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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 宋叛楚卽晉
15-01-01 宋叛楚卽晉
[左傳]僖二十六年이라 叛楚卽晉하니 楚令尹子玉司馬子西帥師伐宋하야 圍緡하다
15-01-02 楚子將圍宋止文之敎也
[左傳]僖二十七年이라 하야 하니 하다
하니 終日而畢하고 鞭七人하고 하다
對曰 不知所賀니이다 子之傳政於子玉 曰 以靖國也라하더니
子玉之敗 子之擧也 擧以敗國하니 將何賀焉이릿가 子玉剛而無禮하야 不可以治民이니
過三百乘이면 리이다 苟入而賀ㄴ들 何後之有릿가
楚子及諸侯圍宋하니 如晉告急하다
하고 取威定霸 於是乎在矣니이다
狐偃曰 楚始得曹하고 하니 리이다
하야 作三軍하고 謀元帥하다 趙衰曰 郤縠니이다
乃使將中軍하고 郤溱佐之하며 使狐偃將上軍하니 讓於而佐之하고
命趙衰爲卿하니 讓於先軫이어늘 使欒枝將下軍하고 先軫佐之하며 하고 魏犨爲右하다
而敎其民하고 二年 欲用之하니 子犯曰 하니이다
將用之한대 子犯曰 이니이다
於是乎伐原以示之信하니 하고 어늘
公曰 可矣乎 子犯曰 民未知禮하니 이니이다
하고 하니 民聽不惑하다
15-01-03 晉侯將伐曹止會諸侯于許
[左傳]僖二十八年 한대 衛人弗許어늘
하야 하야 하다하다 하다
衛侯請盟이어늘 晉人弗許하다 晉侯圍曹하야 三月丙午 入曹하야 令無入僖負羈之宮而免其族하니
執曹伯하고 하다 楚子入居于申하야 使申叔去穀하고
使子玉去宋曰 無從晉師하라 하니
民之情僞 盡知之矣 하고 하니 天之所置 其可廢乎
曰 非敢必有功也 하노이다
王怒하야 少與之師하다 公乃拘宛春於衛하고 且私許復曹衛하니 曹衛告絶於楚하다
하니 晉師退한대 軍吏曰 以君辟臣 辱也 且楚師老矣어늘 何故退
子犯曰 師直爲壯이요 曲爲老 豈在久乎
退三舍하다 楚衆欲止하니 子玉不可하다 四月 晉侯次于城濮한대 楚師背酅而舍
子玉使鬪勃請戰하다 하니 其可用也로다 하다
己巳 晉師陳于하다 楚師敗績이라 하고 及癸酉而還하다 甲午 하다
衛侯聞楚師敗하고하야 出奔楚라가 遂適陳하야 하다
癸亥 王子虎盟諸侯于王庭하다 曰 皆獎王室하야 無相害也하라
有渝此盟이면 明神殛之하야 俾隊其師하야 無克祚國하고玄孫 無有老幼하리라
君子謂是盟也信이라하고 이라하다
城濮之戰 하야 하니
이라하야 殺之하야 以徇于諸侯하고 使茅茷代之하다
師還하야 濟河하다 舟之僑先歸하니 하다
七月 하야 하고 飮至大賞하고 하고
하니 民於是大服하다 君子謂文公其能刑矣로다 而民服이로다
會于溫하니 討不服也 注+會于溫 討不服也:討許衛하다
仲尼曰 以臣召君 不可以訓이라
晉侯有疾하니 하야 使曰 하라 이어늘
今君爲會而滅同姓하니 先君唐叔 武之穆也
且合諸侯而滅兄弟 非禮也 하고 而不與偕復 非信也 同罪異罰
禮以行義하고 信以守禮하며 刑以正邪 舍此三者 君將若之何 公說하야 復曹伯하고 하다
戶有樞하고 言亦有樞하며 射有的하고 言亦有的하며
有會하고 言亦有會하니
一得其樞 萬戶皆開하고 一破其的이면 萬矢皆廢하며 一中其會하면 萬理皆解
千世之所不能決 百家之所不能定 群說之所不能該 聖人折之以一字하야 而包羅交結하야 擧無所遺하니 是果何術耶
盖所運者樞 所貫者的이요 所據者會也새니라
晉文公之霸諸侯 其謀畫 其政刑 其征伐 其盟會 使後世學者定其是非
之曰 此臧也 彼否也 此優也 彼劣也 此工也 彼拙也라하야이라도
猶未能盡其是非어늘 而吾라하시니라
如拔其尤者論之컨대 兼受二國之施하니 則當兼報二國之德이라
豈當有所偏助哉 文公之心 則以宋弱國也 因前日之德而親我者也 楚強國也 挾前日之德而陵我者也
今楚伐宋하니 爲吾計者컨대 固當助宋以厚其親我之心이요 挫楚以奪其陵我之氣
不寧惟是 吾方圖霸業호되 坐視楚橫行而不敢較 則霸權在楚不在晉矣
然遽加兵於楚 則天下必以我爲背惠食言이리니 其誰與我리오 於是不攻楚而攻楚之所必救
伐曹伐衛 皆楚親暱이니 外無背楚之名이요 而內有怒楚之實이라
使兵端發於楚하고 而不發於我하야 待楚之先動而後 徐起而應之 則雖破楚而無背惠之名이니 其爲謀可謂譎矣
此猶非其譎之尤者也 文公名雖救宋이나 而意實在於勝楚 時天下之強國 爲晉與楚
必先摧楚之鋒然後 晉可以專霸於天下 楚子固倦於兵하니 其很戾而好戰者 獨子玉耳
儻不深激楚之怒 則楚將知難而退리니 晉楚之雌雄不決矣리라
於是因執曹伯하고 分曹衛之田賜宋 所以深激楚之怒하야 而趣之戰也
苟文公意止於救宋이면 則當宛春之使 必欣然而從矣리라
何者 始伐曹衛 本所以救宋也어늘 今楚果以愛曹衛之故 將釋宋圍 是適投吾欲也
我復曹衛하고 彼釋宋圍 兩得其欲이니 何爲不許之乎 文公非惟不許 乃執宛春以辱之하고
又私許復曹衛以挑之하야 惟恐激而不怒하고 怒而不戰하니
是其心果在於勝楚 而不在於救宋也 人知文公救宋而止耳 孰知其譎之尤 一至於此乎
至於退舍之事하야는 則其譎又深矣 楚本無與晉競之心이로되 文公多方以怒之하고 迫而使戰하니
雖子玉不勝一朝之忿이나 然上則楚子 下則士卒 皆不欲也
自常情論之컨대 雖車馳卒奔이라도 猶懼失楚師 況退舍避之하야 使子玉得假以爲班師之名乎
盖文公固已料子玉於度內하야 明知子玉內懷蒍賈之謗하고 急於立功以刷其恥하야
見吾之退避 必謂幸遇脆敵하니 功業易取 無若此時 雖吾退十舍라도 猶將來追 況三舍乎
文公之所以肯退者 先有以必楚之不退也 心欲戰而形若不欲戰하야 用以報德하고
用以驕敵하고 用以惑諸侯之心하고 用以作三軍之憤이라 一世爲其所眩惑而不自知하고
雖明智如左氏者로도 猶信其我退楚還我將何求之語하야 載之於書하니 信矣로다 文公之善譎也
文公之譎 夫豈一端而已哉리오 하니 果王者之師耶
利小則用信하고 利大則用暴하니 吾是以知文公之譎也로라 三罪而民服注+三罪而民服:하니 若欲自附於王者之刑矣
魏犫而屈法하니 果王者之刑耶
疏者則用法하고 愛者則用私하니 吾是以知文公之譎也로라 統而論之컨대 大則如託狩以召王이요
小則如이니 殆未易徧擧 要皆不能出夫子一字之外하니 聖人之言可畏也
嗚呼 文公之譎 所就者區區之霸業耳 其師一動 而子叢死於魯하고
子玉死於楚하고 叔武歂犬士榮元咺子適子儀死於衛鄕하니 若晉師不出이면 則是皆無罪之人也
至於若偏若禆 若輿若臺 膏潤原野하야 名不登於簡冊者 抑不知其百耶千耶萬耶 忍哉 文公之不仁也
雖然文公始欲譎人이나 而終不免爲人所譎이라 曹伯之當執當復 衛侯之當殺當釋 出於文公可也어늘
顧乃爲巫所譎而還曹伯하고 爲醫所譎而生衛侯 至於反衛侯於國하얀 則爲魯所餌하야 而使恩歸於魯注+曹伯之當執當復……而使恩歸於魯:僖公二十八年 晉人執衛侯歸之于京師 三十年 晉侯使醫衍酖衛侯 寗兪貨醫 使薄其酖 不死 公爲之請 納玉於王與晉侯皆十瑴 王許之 秋乃釋衛侯하니라
諸侯也 受其譎이라도 猶不足深愧어니와 孰謂巫醫下流其譎 又有在文公之上者耶
吾所以深爲文公愧하고 而益知譎之果不足恃也로라


