父母之視子也니 雖見其已失於始라도 苟未至於勢窮理絶이면 亦豈惜一擧手之力乎아
荀息은 以孤身으로 而當衆怨之衝하니 其禍大而不可救요 秦穆公은 雖受侮라도 而終能取償於晉하니 其禍小而不必救라
惟晉惠公之事는 在二者之間하니 猶君子之所當論也라 惠公은 始以甘言重賂誘秦하고
旣得國而盡食其言하니 秦穆公之心에 未嘗一日忘晉也라
至晉饑而秦輸之粟하니 非憂晉也라 積我之厚하고 形彼之薄하야 所以怒其衆而將使之也라
斯怨也 豈禱請所可謝며 言語所可回乎리오 幸而秦饑乞糴於晉하니 此天錫晉以釋怨之資也라
使君子爲晉謀인댄 必曰 吾久負秦約하야 常患無以自解하니
苟因其乞糴하야 亟如其請而振其急이면 則秦將見今日之恩하고 而忘前日之怨이리라
政使怨不盡解
라도 亦可以殺其怒而緩其毒
이리니 雖鋒刃相向
이라도 其致
於我必不力矣
리라
彼虢射乃謂無損於怨이요 而厚於寇라하니 吁라 是何言歟아
虢
徒知與粟之無損於怨
이요 不知閉糴之增其怨也
라 擇禍莫若輕
이요 擇怨亦莫若輕
이니
雖使果如虢公之言하야 無損於怨이라도 亦猶愈於增其怨이온 況與之粟 乃所以損其怨乎아
慶鄭 雖欲救之나 然其氣暴하고 其辭悍하야 適所以起晉惠之怒而已로다
惜乎라 慶鄭有救之之心이나 而未得救之之道也여 使君子爲晉謀면 則失之於始런들 豈不可收之於終乎아
吾嘗攷論秦晉交爭之際하고 益知天下之理는 不可有毫髮之過焉이라
晉之負秦하니 理當怨也며 秦之伐晉하니 理當報也라 韓原之戰에 忿晉惠者가 豈特秦人哉아
雖晉之衆
도 亦忿然有不直其君之心矣
라 逮至秦穆執晉侯而歸
하야 囚之靈臺
는 則是奪蹊田之牛
注+奪蹊田之牛:니 報之亦已甚矣
라
惟其報之稍過於理일새 於是에 晉人反哀其君之窮하고 而怨秦之酷하야 移不直其君之心하야 爲不直秦之心이라
奮怒踊躍하야 征繕以輔孺子하야 有不與秦俱生之意하니라
嗚呼라 天下之理가 果可有毫髮之過耶아 千鈞之重도 加銖兩而移니 信矣哉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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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公 9년, 당초에 獻公은 荀息을 奚齊의 師傅로 삼았다. 獻公이 병이 중해지자 荀息을 불러 말하였다. “이 어린 孤兒를 삼가 大夫에게 맡기니 大夫는 장차 어떻게 輔佐하겠는가?”
荀息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신은 全身의 힘을 다하고 거기에다가 忠貞을 더하겠습니다만 일이 성공하는 것은 하늘에 계시는 英靈의 도움이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뒤따라 죽겠습니다.”
里克이 奚齊를 죽이려 할 때에 미쳐 먼저 荀息에게 고하였다. “원한을 품은 세 公子의 무리가 난리를 일으키려 하고 秦나라와 晉나라가 저들을 도우려 하니, 그대는 장차 어찌할 생각이시오?” 荀息이 대답하였다. “나는 장차 그를 위해 죽을 것이오.”
里克이 말하였다. “〈죽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소.” 荀息이 말하였다. “나는 先君과 약속하였으니,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소.” 겨울 10월에 里克이 喪次에서 奚齊를 죽였다.
荀息이 그를 위해 죽으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公子 卓을 세우고서 그를 輔佐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荀息은 公子 卓을 임금으로 세웠다. 11월에 里克이 朝廷에서 公子 卓을 죽이니 荀息도 그를 위해 죽었다.
이에 대해 君子는 다음과 같이 評論하였다. “≪詩經≫에 이른바 ‘흰 玉의 티는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지만 이 말의 티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荀息이 이와 같은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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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公 9년, 晉나라 郤芮가 夷吾에게 秦나라에 뇌물을 주고서 歸國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게 하였다. 齊나라 隰朋이 군대를 거느리고 秦軍과 연합하여 晉 惠公을 晉나라로 들여보내기로 하였다.
