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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 晉重耳奔狄止降服而囚
13-05-01 晉重耳奔狄止降服而囚
[左傳]僖二十三年이라 하니 蒲城人欲戰한대
重耳不可曰 하고 이어늘 이라 吾其奔也하리라하고 遂奔狄하다
從者 狐偃趙衰顚頡魏武子러라 狄人伐하야 獲其二女叔隗季隗하야 納諸公子하니
公子取季?하야 生伯?叔劉하고 以叔?妻趙衰하야하다
將適齊할새 謂季隗曰 待我二十五年하야 不來而後嫁하라 對曰 我二十五年矣 이리라
過衛할새 衛文公不禮焉하니 하야 乞食於野人하다
하니 公子怒하야 欲鞭之한대 라하니 稽首受而載之하다
及齊하야 齊桓公妻之하니 하다 從者以爲不可라하야 러니
이라가 하고 而謂公子曰 子有四方之志어늘 其聞之者 吾殺之矣니이다
公子曰 無之로라 하소서 이니이다 公子不可라한대 하다
及曹하니 曹共公聞其하고 欲觀其裸하야 하다
之妻 曰 吾觀晉公子之從者컨대 皆足以相國이니 若以相이면 必反其國이요
反其國이면 必得志於諸侯하고 得志於諸侯하야 而誅無禮 曹其首也리니
及宋하니 宋襄公贈之以馬二十乘하니이다 及鄭하니 鄭文公亦不禮하다
及楚하니 楚子享之曰 公子若反晉國이면 則何以報
對曰 玉帛 則君有之하고 羽毛齒革 則君地生焉이라
其波及晉國者 君之餘也 其何以報君이리잇가 曰 雖然이나 何以報我
對曰 若以君之靈으로 得反晉國이면 하리이다
天將興之하니 誰能廢之리오 違天이면 必有大咎라하고 乃送諸秦하다 秦伯納女五人하니 與焉이라
한대 怒曰 어늘 何以卑我 公子懼하야 하다
13-05-02 秦伯納重耳至頭湏求見
[左傳]僖二十四年이라 하다
하다 公子入于晉師하다
丙午 入于曲沃하야 丁未 하고 戊申 하다
寺人披請見한대 公使讓之하고 且辭焉曰 蒲城之役 君命一宿이어늘 女卽至하고
其後 余從狄君以田渭濱 女爲惠公來求殺余할새 命女三宿이어늘 女中宿至하니
雖有君命이나 何其速也 夫袪猶在하니 ㄴ저
對曰 臣謂君之入也 其知之矣러니 若猶未也하니 又將及難하니 君命無二 古之制也니이다
除君之惡 唯力是視 이리잇가 잇가
하고 而使管仲相하니 잇가
守藏者也 其出也 竊藏以逃하야 하다
及入 求見한대 公辭焉以沐하니 謂僕人曰 沐則心覆하고 心覆則圖反하니 宜吾不得見也
居者爲社稷之守하고 行者爲羈絏之僕 其亦可也어늘 何必罪居者
國君而讐匹夫 懼者甚衆矣리라 僕人以告한대 公遽見之하다
晉文公 自出亡으로 至於霸天下 拔身流離阨困之中하야 而成閎大豐顯之業이라
一時諸臣狐趙郤推挽翊賛之功居多焉이나 疇諸臣之功 次者로다
文公未入之前 必以反晉之謀爲冠이요 文公旣入之後 必以城濮之戰爲冠이나
吾獨以爲反晉之功 不若去齊 而城濮之諸將論勳이나 曾未及寺人披頭湏之萬一也
天之生物 自蘗而條하고 自華而實 特造化之小者耳
霜焉雪焉하야 勁烈刻厲 翦擊其枝葉하며 剝傷其膚理하고 然後能反膏收液하야 鬱積磅礴이라가
發而爲陽春之滋榮하니 此天下之大造化也 必有大彫落하고 然後有大發生하며 必有大摧折하고 然後有大成就하니
文公安齊之富하고四方之志할새 苟從行諸臣亦徇其欲이면
幸而從行者識高慮遠하야 謀於桑下하야 載而去齊하니 奪其燕安之雨露하고 而壓以禍患之雪霜하야
激之觀浴沃盥하야 以起其憤하고 激之鄭文子玉하야 以作其憂
乃切乃磋하고 乃琢乃磨하야 向來弛墮驕怠之氣掃除咸盡하니 伯心勃然而生하야 이라
向非奪其安齊 亦安能進文公之志而霸之耶 文公始所以眷眷於齊者 屬意於二十乘之馬耳
從者奪文公二十乘之馬하고 而與文公全晉四千乘之賦 使之棄鴻毛而得泰山이니 可謂知取予矣로다
苟不去齊 烏能入晉이리오 然則策復國之勳 安得不以去齊爲首乎
文公旣入晉하야 席未及煖 已忘其初하고 於寺人披頭湏之見 忿然有不平之心이라
若肆行忿戮이면 則懼者甚衆이리니 雖幸免焚宮之變이라도 安知他日無蒯聵戎州之釁乎注+安知他日無蒯聵戎州之釁乎:
頼披與湏力抗危言以警之하야 文公一聞其警 忿戾俱消하니 變淺陋褊急之襟量하야 爲廣大易直之規模
隆寛盡下 人皆思奮하야 以取城濮之勝하니 豈非披與湏一警之力乎
回萬里之迷途者 一呼之力也 瘳十年之廢疾者 一鍼之力也 登五霸之盛烈者 一警之力也