나라가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붙다
나라가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붙다
僖公 26년, 가을에 나라는 자기들이 晉侯를 잘 대우하였다 하여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붙으니, 나라 令尹 子玉司馬 子西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하여 을 포위하였다.
楚子나라를 포위하려 하다’에서 ‘文公이 백성을 敎導結果이다’까지
僖公 27년, 楚子나라를 포위하려고 子文에게 에서 治兵하게 하니, 子文終朝治兵을 마치고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子玉에게 다시 에서 治兵하게 하니 子玉은 하루해가 다한 뒤에 마치고 일곱 사람에게 매질을 하고 화살로 세 사람의 귀를 꿰었다.
國老가 모두 子文에게 祝賀하니 子文이 그들에게 술을 대접하였다. 蔿賈는 아직 젊었는데 늦게 와서 축하도 하지 않거늘 子文이 그 까닭을 묻자
蔿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축하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子玉에게 國政을 전할 때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한다.’고 하셨는데, 國內는 안정된다 하더라도 國外에서 실패한다면 소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子玉의 실패는 당신의 薦擧 때문입니다. 國事를 실패할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무엇을 축하하란 말입니까? 子玉剛愎(퍅)하고 無禮하여 군대[]를 다스릴 수 없으니,
300 이상을 거느리고 出戰하면 군대를 온전히 거느리고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온전하게 거느리고 돌아온다면 〈그때에 가서 축하한들〉 무엇이 늦겠습니까?”
겨울에 楚子諸侯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서 나라를 포위하니 나라 公孫固나라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였다.
先軫은 “恩惠를 보답하고 患難을 구제하여 威嚴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일에 달렸습니다.”라 하고,
狐偃은 “나라가 비로소 나라를 얻었고 나라와 새로 婚姻을 맺었으므로 우리가 나라와 나라를 치면 나라는 반드시 이들을 救援할 것이니, 나라와 나라는 나라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라는 被廬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三軍을 편성하여 元帥를 누구로 삼을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趙衰가 말하였다. “郤縠이 좋습니다.”
이에 晉侯郤縠에게 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郤溱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狐偃에게 上軍을 거느리게 하니 〈狐偃이〉 狐毛에게 사양하고서 자신은 그의 보좌가 되었으며,
趙衰에게 하니 欒枝先軫에게 사양하거늘 欒枝에게 下軍을 거느리게 하고 先軫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荀林父에게 戎車를 몰게 하고 魏犨車右로 삼았다.
晉侯가 처음 歸國했을 때부터 백성들을 敎導하였는데, 〈교도한 지〉 2년 만에 文公이 이들을 사용해 戰爭하려 하니, 子犯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道義를 몰라 그 생활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에 文公出兵하여 襄王의 위치를 안정시키고 還國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政治에 힘을 쓰니, 백성들이 생활을 편안히 여겼다.
文公이 다시 이들을 사용해 전쟁하려 하니 子犯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信義를 몰라 施行할 방법을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에 文公을 쳐서 백성들에게 信義를 보이니, 物資交易하는 백성들이 많은 이익을 구하지 않고 약속한 말을 分明證據로 삼았다.
文公이 “이제 사용해도 되겠는가?”라고 하니 子犯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를 몰라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에 文公은 군사 훈련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를 보이고, 執秩를 설치하여 官爵의 등급을 바로잡으니, 백성들이 上司을 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뒤에 이들을 사용하여 에 주둔한 나라의 戍兵을 축출하고 나라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한 번 戰爭하여 霸業을 이루었으니 이는 文公이 백성을 敎導한 결과이다.
晉侯나라를 討伐하고자 하다’에서 ‘〈曹伯이〉 나라로 가서 諸侯會盟하다’까지
僖公 28년, 晉侯나라를 討伐하기 위해 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으나 衛人이 허락하지 않자,
길을 돌아 나라의 남쪽에서 黃河를 건너 나라를 侵攻하고 아울러 나라도 討伐하였다. 五鹿을 취하였다. 晉侯齊侯斂盂에서 結盟하였다.