秦伯이 郤芮에게 “公子는 누구를 믿는가?”라고 묻자, 郤芮가 대답하였다. “臣이 듣기로는 亡人은 黨이 없으니 黨이 있으면 반드시 원수가 있을 것입니다.
夷吾는 어릴 때에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고 싸움을 잘했지만 지나치지 않았으며, 長成한 뒤에도 그 습관을 고치지 않았다는 것만 알 뿐, 그 밖의 것은 모릅니다.”
秦 穆公이 公孫枝에게 “夷吾가 晉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자, 公孫枝가 대답하였다. “臣이 듣건대 오직 法則만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詩에 ‘사사로운 知識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늘의 法則만을 따른다.’고 하였고,
또 詩에 ‘남을 不信[僭]하지 않고 해치지[賊] 않으면 본보기가 되지 않는 것이 드물다.’고 하였으니, 이는 사사로이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으며 의심을 품지도 않고 이기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夷吾의 말에는 의심과 이기려는 뜻이 많으니, 〈나라를 안정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穆公이 말하였다. “남을 의심하면 원수가 많이 생기는 것인데 또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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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公 10년, 여름 4월에 周公 忌父‧王子 黨이 齊나라 隰朋에서 會合하여 惠公을 晉侯로 세웠다. 晉侯는 里克을 죽여 說明하였다.
晉侯가 里克을 죽이려고 할 때에 使者를 보내어 里克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두 임금과 한 大夫를 죽였으니 그대의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里克이 대답하였다. “〈奚齊와 卓子를〉 廢黜하지 않았다면 임금님께서 어찌 일어설 수 있었겠습니까. 臣에게 罪를 씌우고자 하신다면 어찌 핑계 댈 말이 없겠습니까? 신은 명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고서 칼에 엎어져 죽었다.
이때 㔻鄭은 聘問使로 秦나라에 가 있었고, 또 뇌물이 늦어진 것에 대해 謝過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禍가 미치지 않은 것이다.
㔻鄭이 秦나라에 갔을 적에 秦伯에게 말하였다. “呂甥‧郤稱‧冀芮가 실로 따르지 않으니, 만약 저들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秦나라로 부르신다면 臣이 晉君을 逐出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君께서 重耳를 晉나라로 들여보내신다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겨울에 秦伯이 大夫 泠至를 晉나라로 보내어 答聘하게 하고, 또 세 사람을 秦나라로 초청하였다. 郤稱과 冀芮가 “幣帛은 많고 말은 달콤하니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다.”라 하고서 드디어 㔻鄭‧祈擧 및 七輿大夫를 죽였다.
㔻豹가 秦나라로 도망가서 秦伯에게 말하였다. “晉侯가 大主를 배반하고 작은 원한을 꺼리니 백성들이 돕지 않습니다. 그를 치신다면 반드시 逐出할 것입니다.”
秦 穆公이 말하였다. “그가 백성들의 마음을 잃었다면 어찌 저들을 죽일 수 있었겠으며, 그대가 禍를 피해 도망해 왔으니 누가 임금을 축출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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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公 13년, 겨울에 晉나라에 거듭 凶年이 들어 秦나라에 使臣을 보내어 糧穀購買를 요청하였다. 秦伯이 子桑에게 “주어야 하는가?” 하고 묻자,
子桑이 대답하였다. “거듭 은혜를 베풀었다가 보답을 받는다면 임금께서는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거듭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보답하지 않는다면 晉나라 백성의 마음이 반드시 惠公에게서 떠날 것이니, 백성의 마음이 떠난 뒤에 토벌하면 그를 돕는 무리가 없어서 반드시 敗亡할 것입니다.”
〈秦伯이〉 百里에게 “주어야겠는가?”하고 묻자, 百里가 대답하였다. “天災가 유행하는 것은 나라마다 번갈아 있는 일이고, 災難을 구제하고 이웃 나라를 구휼하는 것이 도리이니, 도리를 행하면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㔻鄭의 아들 豹가 秦나라에 있었는데, 晉나라를 討伐하기를 청하자 秦伯은 “그 임금은 밉지만 그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느냐.” 하고서 秦나라는 이에 晉나라로 곡식을 수송하였는데,
〈수송하는 行列이〉 雍에서 絳에까지 이어졌다. 이를 일러 ‘泛舟之役’이라고 命名하였다.
傳
僖公 14년, 겨울에 秦나라에 饑饉이 들어 晉나라에 使臣을 보내어 糧穀購買를 요청하니 晉人은 들어주지 않았다.