自披湏而視城濮諸將之功이면 則我源而彼流 我根而彼幹이니 其小大輕重判然矣 此吾所以高披湏而下城濮也로다
文公方安其小하니 遽奪之而使不得安於小하고 文公方驕其大하니 遽警之而使不敢驕於大
奪於前而警於後하야 置文公於不得不霸之地하니 信矣 諸臣之功也
雖然이나 此非專諸臣之功也 其本實在於文公焉이라 文公當出亡之初 不校君父之命하니 旣有君人之資矣
其未安齊之前 危於渭濵하고 餓於五鹿하야 亦非一日也
雖時有所蔽라도 一奪一警 初心遽還하야 遷移改悔 速不容瞬하니 若文公先無所資 二三臣者雖有斡旋之妙用이라도 亦安所施乎
其君有如是之資하고 其臣有如是之用이로되 反僅成霸業而止하니 此吾所以爲文公恨也로다
之濵 하니 聖化天運하야 奪子貢之學而一貫自通하고 奪顔淵之才而卓爾自見注+奪子貢之學而一貫自通 奪顔淵之才而卓爾自見:이라
子貢子貢
或謦或咳하고 或顧或盼하며 或語或笑하야 一警之下 萬慮消亡하니
吾未嘗不恨文公生夫子之前이요 而又自恨今之學者生夫子之後也
嗚呼 夫子則遠矣 乃若夫子之神化 盖通萬世古今爲一爐冶하니 初未嘗息也 孰謂吾生之晩乎


나라 重耳으로 도망가다’부터 ‘上衣를 벗고 스스로 罪囚 모양을 하고서 謝罪하다’까지
나라 重耳으로 도망가다’부터 ‘上衣를 벗고 스스로 罪囚 모양을 하고서 謝罪하다’까지
僖公 23년, 公子 重耳禍難를 만났을 때에 晉人蒲城攻伐하니, 蒲城 사람들이 맞아 싸우려 하자
重耳가 반대하며 “君父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는 祿을 받았고, 이로 인해 人民을 얻었는데 人民을 소유하였다 하여 〈君父에〉 저항[]한다면 이보다 큰 가 없으니, 나는 도망갈 것이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으로 도망갔다.
이때 그를 侍從한 사람은 狐偃, 趙衰, 顚頡, 魏武子(魏犨), 司空季子였다. 狄人廧咎如討伐하여 그 두 딸 叔隗季隗를 포로로 잡아와서 公子에게 바치니,
公子季隗를 취하여 伯儵叔劉를 낳고, 叔隗趙衰의 아내로 주어 을 낳았다.
重耳나라로 가려 할 때 季隗에게 이르기를 “나를 25년 동안 기다렸다가 돌아오지 않거든 시집가라.”고 하였다. 季隗가 대답하기를 “내 나이 지금 25세인데 다시 25년이 지난 뒤에 시집간다면 에 들어갈 때가 될 것이니, 〈公子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晉나라 重耳가 列國을 주유하다[晉重耳周遊列國]晉나라 重耳가 列國을 주유하다[晉重耳周遊列國]
나라를 지날 때 文公禮遇하지 않으니, 五鹿으로 나와 野人에게 음식을 求乞하였다.
野人이 그에게 흙덩이를 주니 公子하여 채찍으로 치려 하자 子犯이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니, 重耳는 머리를 조아리고 그 흙덩이를 받아 수레에 실었다.
나라에 이르러 桓公이 딸을 重耳에게 아내로 주니, 公子나라의 생활에 安住하였다. 그러자 그를 따른 자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장차 떠날 것을 뽕나무 아래에서 謀議하였는데,
누에 치는 이 그 나무 위에 있다가 그 모의를 듣고 돌아와서 그 일을 姜氏에게 고하였다. 姜氏는 그 첩을 죽여 입을 막고서 公子에게 “公子께서 가지신 天下經營遠大한 뜻에 대해 들은 사람을 내가 이미 죽였습니다.”라고 하니,
公子가 “그런 뜻이 없다.”라고 하였다. 姜氏가 “떠나십시오. 아내를 사모하고 安逸을 탐하는 것은 실로 功名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하였다. 公子가 듣지 않자, 姜氏子犯과 상의하여 公子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에 수레에 싣고 나라를 떠나보냈다.
나라에 이르니 共公重耳의 갈비가 통뼈라는 말을 듣고 그의 알몸을 보고자 하여 그가 목욕할 때에 가까이 다가가서 구경하였다.