이때 衛侯가 결맹에 참여하기를 요청하였으나 晉人이 허락하지 않았다. 晉侯나라를 포위하고서 3월 丙午日나라의 國都로 쳐들어가서 僖負羈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을 내려 그 家族를 면하게 하였으니, 이는 恩惠를 보답한 것이다.
이에 曹伯을 잡고, 나라와 나라의 땅을 나누어 宋人에게 주었다. 楚子으로 들어가 거주하면서 申叔에게는 에서 떠나게 하고,
子玉에게는 나라에서 떠나게 하며 말하였다. “晉軍을 추격하지 말라. 晉侯亡命하여 國外에 19년 동안 있었으나 끝내 나라를 얻었으니,
세상의 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빠짐없이 경험하였고, 백성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데다가 하늘이 그에게 壽命을 주었고 또 그의 害惡을 제거하였으니, 하늘이 세운 사람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폐할 수 있겠는가?”
子玉伯棼을 보내어 楚子에게 出戰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감히 기필코 공을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이용해[] 讒慝한 입을 막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楚王은 노하여 그에게 少數의 군대만 주었다. 文公은 이에 宛春나라에 억류하고, 또 은밀히 나라와 나라의 恢復을 허락하니 나라와 나라는 나라에 관계의 단절을 通告하였다.
子玉이 노하여 晉軍을 추격하니 晉軍이 후퇴하였다. 軍吏가 말하였다. “임금으로서 신하를 피하는 것은 恥辱이고, 또 楚軍出征한 지 오래여서 지쳤는데[] 무엇 때문에 후퇴하십니까?”
子犯이 말하였다. “군대는 名分이 바르면[] 士氣旺盛[]하고 名分이 바르지 못하면[] 士氣衰退[]하는 것이니, 어찌 出征久近에 달렸겠습니까? 지난날 나라의 은혜가 없었다면 임금님께서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3를 후퇴해 피하는 것은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에 晉軍이 3를 후퇴하였다. 楚軍이 추격을 멈추려 하니 子玉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에 晉侯가 군대를 거느리고서 城濮에 주둔하였는데, 楚軍이 험한 丘陵을 등지고 을 쳤다.
子玉鬪勃(나라 대부)을 나라 軍中으로 보내어 戰鬪를 요청하였다. 晉侯有莘의 언덕에 올라 군대를 査閱[觀師]하고는 “少長이 모두 가 있으니 쓸 만하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나무를 베어 兵器를 더 만들게 하였다.
己巳日晉軍莘北을 쳤다. 楚軍大敗하였다. 晉軍이 사흘 동안 주둔하며 楚軍이 버리고 간 軍糧을 먹고 癸酉日還軍하였다. 甲午日衡雍에 이르러서 踐土王宮을 지었다.
丁未日나라와의 戰爭에서 얻은 戰利品[]을 에게 바쳤다. 己酉日晉侯에게 단술을 대접하고, 이어 晉侯에게 를 명하였다.
尹氏王子虎內史 叔興父에게 명하여 晉侯策命하여 侯伯으로 삼게 하고서,
大輅服裝戎輅의 복장과 彤弓 하나와 彤矢 백 개와 玈弓矢 천 개와 秬鬯 한 통과 虎賁 3백 명을 下賜하면서 말하였다.
大輅圖大輅圖
叔父에게 이르노니 삼가 王命에 복종하여 사방의 諸侯安撫하고 에게 잘못하는 자들을 다스리라.”
晉侯는 세 번 사양한 뒤에 王命을 받아들이며 “重耳는 감히 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天子의 크고 밝으신 아름다운 을 받들어 宣揚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 策命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晉侯는 와서 돌아갈 때까지 모두 세 차례 天子謁見하였다.
衛侯楚軍敗戰했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서 나라로 出奔하였다가 드디어 나라로 가서 元咺을 보내어 叔武를 받들고 〈王庭으로 가서〉 盟約을 접수하게 하였다.
癸亥日王子 諸侯들과 王庭에서 맹약하였다. 맹약하기를 “모두 王室을 도와 서로 해치지 말라.
이 맹약을 어기면 明神이 벌을 내려 그 군대를 失墜시켜 國家享有하지 못하게 하고, 너의 玄孫에 이르기까지 老少할 것 없이 〈모두 災殃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君子는 이 맹약을 두고 “信義에 맞았다.”고 하고, 또 “나라가 이번 전쟁에 으로써 進攻하였다.”고 하였다.
城濮의 전쟁 때 나라의 中軍이 늪지대에서 큰바람을 만나 大旆左旃을 잃었다.
祁瞞軍令했다 하여 司馬가 그를 죽여 諸侯 軍中에 조리돌리고서 茅茷에게 그 職務를 대신하게
하였다. 晉軍還軍하여 河水를 건넜다. 舟之僑가 먼저 돌아가니 士會車右代行하였다.
7월에 振旅하여 凱旋樂을 울리며 나라 國都로 들어와서, 宗廟하고 飮至하고서 크게 상을 내리고 諸侯들을 불러 두마음 품은 나라를 討伐하게 하고
舟之僑를 죽여 全國에 조리돌리니 백성들이 크게 복종하였다. 君子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評論하였다. “文公刑罰을 잘 시행하였다. 세 罪人을 죽이니 백성들이 복종하였다.”
겨울에 에서 회합하였으니, 이는 服從하지 않는 나라를 懲罰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會合晉侯을 불러 諸侯를 거느리고 朝見하고, 또 에게 사냥하게 하였다.注+나라와 나라를 討伐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 仲尼는 “신하로서 임금을 부른 것은 敎訓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에 “天王河陽에서 사냥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이 사냥할 땅이 아님을 말한 것이고, 또 文公을 밝힌 것이다.
晉侯가 병이 들자 (曹伯小臣) 侯獳筮史에게 뇌물을 주어, 〈병이 생긴 원인을〉 나라를 멸망시켰기 때문으로 풀이하게 하였다. 〈이에 筮史晉侯에게〉 “ 桓公會盟하여 異姓諸侯하였는데,
지금 께서는 회맹하여 同姓 諸侯하셨습니다. 曹叔 振鐸文王의 아들이고 先君 唐叔武王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또 諸侯會合하여 兄弟의 나라를 擊滅하는 것은 가 아니고, 〈나라와〉 나라를 함께 회복시키겠다고 명해놓고서 함께 회복시키지 않은 것은 이 아니며, 같은 을 달리하는 것은 이 아닙니다.