慶鄭이 말하였다. “은혜를 저버리는 것은 無親이고, 남의 災難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不仁이고, 탐욕스럽게 아끼는 것은 不祥이고, 이웃 나라를 노하게 하는 것은 不義이니, 이 네 德을 모두 잃는다면 무엇으로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虢射이 말하였다. “가죽이 남아 있지 않는데 털이 장차 어디에 붙겠습니까?” 慶鄭이 말하였다. “信義를 저버리고 이웃 나라를 배반한다면 우리에게 患難이 생겼을 때 누가 救援해주겠습니까. 신의가 없으면 환란이 생기고 應援하는 나라를 잃으면 敗亡하는 것은 必然의 이치입니다.”
虢射이 말하였다. “원한은 줄이지 못하고 敵에게 힘만 보태줄 뿐이니, 주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慶鄭이 말하였다. “은혜를 저버리고 남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면 백성의 버림을 받습니다.
친근한 사람도 오히려 원수로 여길 것인데 하물며 원한을 품은 적이겠습니까.” 惠公은 듣지 않았다. 慶鄭이 물러나와 말하였다. “임금은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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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公 15년, 〈희공 9년에〉 晉侯가 晉나라로 들어갈 때 秦伯에게 河外의 다섯 城을 賂物로 주겠다고 허락해놓고는 〈들어와 임금이 된〉 뒤에는 주지 않았으며, 〈희공 13년에〉 晉나라에 饑饉이 들었을 때 秦나라는 糧穀을 보내주었는데, 〈희공 14년에〉 秦나라에 기근이 들자 晉나라는 양곡 보내는 것을 막았다.
그러므로 秦伯이 晉나라를 討伐한 것이다. 9월에 晉侯가 秦軍을 맞아 싸우고, 壬戌日에 兩軍이 韓原에서 交戰할 때 秦伯이 晉侯를 잡아 데리고 돌아갔다.
시작을 바르게 함은 萬事의 근본이다. 시작이 바르면서 그 시작을 잘 마치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시작이 바르지 않으면서 그 시작을 잘 마칠 수 있는 경우는 이치로 보아 절대로 없다.
피를 심고서 곡식을 수확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고, 가시나무를 심고서 오동나무를 얻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으며, 식초를 만들고서 막걸리를 얻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고, 물고기를 그물질하고서 새를 잡았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으며,
墨子를 배우고서 儒者가 되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고, 霸者를 도모하면서 王者가 되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시작이 바르지 않으면서 잘 마치기를 구하는 것은 이치로 보아 절대로 없는 일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시작을 잘못하여 화란에 빠진 자가 어찌 한 사람뿐이겠는가? 荀息은 晉 獻公의 바르지 못한 부탁을 받아들였다가 나라는 위태로워지고 자신은 죽임을 당하였으며 죽은 뒤에 명예마저 없었으니 이는 시작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秦 穆公은 유덕자를 〈晉나라의 임금으로〉 세우지 않고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를 세웠다가 몸소 晉 惠公이 배반하는 치욕을 받았으니 이는 시작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晉 惠公은 一國의 권력을 쥐고서 가벼이 승낙하는 화를 살피지 않고 끝내 국내와 국외에 뇌물을 주기로 한 약속을 저버렸다가 구금되는 화를 자초하였으니 이는 시작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시작을 잘못하면
張良과
陳平도 그를 위해 꾀를 낼 수 없고,
張儀와
蘇秦도 그를 위해 변론할 수 없으며,
孫子와
吳子도 그를 위해 전투할 수 없고,
墨翟과
田單도 그를 위해 지키지 못할 것이니, 온갖 방법을 다해 보조하고 경영하여도 마침내 반드시 실패하고야 말 것이다.
張良
비록 그러나 이런 말은 시작을 바르게 하려고 꾀하는 자를 위해서는 말해줄 수 있으나, 불행히도 이미 그 시작을 잘못한 자는 비록 내 말을 듣더라도 가슴을 두드리고 무릎을 치며 쓸데없는 후회를 하는 데 불과할 뿐이니,
과연 무슨 방법으로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시작이 바르지 못함을 보고서 絶交하는 것은 ‘君子의 엄정함’이고, 시작이 바르지 못함을 보고서 여전히 도와주고자 하는 것은 ‘君子의 너그러움’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비록 처음에는 〈자식이〉 가르침과 경계를 준수하지 아니하여, 이미 法網에 걸리고 이미 감옥에 갇혔더라도 자기가 아주 구제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의 마음에 어찌 당장 구제하기를 포기하겠는가?
계획을 세우고서 달려가 구원하여, 그 죄를 경감시켜 重罪를 輕罪로 낮추게 하는 것이 또한 부모된 이들이 기꺼이 하는 바이다.