僖負羈의 아내가 僖負羈에게 말하였다. “내가 晉公子從者들을 보건대 모두 나라의 宰相이 되기에 충분한 人才들이니 만약 公子가 저들의 보좌를 받는다면 夫子는 반드시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나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諸侯霸主가 될 것이고, 제후의 霸主가 되어 無禮한 나라를 誅罰한다면 아마 나라가 맨 먼저 주벌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찌 일찍이 스스로 두 마음을 품은 것을 公子에게 보이지 않습니까?”
아내의 말을 들은 僖負羈가 한 소반의 음식을 보내면서 밥 속에 구슬을 넣으니, 公子는 그 밥만을 받고 구슬은 돌려주었다.
나라에 이르니 襄公이 그에게 말 20을 보내주었다. 나라에 이르니 文公 또한 禮遇하지 않았다.
나라에 이르니 楚子酒宴을 베풀어 重耳을 접대하며 말하기를 “公子가 만약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무엇으로써 不穀에게 報答하겠소?”라고 하니,
重耳가 대답하기를 “子女玉帛이라면 임금께서 이미 소유하셨고, 이라면 임금님의 땅에서 생산됩니다.
우리 나라에 흘러온 것들은 임금님께서 쓰시고 남은 것들이니, 무엇으로 임금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楚子가 다시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무엇으로써 보답하겠소?”라고 하니,
重耳가 대답하였다. “만약 임금님의 덕으로 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라와 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서 中原에서 만났을 때 임금님을 위해 3를 물러나겠습니다.
그래도 〈戰爭을 중지하자는〉 임금님의 을 들을 수 없으면 왼손에는 채찍과 활을 잡고 오른손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차고서 임금님과 한판 겨루어보겠습니다.”
이에 子玉이 죽이기를 청하니 楚子는 “晉公子는 뜻이 廣大하면서도 儉素하고 文華하면서도 가 있으며, 그 從者들은 엄숙하면서도 너그럽고 충성스러워 힘을 다해 그 임금을 섬기는데,
현재의 晉侯親近한 사람이 없어 內外가 모두 그를 미워한다. 내가 듣건대 姬姓 諸侯 중에 唐叔後孫이 가장 뒤에 衰亡할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晉公子가 장차 나라의 임금이 되기 때문이리라.
하늘이 그를 일으키려 하는데 누가 그를 廢黜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을 어기면 반드시 큰 災殃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重耳나라로 보내주었다. 秦伯重耳에게 여자 다섯을 보내주었는데 懷嬴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하루는 懷嬴이 주전자[]에 물을 담아 들고 重耳의 손에 부어 洗手하게 하였는데, 〈重耳가〉 세수를 마치고는 젖은 손의 물을 懷嬴에게 뿌리니, 懷嬴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나라와 나라는 對等[]한 나라인데 어째서 나를 卑賤하게 대하십니까?” 公子는 겁이 나서 上衣를 벗고 스스로 罪囚 모양을 하고서 謝罪하였다.
秦伯重耳나라로 들여보내다’부터 ‘頭湏가 뵙기를 청하다’까지
僖公 24년, 봄에 秦伯重耳나라로 들여보냈다.
重耳黃河에 이르렀을 때 子犯璧玉公子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羈絏을 지고 임금님을 따라 天下를 돌아다니는 사이에 이 지은 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떠나겠습니다.”라고 하니,
公子가 말하였다. “만약 내가 舅氏(外叔)와 마음을 한가지로 하지 않는다면 白水證人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그 璧玉黃河에 던졌다.
黃河를 건너 令狐를 포위하고 桑泉으로 진입한 뒤에 臼衰를 취하였다. 晉軍廬柳에 주둔하거늘 秦伯公子 晉軍에 보내니 晉軍이 퇴각하여 에 주둔하였다.
狐偃나라‧나라의 大夫에서 結盟하였다. 公子晉軍陣營으로 들어갔다.
丙午日曲沃으로 들어가서 丁未日武宮謁見하고 戊申日高梁으로 사람을 보내어 懷公을 죽였다.
寺人 가 뵙기를 청하자 文公이 사람을 시켜 꾸짖고 또 接見을 거절하며 말하였다. “蒲城戰爭 때 임금(獻公)께서는 하룻밤을 묵으면서 가라고 명하셨는데 너는 卽日로 달려왔고,
그 뒤에 내가 狄君渭水 가에서 사냥할 때 너는 또 惠公을 위해 와서 나를 죽이려 하였는데 그때 惠公은 너에게 사흘 밤을 묵으면서 가라고 명하였는데, 너는 이틀 만에 달려왔다.
비록 君命이 있기는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그리도 속히 왔느냐? 그때 너에게 소매가 잘린 옷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으니 너는 떠나거라.”