로써 를 행하고 으로써 를 지키며 으로써 邪惡을 바로잡는 것이니, 이 세 가지를 버리고서 께서는 장차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라고 하니, 은 기뻐하여 曹伯復位시켰다. 曹伯은 드디어 나라로 가서 諸侯會盟하였다.
門戶樞機가 있고 말에도 樞機가 있으며, 射箭에 표적이 있고 말에도 표적이 있으며, 백정은 짐승의 몸 구조를 파악함이 있고 말에도 脈理를 파악함이 있다.
한번 그 樞機을 얻으면 천만 개의 문호를 모두 열 수 있으며, 한번 그 표적을 격파하면 천만 개의 화살을 모두 폐기해야 하며, 한번 그 맥리를 理會하면 만 가지 이치가 모두 풀린다.
千世 동안 해결하지 못한 것과 百家가 결정하지 못한 것과 각종 논설이 포괄하지 못한 것들을 성인은 한 글자로 折中하고 전부를 포괄하여 빠뜨리는 것이 없으니, 이는 과연 무슨 方術인가?
대체로 運轉하는 것은 樞機이고 貫穿하는 것은 標的이고 의거하는 것은 그 이치를 體會하였기 때문이다.
文公諸侯霸者가 되었을 때에 행했던 計謀政刑征伐盟會에 대하여 後世 학자들에게 그 是非論定하게 한다면,
반드시 조목별로 자세히 진술하기를 “이것은 하고 저것은 不善하며, 이것은 우월하고 저것은 저열하며, 이것은 공교하고 저것은 졸렬하였다.”라고 장황하게 서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오히려 그 是非를 다 거론하지 못했을 것인데, 우리 夫子께서는 ‘’이란 한 글자로써 文公을 단정하셨다.
’이란 한 글자의 含意를 음미하여 文公의 일생의 〈행위를 비추어보면〉 천 개의 근원과 만 개의 물결이 滔滔히 흐르고 汨汨히 흘러 모두 하나의 ‘ 안으로 달려가서 動容周旋橫斜曲直이 가는 곳마다 이 아님이 없다.
그중에 더욱 드러난 일을 뽑아서 評論하면, 나라와 나라는 모두 文公에게 恩德이 있는 나라이다. 두 나라의 은혜를 동시에 받았으니 두 나라의 은덕을 똑같이 갚음이 마땅하다.
어찌 치우치게 돕는 바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文公의 마음에는 ‘나라는 약소국이니 전일에 우리에게 은덕을 베푼 일로 인해 우리를 친근하게 여길 것이고, 나라는 강대국이니 전일에 우리에게 은덕을 베푼 일을 믿고서 우리를 업신여길 것이다.
지금 나라가 나라를 攻伐하니, 우리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운다면 나라를 도와주어 우리를 친근하게 대한 마음을 후하게 보답하고, 나라를 좌절시켜 우리를 업신여기는 기세를 꺾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가 바야흐로 霸業을 도모하면서 나라가 횡행하는 것을 좌시하고 감히 따지지 않는다면 霸權나라 있고 나라에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나라를 攻伐[加兵]한다면 천하의 제후들은 반드시 우리 나라가 은혜와 언약을 저버렸다고 할 것이니, 그 누가 우리를 돕겠는가?’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楚軍을 공격하지 않고 楚軍이 반드시 구원할 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나라를 공격하거나 나라를 공격한다면 모두 나라가 친근히 여기는 나라이니, 겉으로는 나라를 저버리는 惡名이 없고 안으로는 나라를 激怒시키는 실상이 있을 것이다.
전쟁의 꼬투리가 楚軍에게서 발생하고 우리에게서 발생하지 않게 하여, 楚軍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린 뒤에 천천히 일어나 應戰한다면 비록 나라를 擊破하더라도 은혜를 저버렸다는 惡名이 없을 것이니, 文公의 계책이 狡譎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가장 狡譎한 것이 아니다. 文公이 내세운 名目나라를 구원하는 것이었으나, 本心은 실로 나라와 싸워 승리하는 데 있었다. 이때 천하의 強國나라와 나라였으니,
반드시 먼저 나라의 鋒芒(세력)을 꺾은 뒤에야 나라가 홀로 天下霸者가 될 수 있었다. 楚王은 본래 전쟁하기를 싫어하였으니, 나라에 패려궂고 사나워 전쟁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오직 子玉 한 사람뿐이었다.
만약 나라를 심하게 격노시키지 않으면 楚軍은 아마도 어려움을 알고 물러갈 것이니 나라와 나라의 雌雄(勝負)은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曹伯을 잡고, 나라와 나라의 땅을 나누어 나라에 준 것은 나라를 심하게 격노시켜 전쟁을 재촉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文公本意나라를 구원하는 것이었다면 〈나라의 大夫宛春使臣으로 와서 〈衛侯를 회복시키고 나라를 해주면 우리도 나라의 포위를 풀겠다고 했을 때에〉 반드시 흔연히 따랐을 것이다.
어째서냐 하면, 당초에 晉軍나라와 나라를 친 것은 본래 나라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으니, 이제 나라가 과연 나라와 나라를 친애하기 때문에 나라의 포위를 풀었다면 이는 우리()의 欲望에 맞춰준 것이다.
우리()는 나라와 나라를 회복시켜주고 저()는 나라의 포위를 풀어준다면 두 나라가 모두 각자의 욕망을 얻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허락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文公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宛春을 체포하여 모욕을 주고,
또 사사로이 나라와 나라의 회복을 허락하여 나라에 挑戰하게 하여, 오직 楚王을 격노시켜도 노하지 않고 노하고도 전쟁을 하지 않을까만을 우려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이 과연 나라와 전쟁해 승리하는 데 있고 나라를 구원하는 데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文公나라를 구원한 줄만 알 뿐이니, 누가 그의 심한 狡譎이 끝내 여기에 이른 줄을 알겠는가?
90리(3)를 물러난 일에 이르러서는 그의 狡譎함이 더욱 심하다. 나라는 본래 나라와 경쟁할 마음이 없었는데도 文公이 온갖 방법으로 楚軍을 격노시키고 나라를 핍박하여 전쟁을 하게 하니,
비록 子玉이 잠시의 분노를 참지 못해 〈應戰하였으나〉 위로 楚王에서부터 아래로 士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논하면 비록 楚軍車馬士卒이 도주하더라도 오히려 楚軍을 놓칠까 우려할 것인데, 하물며 90리를 물러나 피하여, 子玉으로 하여금 이를 핑계삼아 班師(回軍)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게 하였겠는가?