君子가 천하 사람들을 보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보는 것과 같으니, 비록 이미 시작을 잘못한 것을 보았어도 진실로 형세가 곤궁하고 도리가 절망에 이르지 않았으면 또한 어찌 팔을 한 번 드는 힘을 아끼겠는가?”
荀息은 한 사람의 몸으로 여러 怨人들의 공격을 당했으니 그 화가 커서 구원할 수 없었고, 秦 穆公은 비록 모욕을 받았으나 마침내 晉나라에서 보상을 받았으니 그 화가 작아서 구원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晉 惠公의 일만은 이 두 일의 중간에 해당하니 오히려 君子가 마땅히 의론해야 할 바이다. 惠公은 처음에 달콤한 말과 많은 뇌물로 秦나라를 유혹하고,
나라를 얻은 뒤에는 그 약속을 다 저버렸으니, 秦 穆公의 마음은 하루도 晉나라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晉나라가 饑饉이 들자 秦나라는 곡식을 보내주었으니 이는 晉나라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후덕함을 쌓고 저들의 야박함을 드러내어 민중을 분노케 해서 장차 그 민중을 전쟁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원한을 어찌 禱請으로 사과할 수 있는 것이며, 言語로써 되돌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행히 秦나라에 기근이 들어 晉나라에 곡식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晉나라에게 〈秦나라의〉 원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니 가령 군자가 晉나라를 위하여 計謀를 냈다면 반드시 아래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秦나라와의 약속을 저버려 항상 스스로 그 잘못을 해명할 길이 없음을 근심하였으니,
만일 秦나라가 곡식을 요청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서둘러 그들이 요청하는 대로 위급함을 진휼해준다면 秦나라는 아마도 오늘의 은혜를 보고 지난날의 원한을 잊을 것이다.
가령 원한을 다 풀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분노를 줄이고 毒氣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니, 비록 전쟁이 일어나서 서로 칼끝을 겨누게 되더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죽을힘을 다해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 虢射은 도리어 “怨恨은 줄이지 못하고 敵에게 힘만 보태줄 뿐이다.”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虢公(虢射)은 한갓 곡식을 주는 것이 원한을 줄일 수 없다는 것만 알고 곡식운송을 금지하는 것이 秦나라의 원한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모른 것이다. 재앙을 골라야 한다면 가벼운 것을 고르는 것이 최선이고, 원한을 골라야 한다면 이 또한 가벼운 것을 고르는 것이 최선이다.
가령 虢公의 말처럼 원한은 줄일 수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원한을 증가시키는 것보다 나은데, 하물며 곡식을 보내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원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임에랴!
慶鄭은 비록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기세가 갑작스럽고 말투가 사나워 다만 晉 惠公의 분노를 일으켰을 뿐이다.
애석하다. 慶鄭이 秦나라를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秦나라를 구원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음이여! 가령 君子가 晉나라를 위해 도모했다면 시작할 때의 잘못을 어찌 終局에 수습할 수 없었겠는가.
내가 일찍이 秦나라와 晉나라가 交戰한 상황을 상고하여 추론해보고서, 천하의 이치는 털끝만큼이라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晉나라가 秦나라를 배반했으니 이치상 원한을 갖는 것이 당연하며, 秦나라가 晉나라를 침벌했으니 이치상 보복하는 것이 당연하다. 韓原의 전쟁에서 晉 惠公에게 분노한 자가 어찌 秦人뿐이었겠는가.
비록
晉나라의 민중도 분노하여 자기들의 임금을 바르게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
秦 穆公이
晉侯를 사로잡아 귀국하여
靈臺에 감금한 것으로 말하면 이는 소를 끌고 남의 농지를 밟고 지나갔다 하여 그 소를 빼앗는 꼴이니, 보복이 또한 너무 심하다.
注+≪春秋左氏傳≫ 宣公 11년에 보인다.
秦 穆公의 보복이 도리에서 약간 지나쳤기 때문에 이에 晉人이 도리어 자기 임금의 곤궁을 가여워하고 秦나라의 가혹함을 원망하여, 자기 임금을 바르게 여기지 않는 마음을 옮겨 秦나라를 바르게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
이에 분노하고 떨쳐 일어나 부세를 징수하고 군기를 정비하여 孺子(太子 圉)를 도와 秦나라와 공존하지 않으려는 뜻을 가졌다.
아! 천하의 이치가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지나침이 있었던가? 千鈞의 무게도 1銖나 1兩이 더해지면 저울눈이 옮겨간다. 〈그런데 이치는 상황이 변하여도 털끝만큼도 옮김이 없으니, 이치란 참으로〉 진실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