가 대답하였다. “은 임금님께서 들어와 〈임금이 되셨으니〉 당연히 임금의 도리를 아실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아직도 임금의 도리를 모르시는 것 같으니 또 장차 患難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의 奉行함에 있어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옛 制度입니다.
임금의 害惡을 제거함에는 오직 힘만을 볼 뿐이니 蒲人狄人이 어찌 나의 眼中에 있었겠습니까? 이제 임금께서 즉위하였으니 어찌 蒲人狄人이 없겠습니까?
桓公帶鉤를 쏜 원한을 버리고서 管仲丞相으로 삼았으니 께서 만약 桓公과 반대로 옛 怨恨을 잊지 않으시겠다면 어찌 을 내리시는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떠나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이니 어찌 刑臣뿐이겠습니까?” 文公이 그를 접견하니 變難을 고하였다.
당초에 晉侯小吏 頭湏는 창고를 지키는 자였다. 文公出奔했을 때 창고의 財物을 훔쳐 가지고 도망하여 그 재물을 다 써가며 諸侯들에게 文公을 도와 귀국시켜 주기를 구하였다.
文公이 귀국함에 미쳐 頭湏가 뵙기를 청하자 文公은 머리를 감는다는 핑계로 접견을 辭絶하였다. 頭湏僕人에게 말하였다. “머리를 감으면 심장이 顚倒[]되고 심장이 전도되면 생각[]도 전도되는 것이니 내가 謁見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國內에 남았던 사람들은[居者] 公子를 위해 社稷을 지키고, 出奔에 따라간 사람들은[行者] 公子를 위해 말굴레와 말고삐를 잡는 奴僕 노릇을 한 것은 모두 할 일을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남았던 사람들만을 죄주려 하는가?
國君으로서 匹夫를 원수로 대한다면 두려워할 사람이 매우 많을 것이다.” 僕人이 이 말을 고하자 文公은 서둘러 그를 접견하였다.
文公나라를 떠나 망명했을 때부터 천하의 패자가 될 때까지 流離乞食하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 拔身하여 閎大하고 豐顯한 기업을 이루었다.
당시의 여러 신하들인 狐偃趙衰胥臣郤穀이 좌우에서 보익한 공로가 크지만, 이와 같은 지난날 여러 신하들의 공로는 〈寺人 頭湏의 공적에 비하면〉 次善이다.
은〉 文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반드시 나라로 돌아갈 계책을 으뜸으로 삼고, 文公이 이미 나라에 들어온 뒤에는 반드시 城濮의 전쟁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홀로 ‘나라로 돌아온 나라를 탈출한 계책을 성사시킨 이 비교적 좋고, 城濮의 전쟁에서의 여러 장수들은 공훈에 따라 논의하여 공적이 메겨질 수 있으나, 이들은 寺人 頭湏의 공적에 비하면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만물을 냄에 싹이 나서 가지가 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것은 다만 작은 조화일 뿐이다.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려서 강렬하고 엄혹하게 가지와 잎을 잘라내고 쳐내며 겉껍질과 속결을 깎아내고 상처 낸 뒤에 기름과 진액을 거두어 무성히 저장해두다가,
피어나 따뜻한 봄날에 생장하는 꽃이 되니, 이것이 천하의 큰 조화이다. 반드시 크게 시들어 떨어진 뒤에 크게 발생하고, 반드시 크게 꺾여 부러진 뒤에 크게 성취하는 것이니,
文公나라에서의 부유함을 편안히 여기고 더 이상 四方으로 나아갈 뜻이 없었을 때 만일 시종하는 여러 신하들도 文公의 바람을 따랐다면 종신토록 營丘에 사는 일개 布衣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시종하는 신하들의 식견이 높고 사려가 원대하여 뽕나무 아래에서 계획하고 문공을 수레에 실어 나라를 떠나게 했으니, 이는 단비와 이슬 같은 안락을 빼앗고 폭설과 서리 같은 환란으로 누른 것이다.
그리하여 목욕하는 알몸을 보이고 손 씻은 물을 뿌려 모욕을 받은 일로 격발시켜 그의 분심을 일으키고, 〈無禮한〉 文公과 〈重耳를 죽일 것을 청한〉 子玉의 일로 격발시켜 그 걱정을 일으켰다.
이에 切磋琢磨해서 지난날 해이하고 타락했던 교만하고 나태한 기운을 모두 다 쓸어버리니, 패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불끈 생겨나 武公의 사당에 배알하고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이다.
지난날 나라에서 안주하려는 마음을 빼앗지 않았다면 또한 어찌 文公의 의지를 추진시켜 霸者가 되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文公이 처음에 나라에서 연연했던 까닭은 말 20승에 뜻이 매어서였을 뿐이다.
시종하는 신하들이 文公에게서 20승의 말을 빼앗고 文公에게 온 나라의 4천 승의 구실을 준 것은, 그에게 기러기 털을 버리고 泰山을 얻게 한 것이니 취사선택할 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만일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찌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본국으로 돌아갈 계책을 세운 공훈 중에 어찌 나라를 탈출할 계책을 성사시킨 이 으뜸이 아니겠는가?