文公은 본래 子玉의 행위가 이미 자기가 예상한 범위 이내에 있어서, ‘子玉은 마음속으로 蒍賈의 비방에 한을 품고서 을 세워 그 치욕을 씻기에 급하여,
우리가 물러나 피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脆弱한 적을 만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겨, 功業을 쉽게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보다 좋은 때가 없다고 여길 것이니, 비록 우리(晉軍)가 3백 리(10)를 물러나도 오히려 추격할 것인데 하물며 90리겠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文公이 기꺼이 90리를 물러난 것은 楚軍이 반드시 물러가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는 전쟁을 원하면서 겉으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여 이로써 恩德을 갚고,
이로써 을 교만하게 하고, 이로써 諸侯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이로써 三軍憤愾心을 진작시켰다. 온 세상이 그에게 현혹되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고,
左氏처럼 밝은 지혜를 지닌 분도 오히려 “우리가 물러난 뒤에 楚軍도 돌아간다면 우리가 장차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한 文公의 말을 믿고서 ≪春秋左氏傳≫에 기재하기까지 하였으니, 文公狡譎을 잘하였음이 진실이로다.
文公狡譎함이 어찌 한 가지뿐이겠는가? 3일 동안 〈포위했으나 항복하지 않자〉 에서 撤軍하였으니, 〈자신의 행위를〉 王軍의 행위에 비교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무덤을 파헤쳐 나라를 위협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王軍의 행위인가?
이익이 작으면 신의를 지키고 이익이 크면 暴力을 썼으니 나는 이로써 文公狡譎했음을 알았다. 顚頡祁瞞舟之僑 등 세 사람을 처형하자 백성들이 信服하였으니,注+三罪는〉 顚頡祁瞞舟之僑 등 〈세 사람을 처형한 것이다.〉 〈자신의 行刑을〉 王者行刑에 비교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뒤에 魏犫를 용서하여 을 굽혔으니 이것이 과연 王者行刑인가?
소원한 자에게는 을 쓰고, 친애하는 자에게는 私情을 썼으니 나는 이로써 文公狡譎했음을 알았다. 통틀어 논하면 큰 狡譎은 사냥을 핑계로 周王을 부른 것이고,
작은 교휼은 兵車에 섶[]을 매달고 달려 〈逃走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에게 해를 끼친 것이다. 이런 일들이 하도 많아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요컨대 모두 夫子께서 말씀하신 한 ‘를 벗어나지 않으니, 성인의 말씀은 〈참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
아! 文公狡譎이 성취한 것은 보잘것없는 霸業일 뿐이다. 그 군대가 한 번 출동하자 子叢魯君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子玉나라에서 自殺하였으며, 叔武歂犬士榮元咺子適子儀衛鄕에서 죽었다. 만약 晉軍이 출동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모두 無罪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偏禆(副將)와 輿臺(賤人)들로 기름진 草原에서 죽어 이름이 簡冊登載되지 않은 자들은 또 몇 백인지 몇 천인지 몇 만인지를 알 수 없으니, 잔인하도다! 文公不仁함이여!
비록 그러나 文公이 처음에는 남을 속이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남에게 속임을 당함을 면치 못하였다. 曹伯을 잡고 회복시키는 일과, 衛侯를 죽이고 풀어주는 일이 文公에게서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筮史에게 속임을 당해 曹伯封地를 돌려주고, 醫生에게 속임을 당해 衛侯를 살려주었다. 衛侯나라로 돌려보낸 것으로 말하면 僖公의 뇌물에 낚여 〈衛侯로 하여금〉 은혜를 나라에 돌리게 하였다.注+僖公 28년에 晉人衛侯를 잡아 京師로 보냈다. 30년에 晉侯醫員 을 보내어 衛侯鴆殺하게 하였다. 寗兪醫員에게 뇌물을 주어 鴆毒을 약하게 타게 하니 죽지 않았다. 僖公衛侯의 석방을 청하며 晉侯에게 모두 열 쌍의 을 바치니 이 석방을 허락하였다. 가을에 衛侯를 석방하였다.
나라는 諸侯이니 속임을 당해도 크게 부끄러울 게 없지만, 천한 筮史醫員狡譎이 또 文公의 윗길일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文公을 위해 매우 부끄러워하고, 또 狡譎이 과연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노라.


역주
역주1 秋 宋以其善於晉侯也 : 重耳가 出奔하였을 때 宋 襄公이 그에게 말 20乘을 준 것을 이른다.
역주2 楚子將圍宋 : 宋나라가 楚나라를 배반하고 晉나라에 붙었기 때문에 楚나라가 宋나라를 포위하려 한 것이다.〈杜注〉
역주3 使子文治兵於睽 : 子文이 이때 令尹이 아니었기 때문에 ‘使’라고 한 것이다. 治兵(군사 훈련)은 號令을 익히는 것이다. 睽는 楚나라 邑이다.〈杜注〉
역주4 終朝而畢 不戮一人 : 終朝는 새벽부터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이다. 子文은 子玉에게 重任을 맡기고자 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일을 대충 처리한 것이다.〈杜注〉
역주5 子玉復治兵於蔿 : 子玉이 楚나라의 令尹이었기 때문에 다시 治兵한 것이다. 蔿는 楚나라 邑이다.〈杜注〉
역주6 貫三人耳 : 화살로 그 귀를 꿴 것이다.〈附注〉
역주7 國老皆賀子文 子文飮之酒 : 國老는 벼슬에서 물러난 卿大夫이다. 子文이 子玉을 令尹이 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가 적임자를 천거한 것을 축하한 것이다.〈杜注〉
역주8 蔿賈尙幼 後至不賀 : 蔿賈는 伯嬴으로 孫叔敖의 아버지이다. 幼는 少(나이가 어림)이다.〈杜注〉
역주9 子之傳政於子玉 曰以靖國也 : 僖公 23년에 子文이 叔伯에게 대답한 말을 말한 것이다.〈附注〉
역주10 靖諸內而敗諸外 : 蔿賈는 子玉이 반드시 실패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비록 國內는 안정되지만 國外에서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한 것이다.〈附注〉
역주11 所獲幾何 : 얻는 것이 잃는 것을 補償할 수 없다는 말이다.〈附注〉
역주12 其不能以入矣 : 군대를 온전하게 거느리고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다.