文公나라에 들어가고 나서 방석이 미처 따뜻해지기도 전에 벌써 初心을 잊고 寺人 頭湏가 알현하고자 함에 화를 내며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일 맘대로 행동하여 분한 마음에 그들을 죽였다면 두려운 일이 매우 많았을 것이니, 비록 요행히 궁실이 불타는 변고를 면했다 하더라도 어찌 훗날 蒯聵가 당했던 戎州의 분란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注+哀公 2년의 일이다.
寺人 頭湏가 힘써 위험을 무릅쓰고 直言으로 경계해준 데 힘입어 文公이 한번 그 경계를 듣자 성나고 삐뚤어진 마음이 다 사라지니, 비루하고 조급한 흉금과 도량이 변하여 광대하고 온화하며 정직한 氣槪가 되었다.
아랫사람을 관대함으로 극진하게 대하자 사람들이 모두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하여 城濮에서의 승리를 취하게 되었으니 어찌 寺人 頭湏가 한번 경계시킨 힘이 아니겠는가?
만 리 길을 헤매고 있는 자를 되돌리는 것은 한번 부른 힘이고, 십 년 앓은 고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바늘 하나의 힘이며, 五霸의 융성한 공렬에 오른 것은 한번 경계해준 힘이다.
寺人 頭湏의 입장에서 城濮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여러 장군들을 비교해보면, 나는 근원이고 저 장군들은 말류이며, 나는 뿌리이고 저 장군들은 줄기이니 그 대소와 경중이 확연하다. 이것이 내가 寺人 頭湏를 높이 여기고 城濮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낮게 여기는 이유이다.
文公이 바야흐로 작은 일에 안주하자 갑자기 그것을 빼앗아 작은 일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였고, 文公이 바야흐로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자 갑자기 경계하여 감히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지 못하게 하였다.
앞에서 빼앗고 뒤에서 경계하여 文公을 패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놓았으니, 여러 신하들의 공임에 틀림없다.
비록 그렇지만 이는 오로지 여러 신하들의 공만이 아니라, 그 근본은 실제로 文公에게 있는 것이다. 文公은 망명할 초기에 君父을 저항하지 않았으니, 이미 군주의 자질이 있었다.
아직 나라에서 안정되기 전에 渭水 가에서 위험에 처했고, 五鹿에서 굶주려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격을 참았으니, 그의 부족한 점을 증익한 날이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비록 당시에 분별력을 잃었다 해도 한번 빼앗기고 한번 경계받음에 初心이 대번에 돌아와 눈 깜짝할 사이에 改過遷善하였으니 만일 文公에게 먼저 타고난 자질이 없었다면 몇몇 신하들이 일을 잘 주선하는 신묘한 功用이 있다 해도 또한 그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 군주가 이와 같은 자질이 있고 그 신하가 이와 같은 功用이 있는데도, 도리어 겨우 패업을 이루는 데 그쳤으니, 이것이 내가 文公을 위하여 유감으로 여기는 이유이다.
洙水泗水 가에서 한 길[]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앉으니 聖人(孔子)의 교화가 하늘이 운행하는 것 같아, 子貢에게는 그동안 배웠던 학문을 버리고 〈성인의〉 하나의 이치가 관통하는 것으로 저절로 통하게 하였고, 顔淵에게는 재주를 다하게 하여 〈성인이〉 우뚝하게 서 계신 것 같은 것으로 저절로 드러났다.注+모두 ≪論語≫에 보인다.
孔子孔子
때로는 기침소리로, 때로는 돌아보심과 눈빛으로, 때로는 큰소리와 웃음으로 교화하여 한번 경계함에 온갖 염려가 다 없어졌다.
이러므로 나는 文公孔子보다 먼저 태어난 것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고, 또 오늘날의 배우는 자가 孔子의 뒤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유감으로 여긴다.
아! 孔子가 살아계셨던 시대는 오래되었으나, 孔子의 신묘한 교화는 萬世古今을 통틀어 한 용광로에 넣어 다스려지고 있으니, 애당초 쉰 적이 없다. 누가 나의 출생이 늦었다고 하는가?


역주
역주1 公子重耳之及於難也 : 驪姬의 禍難을 만난 것이다.〈附注〉
역주2 晉人伐諸蒲城 : 이 일은 僖公 5년에 있었다.〈杜注〉
역주3 保君父之命而享其生祿 : 生命을 保養할 수 있는 祿邑을 받았다는 말이다. 享은 受이다.〈附注〉
역주4 於是乎得人 : 祿邑이 있어 많은 무리를 모았다는 말이다.〈杜注〉
역주5 有人而校 罪莫大焉 : 人民을 소유하였다 하여 君父와 勝負를 겨룬다는 말이다. 校는 報復하는 것이다.〈附注〉
역주6 司空季子 : 胥臣臼季를 이른다. 司空은 官名이고, 胥는 氏, 臣은 名, 臼는 食邑이다. 그러므로 胥臣이라 하기도 하고 臼季라고도 한다. 이때 狐毛와 賈佗도 함께 侍從하였는데 이 다섯 사람만을 들어 말한 것은 賢明하고 大功이 있었기 때문이다.〈杜注〉
역주7 廧咎如 : 赤狄의 別種으로 隗姓이다.〈杜注〉
역주8 : 趙衰의 아들 趙盾은 趙宣子이다.
역주9 又如是而嫁 則就木焉 : 장차 죽어서 棺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다시 시집갈 수 없다는 말이다. 즉, 公子 重耳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重耳는 僖公 5년에 狄으로 도망가서 僖公 16년에 狄을 떠났으니, 狄에 머문 지 12년 만이다.
역주10 出於五鹿 : 五鹿은 衛나라 땅이다. 지금 衛縣 서북쪽에 五鹿이란 地名이 있고, 陽平 元城縣 동쪽에도 五鹿이란 地名이 있다.〈杜注〉
역주11 野人與之塊 : 野人이 無禮하게 흙덩이를 重耳에게 준 것이다.〈附注〉
역주12 子犯曰 天賜也 : 흙을 얻는 것은 國家를 소유할 조짐이기 때문에 하늘이 준 것이라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13 公子安之 : 重耳는 齊나라의 생활을 편안하게 여겨 다시 천하를 經營할 원대한 뜻을 갖지 않은 것이다.〈附注〉
역주14 將行 謀於桑下 : 齊 桓公은 이미 죽었고, 孝公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齊나라를 떠나고자 한 것이다.〈杜注〉
역주15 蠶妾在其上 : 누에를 치는 姜氏의 婢妾이 마침 그 나무 위에서 뽕을 따다가 그 謀議를 들은 것이다.〈附注〉
역주16 以告姜氏 姜氏殺之 : 姜氏는 重耳의 아내이다. 孝公이 重耳가 떠날 것을 알면 怒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 婢妾을 죽여 입을 막은 것이다.〈杜注〉
역주17 姜曰 行也 : 姜氏가 重耳에게 떠나도록 勸勉한 것이다.〈附注〉
역주18 懷與安 實敗名 : 남의 寵愛를 그리워하고 자신의 거처를 편안히 여기는 것은 실로 功名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附注〉
역주19 姜與子犯謀 醉而遣之 : 齊나라를 떠날 뜻이 없었기 때문에 姜氏는 子犯과 상의하여 公子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에 수레에 싣고 齊나라를 떠나보낸 것이다. ≪春秋左氏傳≫에는 이 글 뒤에 ‘重耳는 술이 깬 뒤에 크게 노하여 창을 들고 子犯을 뒤쫓았다.’는 기사가 더 있다.
역주20 騈脅 : 갈비뼈가 붙은 것이다.〈杜注〉 즉 騈은 붙은 것이고 脅은 갈비이니, 겨드랑이 밑에 있는 여러 개의 肋骨이 서로 붙어 마치 하나의 뼈가 된 것 같은 것이다.〈附注〉
역주21 薄而觀之 : 薄은 가까이 가는 것이다.〈杜注〉
역주22 僖負羈 : 曹나라 大夫이다.〈杜注〉
역주23 夫子 : 重耳를 이른다.
역주24 子盍蚤自貳焉 : 自貳는 스스로 曹君에게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이니, 이런 뜻을 公子에게 보이라는 말이다.〈杜注〉
역주25 乃饋盤飱 寘璧焉 : 신하는 國外의 사람과 交際하는 의리가 없기 때문에 소반에 음식을 보내는 기회를 이용해 밥 속에 구슬을 넣어 사람들이 모르게 한 것이다.〈杜注〉
역주26 公子受飱反璧 : 밥을 받아 그 뜻을 받아들이고, 구슬을 돌려주어 貪慾하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附注〉
역주27 不穀 : 君王의 謙稱이다.