역주13 宋公孫固 : 宋 莊公의 손자이다.
역주14 先軫曰 報施救患 : 先軫은 晉나라 下軍의 佐(副將) 原軫이다. 報施는 말 20乘을 주었던 宋나라의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다.
역주15 而新昏於衛 : 曹 共公이 비로소 楚나라에 복종한 것이다.〈附注〉
역주16 若伐曹衛……則齊宋免矣 : 去年에 楚나라가 申叔을 보내어 穀을 지키게 하여 齊나라를 逼迫하였고, 금년에 楚나라가 宋나라를 포위하였으니, 晉나라가 曹나라와 衛나라를 치면 楚나라는 반드시 宋나라의 포위와 穀의 守備를 풀고 달려가서 曹나라와 衛나라를 救援할 것이므로 齊나라와 宋나라가 벗어난다고 한 것이다.〈附注〉
역주17 於是乎蒐于被廬 : 晉나라는 항상 봄에 蒐禮(閱兵式)를 거행하고 政令을 고쳐 한 해의 시작을 경건히 하였다. 被廬는 晉나라 땅이다.〈杜注〉
역주18 狐毛 : 狐偃의 兄이다.
역주19 欒枝 : 欒貞子인데, 欒賓의 손자이다.
역주20 荀林父御戎 : 荀林父는 中行桓子이다. 御戎은 文公의 戎車를 모는 것이다.〈附注〉
역주21 晉侯始入 : 僖公 24년에 歸國하였다.
역주22 民未知義 未安其居 : 義理가 없으면 目前의 安逸만을 탐하여 구차하게 산다.〈杜注〉
역주23 於是乎出定襄王 : 僖公 25년에 襄王의 위치를 안정시켜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보였다.〈杜注〉
역주24 入務利民 民懷生矣 : 백성들이 모두 故鄕을 떠나지 않고 편안히 살며 生活의 즐거움을 안다는 말이다.〈附注〉
역주25 民未知信 未宣其用 : 用은 施行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아직 信義를 모르기 때문에 施用하는 방법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左氏會箋≫)
역주26 民易資者 不求豐焉 : 속임수를 써서 많은 이익을 구하지 않은 것이다.
역주27 明徵其辭 : 契約書와 言約을 모두 분명히 한 것이다.〈附注〉
역주28 未生其共 : 아직 윗사람에게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말이다.〈附注〉
역주29 於是乎大蒐以示之禮 : 蒐(訓鍊)는 長幼의 순서를 정하고 貴賤의 등급을 밝히는 것이다.〈杜注〉
역주30 作執秩以正其官 : 執秩은 爵秩(官爵과 祿俸)을 주관하는 官職이다.〈杜注〉
역주31 民聽不惑 而後用之 : 聽은 聽從의 뜻으로 시키는 대로 順從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義‧信‧禮를 알면 윗사람의 命을 따르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附注〉
역주32 出穀戍 釋宋圍 : 楚子가 申叔에게 穀을 떠나게 하고, 子玉에게 宋나라를 떠나게 한 것이다.〈杜注〉
역주33 一戰而霸 文之敎也 : 一戰은 明年의 城濮의 戰爭을 이른 것이다. 晉侯가 文德으로 백성을 敎導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附注〉
역주34 晉侯將伐曹 假道于衛 : 曹나라가 衛나라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길을 빌리려 한 것이다.〈杜注〉
역주35 自南河濟 : 汲郡 남쪽에서 渡河하여 衛나라의 남쪽으로 나와 동쪽으로 간 것이다.〈杜注〉
역주36 侵曹伐衛 : 내가 고찰하건대 曹나라를 侵攻한 것은 觀狀한 怨恨을 갚기 위함이고, 衛나라를 討伐한 것은 흙덩이를 준[與塊] 羞恥를 씻기 위함이었다.〈附注〉 觀狀과 與塊는 僖公 23년 傳에 보인다. 觀狀은 文公이 亡命하여 여러 나라를 떠돌 때 曹伯이 목욕하는 文公의 알몸을 훔쳐본 일이고, 與塊는 衛나라 五鹿에서 野人이 먹을 것을 구걸한 文公에게 흙덩이를 준 일이다.
역주37 五鹿 : 衛나라 땅이다.
역주38 晉侯齊侯盟于斂盂 : 斂盂는 衛나라 땅이다. 齊侯가 穀을 수비하고 있는 楚軍의 逼迫 때문에 晉侯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附注〉
역주39 報施也 : 밥 속에 구슬을 넣어주었던 은혜를 보답한 것이다.〈杜注〉
역주40 分曹衛之田以畀宋人 : 이것은 모두 楚나라의 부아를 돋우기 위함이다.〈附注〉
역주41 晉侯在外十九年矣 而果得晉國 : 晉侯가 17세에 亡命하였고 망명한 지 19년 만에 돌아왔으니 모두 36년이다. 이때는 그의 나이 40세였다.〈杜注〉
역주42 險阻艱難 備嘗之矣 : 險難한 일을 빠짐없이 경험하면 마음이 견고해진다.〈杜注〉
역주43 天假之年 : 獻公의 아들 9人 중에 오직 文公만이 살아 있기 때문에 하늘이 壽命을 주었다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44 而除其害 : 惠公‧懷公과 呂甥‧郤芮를 제거한 것을 이른다.〈杜注〉
역주45 子玉使伯棼請戰 : 伯棼은 子越椒로 鬪伯比의 손자이다. 出戰을 청한 것은 晉나라와 전쟁할 수 있도록 군대의 增員을 요구한 것이다.〈附注〉
역주46 願以間執讒慝之口 : 間執은 塞(막음)과 같다. 讒慝(蔑視해서 헐뜯는 말)은 “子玉이 3백 乘을 거느리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고 한 蔿賈의 말을 이름이다.〈杜注〉
역주47 子玉怒 從晉師 : 子玉이 怒하여 宋나라의 포위를 풀고 晉軍과 싸우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역주48 微楚之惠 不及此 : 重耳가 楚나라를 지날 때 楚 成王이 贈送(이별할 때 財物을 주어 보내는 것)한 은혜가 있었다.〈杜注〉
역주49 退三舍辟之 所以報也 : 1舍가 30리이다. 과거에 楚子가 ‘公子가 만약 晉나라로 돌아가 임금이 된다면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에 重耳는 3舍를 피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退三舍’를 보답으로 여긴 것이다.〈杜注〉
역주50 晉侯登有莘之虛以觀師曰 少長有禮 : 有莘은 옛날의 나라 이름이다. 少長은 大小란 말과 같다.〈杜注〉
역주51 遂伐其木 以益其兵 : 나무를 베어 전쟁에 필요한 器具를 더 만들어 보탠 것이니, 兵車에 매달고 달려 먼지가 일게 하는 섶[柴]도 그중의 하나이다.〈杜注〉
역주52 莘北 : 城濮이다.