역주28 子女 : 妃妾이다.〈附注〉
역주29 晉楚治兵……其辟君三舍 : 30리가 1舍이다. 만일 晉나라와 楚나라가 전쟁을 할 경우, 晉兵이 90리를 후퇴해 楚兵을 피하는 것으로써 楚나라의 恩德을 갚겠다는 말이다.〈附注〉
역주30 若不獲命 : ‘三舍를 물러났는데도 戰爭을 중지하자는 楚王의 명을 받지 못한다면’의 뜻이다.〈杜注〉
역주31 其左執鞭弭……以與君周旋 : 弭는 끝을 뼈로 장식하지 않은 활이다. 櫜는 화살통이고, 鞬은 활집이다. 屬은 차는 것이다. 周旋은 서로 追擊하는 것이다.〈杜注〉
역주32 子玉請殺之 : 重耳의 뜻이 큰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죽이기를 청한 것이다.〈杜注〉
역주33 晉公子廣而儉 : 重耳의 뜻은 넓고, 행실은 검소하다는 말이다.〈杜注〉
역주34 文而有禮 : 文華한 사람은 傲慢에 이르기 쉬운데 公子는 능히 禮로써 자신을 단속한다는 말이다.〈附注〉
역주35 其從者肅而寬 : 肅은 敬과 같은 말이다.〈杜注〉
역주36 忠而能力 :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고 부지런히 힘까지 쓴다는 말이다.〈附注〉
역주37 晉侯無親 外內惡(오)之 : 晉侯는 惠公이다. 그는 猜忌心이 많아 남을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親近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附注〉
역주38 吾聞姬姓……其將由晉公子乎 : 唐叔의 자손이 다른 諸侯보다 뒤에 衰亡한다면 晉나라가 興起하는 것은 아마도 晉公子 重耳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다.〈附注〉
역주39 懷嬴 : 子圉의 아내이다. 子圉의 諡가 懷公이기 때문에 懷嬴이라 호칭한 것이다.〈杜注〉
역주40 奉匜沃盥 旣而揮(也)[之] : 匜는 洗手하도록 물을 붓는 그릇이다. 盥은 세수하는 것이고, 揮는 뿌리는 것이다. 懷嬴이 匜를 들고 重耳의 손에 물을 부어 세수하게 하고는 세수를 마치자 젖은 손을 회영에게 뿌려 물이 그 옷을 더럽히게 했다는 말이다.〈附注〉
역주41 (也)[之] : 저본에는 ‘也’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之’로 바로잡았다.
역주42 秦晉 匹也 : 匹은 匹敵이다.〈杜注〉
역주43 降服而囚 : 上服을 벗고 스스로 罪囚의 모양을 하고서 謝過한 것이다.〈杜注〉
역주44 秦伯納之 : 重耳를 晉나라로 들여보낸 것이다.〈杜注〉
역주45 及河 子犯以璧授公子 : 璧玉을 重耳에게 준 것은 子犯이 임금으로 하여금 誓約하도록 脅迫하려는 뜻이었으니, 이것이 子犯의 奸巧함이다.〈附注〉
역주46 臣負羈絏從君巡於天下 : 羈는 말굴레이고 絏은 말고삐이니 신하가 임금을 위해 賤役을 奉行하는 것으로, ‘負羈絏’은 亡命한 임금을 隨從한 자가 자신을 일컫는 투식어이다.
역주47 請由此亡 : 林堯叟의 注에 “여기에서 도망해 가겠다고 청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朱申의 주에 “여기에서 죽겠다고 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8 所不與舅氏同心者 有如白水 : 杜預의 注에 “子犯은 重耳의 外叔이다. 舅氏와 마음을 한가지로 하겠다는 밝은 盟誓가 이 맑은 물과 같다는 말이니, ≪詩經≫ 〈王風 大車〉에 ‘나의 말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면[謂予不信] 밝을 해가 證人이 될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所는 若의 뜻으로 誓詞에 많이 쓰인다. 有如도 誓詞 중에 常用하는 말이다. 여기의 ‘有如白水’, 文公 12년의 ‘有如河’, 襄公 25년의 ‘有如上帝’, 定公 6년의 ‘有如先君’, 哀公 14년의 ‘有如陳宗’ 등은 모두 神이 盟誓의 증인이 되어 盟誓를 어기면 神이 罰을 내린다는 뜻이다.(≪春秋左傳注≫, ≪左氏會箋≫)
역주49 投其璧于河 : 황하의 神에게 信義를 立證[質]하기 위해 璧玉을 던진 것이다.〈杜注〉
역주50 入桑泉 取臼衰 : 桑泉은 河東 解縣 서쪽에 있고, 臼城은 解縣 동남쪽에 있다.〈杜注〉
역주51 晉師軍于廬柳 : 重耳를 막기 위해 懷公이 보낸 군대이다.〈杜注〉
역주52 秦伯使公子縶如晉師……軍于郇 : 解縣 서북쪽에 郇城이 있다. 晉軍이 秦伯의 命에 따라 文公을 받아들이기로 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물린 것이다.〈附注〉
역주53 狐偃及秦晉之大夫盟于郇 : 郇에서 結盟하여 文公을 들여보내기로 約定한 것이다.〈附注〉
역주54 朝于武宮 : 文公의 祖父 武公의 廟이다. 武公이 曲沃伯으로 晉나라를 兼倂하였기 때문에 曲沃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附注〉
역주55 使殺懷公于高梁 : 懷公이 高梁으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高梁은 平陽 楊縣 서남쪽이다.〈杜注〉
역주56 女其行乎 : ‘너는 떠나거라.’는 말은 너를 용서해 멀리 보내겠다는 말이다.〈附注〉
역주57 蒲人狄人 余何有焉 : ‘君께서 蒲에 있을 때는 蒲人이고 狄에 있을 때는 狄人이었다. 그 당시 나는 獻公과 惠公만을 알 뿐이었으니, 文公에게 무슨 관심이 있었겠느냐.’는 말이다.〈附注〉
역주58 今君卽位 其無蒲狄乎 : 어찌 君께서 蒲와 狄에 있을 때처럼 公을 해치고자 하는 자가 없겠느냐는 말이다.〈附注〉
역주59 齊桓公置射鉤 : 乾時의 戰爭에서 管仲이 桓公에게 활을 쏘아 帶鉤를 맞혔다.〈杜注〉
역주60 君若易之 何辱命焉 : 만약 齊 桓公과 반대로 하려 한다면 스스로 떠날 것이고 떠나라는 명을 내리는 수고를 끼치지 않겠다는 말이다.〈杜注〉
역주61 行者甚衆 : 罪를 받게 될까 두려워 떠나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이라는 말이다.〈附注〉
역주62 豈唯刑臣 : 披는 奄人(去勢 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刑臣’이라고 自稱한 것이다.〈杜注〉
역주63 公見之 以難告 : 呂甥과 郤芮가 公宮에 불을 지르려고 한 일을 고한 것이다. 呂甥과 郤芮는 惠公의 舊臣이기 때문에 文公에게 핍박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公宮에 불을 질러 晉侯를 弑害하려 하였다.
역주64 晉侯之豎頭湏 : 豎는 左右의 小吏이다.〈杜注〉
역주65 盡用以求納之 : 文公을 歸國시켜 주기를 구한 것이다.〈杜注〉
역주66 (晉)[胥] : 저본에는 ‘晉’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胥’로 바로잡았다.
역주67 [績]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績’을 보충하였다.
역주68 (役)[復] : 저본에는 ‘役’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復’로 바로잡았다.
역주69 則終身營丘一布衣耳 : 姜太公이 周나라로부터 처음 봉해 받은 지역이 營丘이다. 齊나라는 춘추시대 獻公 때에 도읍을 臨淄로 옮겼다.
역주70 朝于武宮 不失舊物 : 武宮은 曲沃에 있는 文公의 祖父인 武公의 사당이다. 武公이 曲沃伯으로 晉나라를 兼倂하였기 때문에 曲沃에 그의 사당이 있다. 舊物은 예로부터 내려온 국가의 典章과 制度를 가리키니, 천하를 다스리는 옛일을 잃지 않음이다.
역주71 哀二年 : 衛 靈公 사후에 出公 輒이 군주가 되나 孔悝의 도움으로 蒯聵(莊公)가 입국하고 출공이 쫓겨난다. 그러나 莊公은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하다 戎州의 여인에게 살해당하는데, 당초에 莊公은 “우리나라는 姬姓인데, 어찌 戎人이 있을 수 있느냐?”라고 하고서 戎州의 聚落을 파괴한 일이 있으며, 또 莊公이 戎州의 城 위에서 己氏 아내의 頭髮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그 머리를 깎아 대머리로 만들고서 자른 머리카락으로 呂姜(莊公의 妃)의 다리[髢]를 만들게 한 일이 있었으니, 莊公이 죽은 일과 무관하지 않다.
역주72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者 : ≪孟子≫ 〈告子 下〉에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心志를 괴롭게 하며 그 觔骨을 수고롭게 하며 그 體膚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빈궁하게 하여 행함에 그 하는 바를 拂亂시키니, 이것은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격을 참게 하여 그의 부족한 점을 증익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73 洙泗 : 춘추시대 魯나라 지역에 있던 洙水와 泗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孔子가 洙水와 泗水 사이에서 제자들을 모아 講學하였다고 하여, ‘洙泗’는 孔子 또는 儒學의 대칭으로 쓰인다. ≪禮記≫ 〈檀弓 上〉에서, 曾子가 子夏에게 “내가 너와 함께 洙水와 泗水 사이에서 부자를 섬겼다.[吾與汝事夫子于洙泗之間]” 하였다.
역주74 席間函丈 : ‘函丈’은 講學하는 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禮記≫ 〈曲禮 上〉에 “음식을 대접할 손님이 아닌 경우에는 자리를 펼 때에 자리의 간격을 한 길[丈] 정도로 한다.[若非飮食之客 則布席 席間函丈]”라고 하였다.
역주75 竝論語 : ≪論語≫ 〈衛靈公〉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賜야! 너는 나를 많이 배워서 기억하는 자로 여기느냐?’ 子貢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이치로 꿰어 있느니라.’[子曰 賜也 女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 하였고, ≪論語≫ 〈子罕〉에 “顔淵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夫子의 道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며, 볼 때에는 앞에 있더니 갑자기 뒤에 있도다. 夫子께서는 次序에 따라 사람을 잘 인도하시어 文(古文獻)으로써 나의 〈식견을〉 넓혀주시고 禮로써 나의 〈행동을〉 約束(단속)해주셨다.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가 없어서 나의 재주를 다하였더니, 〈夫子의 도가 내 앞에〉 우뚝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비록 그것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따를 수가 없도다.’[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하였다.

동래박의(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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