역주53 晉師三日館穀 : 館은 駐屯이다. 3일 동안 楚軍의 穀食을 먹은 것이다.〈杜注〉
역주54 至于衡雍 作王宮于踐土 : 衡雍은 鄭나라 땅인데, 지금의 熒陽 卷縣이다. 晉軍이 勝戰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襄王이 직접 가서 위로하였기 때문에 王宮을 지은 것이다.〈杜注〉
역주55 王享醴 命晉侯宥 : 단술을 대접한 뒤에 또 束帛을 내려 晉侯의 기쁨을 돕도록 명하여 厚待의 뜻을 보인 것이다.〈杜注〉
역주56 王命尹氏及王子虎……策命晉侯爲侯伯 : 策命은 辭令狀을 주어 임명하는 것이다. 策命하여 晉侯를 侯伯으로 삼은 것이다. ≪周禮≫에 ‘九命作伯’이라고 하였다. 尹氏와 王子虎는 모두 周나라의 卿士이고, 叔興父는 大夫이다. 이 세 高官을 시켜 策命하게 한 것은 晉侯를 寵愛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杜注〉
역주57 賜之大輅之服 戎輅之服 : 大輅는 金輅이고 戎輅는 戎車인데, 이 두 輅에는 각각 입는 服裝이 따로 있다.〈杜注〉 大輅는 祭祀 때 타는 수레인데 그 服裝은 鷩冕이고, 戎輅는 兵事가 있을 때 타는 수레인데 그 복장은 韋弁이다.〈附注〉 鷩冕은 鷩衣와 冕旒冠으로 天子와 諸侯의 命服이다. 鷩은 꿩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鷩服의 上衣에는 鷩‧火‧宗彛(호랑이)를 그리고 下裳에는 藻‧粉米‧黼‧黻을 수놓는다. 韋弁은 熟皮로 만들어 붉은 칠을 한 모자로 天子와 諸侯가 전쟁 때 착용하는 服裝이다.
역주58 彤弓一……玈(려)弓矢千 : 彤은 赤弓이고, 玈는 黑弓이다. 활 한 자루에 살 백 대씩을 주니, 살이 천 대면 활은 열 자루이다. 諸侯가 弓矢를 下賜받은 뒤에야 征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杜注〉
역주59 秬鬯一卣 : 秬鬯은 검은 기장에 香草를 섞어 빚은 鬱鬯酒인데, 제사 지낼 때 이 술을 땅에 부어 神을 降臨케 한다.
역주60 虎賁三百人 : ≪周禮≫에 “虎賁氏가 虎士 3백 인을 거느리고 앞뒤에서 王을 趨從한다.”고 하였다. 侯伯으로서는 晉 文公이 처음으로 虎賁을 下賜받은 것이다.〈附注〉
역주61 王謂叔父……糾逖王慝 : 이것은 任命狀에 기록된 말이다. 逖은 遠이니, 王에게 잘못하는 자들을 糾察해 멀리 추방하라는 말이다.〈杜注〉 〈杜注〉에는 逖을 遠으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楊伯峻의 ≪春秋左傳注≫를 취하여 ‘治’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62 晉侯三辭 從命 : 策命을 세 번 사양한 뒤에 天子의 命을 받아들인 것이다.〈附注〉
역주63 奉揚天子之丕顯休命 : 稽首는 머리가 땅에 닿는 것이다. 丕는 大이고, 休는 美이다.〈杜注〉
역주64 出入三覲 : 出入은 去來와 같으니, 올 때부터 갈 때까지 모두 세 차례 王을 謁見했다는 말이다. 세 차례의 謁見은 戰利品을 바칠 때가 첫 번째 알현이고, 단술을 접대받을 때가 두 번째 알현이고, 策命을 받고 떠날 때가 세 번째 알현이다.
역주65 使元咺(훤)奉叔武以受盟 : 奉은 叔武에게 임금의 일을 代行하게 한 것이다.〈杜注〉
역주66 要言 : 載書에 기록한 盟約의 말이다.〈附注〉
역주67 (其)[而] : 저본에는 ‘其’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而’로 바로잡았다.
역주68 謂晉於是役也 能以德攻 : 文德으로 백성을 가르친 뒤에 사용한 것을 말한다.〈杜注〉
역주69 晉中軍風于澤 : 牛馬가 바람으로 인해 달아나서 牛馬를 모두 잃은 것이다.〈杜注〉 牛馬의 암수가 서로 유인하는 것을 ‘風’이라 한다.〈附注〉 晉軍이 늪지대를 지나다가 큰바람을 만난 것이다. 傳文에 ‘牛馬’란 말이 없는데, 牛馬를 잃었다고 한 〈杜注〉와 ‘風’을 牛馬의 바람으로 해석한 〈附注〉가 모두 옳지 않다.
역주70 亡大旆之左旃 : 大旆는 旗名이다. 깃 가에 술을 붙인 것을 ‘旆’라 하고, 아무 무늬가 없는 통폭 천으로 만든 것을 ‘旃’이라 한다.〈杜注〉 大旆의 左旃은 前軍의 左旃이다.
역주71 祁瞞奸命 : 祁瞞은 牛馬와 旗旆를 맡은 자로 이것들을 모두 잃었으니, 軍令를 범한 것이다.〈附注〉
역주72 司馬 : 法을 맡은 軍職이다.
역주73 士會攝右 : 임시로 舟之僑의 직무를 代行한 것이다. 士會는 隨武子로 士蔿의 손자이다.
역주74 振旅 愷以入于晉 : 군대가 나가는 것을 ‘治兵’이라 하고, 들어오는 것을 ‘振旅’라 하는데, 여기서는 勝戰하고 돌아오는 뜻으로 쓰였다. 愷는 音樂이다.
역주75 獻俘授馘 : 俘는 생포한 敵軍이고, 馘은 죽인 敵軍의 귀를 벤 것이다. 獻과 授는 모두 告의 뜻이다.
역주76 徵會討貳 : 諸侯를 徵召한 것은 장차 겨울에 溫에서 會合하기 위함이다. 討貳는 두마음 품은 諸侯를 토벌한 것이다.〈附注〉
역주77 殺舟之僑以徇于國 : 군대를 버리고 먼저 돌아간 罪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懲罰해 죽인 것이다.〈附注〉
역주78 三罪 : 세 罪人은 顚頡‧祁瞞‧舟之僑이다.
역주79 是會也……且使王狩 : ≪春秋左傳正義≫에 의하면 晉侯의 本心은 諸侯를 대대적으로 모아 함께 天子를 섬기는 것을 신하의 名分과 道義로 삼고자 한 것이고, 실로 天子의 자리를 엿보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 周나라 王室이 이미 쇠퇴하여 天子가 미약하였으니, 갑자기 아홉 나라의 군대 수십만을 거느리고 京師로 가서 天子을 謁見한다면 簒奪하려는 意圖가 있는 것으로 誤認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周나라로 가지 않고 王이 오도록 불렀다는 뜻이다.
역주80 故書曰……言非其地也 : 마치 天子가 스스로 사냥을 나왔고, 사냥한 장소만이 합당한 장소가 아닌 것처럼 글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河陽’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河陽은 실로 晉나라에 속한 땅이니 王이 사냥할 곳이 아니다.
역주81 且明德也 : 王을 부른 晉侯의 잘못은 숨기고 晉나라의 功德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의심스러운 義理이기 때문에 특별히 仲尼를 칭하여 밝힌 것이다.〈杜注〉
역주82 (竪)[豎]侯(孺)[獳] : 저본에는 ‘竪侯孺’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豎侯獳’로 바로잡았다.
역주83 (竪)[豎]侯(孺)[獳] 貨筮史 : 豎는 內外의 交通을 맡은 자이다. 史는 晉나라의 史이다.
역주84 以曹爲解 : 曹나라를 멸망시킨 일로 曹나라 先君의 神이 災殃을 내려 병이 생긴 것으로 풀이하라는 말이다.
역주85 齊桓公爲會而封異姓 : 邢나라와 衛나라를 封해준 것을 이른다.
역주86 曹叔振鐸 文之昭也 : 曹叔 振鐸은 曹나라에 처음 봉해진 임금으로 文王의 아들이다.〈杜注〉
역주87 與衛偕命 : 은밀히 曹나라와 衛나라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허락한 것을 이른다.〈杜注〉
역주88 非刑也 : 公正한 刑罰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89 遂會諸侯(圍)[于]許 : 復位된 曹伯은 曹나라로 가지 않고 즉시 許나라로 가서 晉侯가 주도한 會盟에 참여한 것이다.
역주90 (圍)[于] : 저본에는 ‘圍’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于’로 바로잡았다.
역주91 (道)[屠]有會 : 屠는 백정이고 會는 心會(마음속으로 파악함)이니, 곧 짐승을 屠殺해 解體하는 백정은 마음속으로 짐승의 관절과 觔骨 등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다.
역주92 (道)[屠] : 저본에는 ‘道’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屠’로 바로잡았다.
역주93 條陳縷數 : 조목별로 진술하고 자세히 셈이다.
역주94 累牘聯簡 : 문장이 장황하고 긺을 이른다.
역주95 夫子斷之一字曰 譎而已 : ≪論語≫ 〈憲問〉에 “晉 文公은 狡譎하고 정직하지 않았다.[晉文公譎而不正]”란 말이 보인다. 譎은 權謀術數 등 부정한 속임수를 이른다.
역주96 千源萬派……無往非譎 : 千源萬派는 晉 文公의 發想을 이르고, 滔滔汨汨은 그 발상이 행위로 진행됨을 이르고, 動容周旋은 행동거지와 揖讓進退를 이르고, 橫斜曲直은 행위의 모든 것을 이르니, 곧 晉 文公의 모든 행위는 시작부터 끝까지 狡譎이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역주97 楚與宋 皆有德於文公者也 : 晉 文公이 公子로서 出奔하여 여러 나라를 주유할 적에 宋나라에 들르니 宋 襄公이 晉 公子에게 말 20乘(80匹)을 증여한 일과, 楚 成王이 연회를 열어 晉 公子를 접대하면서 후일에 晉나라로 돌아가서 임금이 된다면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느냐고 묻자, 晉 公子가 “晉나라와 楚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서 中原에서 만났을 때에 楚君을 위해 3舍(90리)를 물러나겠다.”고 한 일을 이른다.(≪春秋左氏傳≫ 僖公 23년)
역주98 三日而去原……然毁丘墓以脅曹 : 僖公 28년에 晉侯가 曹나라를 포위하고서 城門을 공격할 때 晉軍이 많이 죽으니, 曹人이 晉軍의 屍身을 城 위에 늘어놓았다. 晉侯가 이를 근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계획을 물으니 “군대를 曹나라의 墓地로 옮겨 駐屯시키라.”고 하였다. 晉侯가 이 말에 따라 군대를 옮기니, 曹人은 〈자기들 조상의 무덤을 훼손할 것을〉 두려워하여 늘어놓았던 晉軍의 시신을 棺에 넣어 성 밖으로 내보냈다. 晉軍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해 曹나라를 공격하여 3월 丙午日에 曹나라에 입성한 일을 이른다.
역주99 顚頡祁瞞舟之僑 : 이 세 사람을 처형한 것은 ≪春秋左氏傳≫ 僖公 28년에 보인다.
역주100 然(後)[舍]魏犫(주)而屈法 : 僖負羈의 집을 불태우다가 魏犨가 가슴을 다치자 文公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힘이 아까워 사람을 보내 그를 慰問하게 하고 그의 負傷을 살피게 하여 부상이 심하면 죽이게 하였다. 魏犨가 가슴을 동여매고 나와서 使者를 보고 말하기를 “임금님의 福으로 그대가 보기에 내가 편안하지 않은가?”라고 하고서 높이뛰기를 세 차례, 멀리뛰기를 세 차례 하니, 그는 용서하고 顚頡만을 죽인 일을 이른다.(≪春秋左氏傳≫ 僖公 28년)
역주101 (後)[舍] : 저본에는 ‘後’로 되어 있으나,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舍’로 바로잡았다.
역주102 曳柴以誤敵 : 僖公 28년에 있었던 城濮의 전쟁에 晉軍이 수레 뒤에 섶을 매달고 달려 먼지를 일으켜 마치 도망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楚軍을 속여 승리한 것을 이른다.

동래박의(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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