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生之謂性
이니 性卽氣, 氣卽性
이 生之謂也
注+問生之謂性과 與天命之謂性이 同乎잇가 程子曰 性字를 不可一槪論이라 生之謂性은 止訓所稟受也요 天命之謂性은 此言性之理也니라 ○ 問氣質之說이 起於何人이닛고 朱子曰 此起於張程하시니 極有功於聖門이요 有補於後學이니라라
人之有生
이 氣聚成形
에 理因具焉
하니 是之謂性
注+按 生之謂性은 告子語也인대 程子以性卽氣, 氣卽性으로 釋之也라 故朱子曰 此程子所以發明告子生之謂性之說하야 而以性卽氣, 氣卽性者로 言之也라 謂人生以後라야 方可謂之性이니 言性時엔 已帶氣矣라 性與氣를 不可分而爲二니 此性字는 乃氣質之性也어늘 葉氏所謂理因具焉하니 是之謂性者는 此以理言也니 釋生之謂性이 似不襯切이로다이니 性與氣 本不相離也
라
[張伯行 註]此是程子兼理與氣以言性
이니 正與孟子性善之旨
로 互相發明
이요 而非如
之說也
라
人生而成形에 氣與理俱하야 而受之以爲在我之性이라
則言性에 離不得氣하니 性卽氣也요 言氣에 離不得性하니 氣卽性也로되
若告子所云은 則遺理言氣하야 專以有生之知覺運動者로 爲性하니 詞同而意縣矣니라
21-2 人生氣稟
이 理有善惡
이나 然不是性中
에 元有此兩物
이 相對而生也
注+朱子曰 理는 只作合字看이니라니라
氣稟雜揉에 善惡由分이니 此亦理之所有나 然原是性之本이면 則善而已요 非性中에 元有善惡二者並生也니라
本註云 后稷之克岐克
注+詩經大雅生民篇曰 誕實匍匐하야 克岐克嶷이라하니라과 子越椒
注+左傳宣公四年에 楚司馬子良이 生子越椒한대 子文曰 必殺之하라 是子也熊虎之狀而豺狼之聲하니 不殺이면 必滅若敖氏라하니라始生
에 人知其必滅若敖氏之類
니라
善惡이 皆天理니 謂之惡者本非惡이라 但或過或不及하야 便如此니라
天下
에 無性外之物
하니 本皆善而流於惡
注+按 程朱兩說이 只言其本善而流惡耳라 如朱子所謂因氣偏하야 此性이 爲惡所汨하니 如水爲泥沙所混이나 不成不喚做水等語니 於惡亦不可不謂之性에 意極分曉니라耳
니라
愚謂 原天命賦予之初컨대 固有善而無惡이어니와 及氣稟拘滯之後하야는 則其惡者를 謂非性之本然則可커니와 謂之非性則不可하니
21-5 蓋
注+朱子曰 性은 須是箇氣質이라야 方說得箇性字니 若人生而靜以上은 只說得箇天道요 下性字不得이라 所以子貢曰 夫子之言性與天道를 不可得而聞也라하니 便是如此라 所謂天命之謂性者는 是就人身中하야 指出這箇是天命之性이 不雜氣稟者而言爾니라 ○ 纔說性時엔 則便是夾氣質而言이니 所以說時에 便已不是性也니라니라
人生而靜以上은 是人物未生時라 只可謂之理요 未可名爲性이니 所謂在天曰命也라
纔說性時엔 便是人生以後니 此理已墮在形氣之中이라 不全是性之本體矣니 所謂在人曰性也니라
人生而靜以上은 是人物未生時니 其有善無惡을 不容說이라
但只可謂之理요 不可謂之性이니 理是天地人物公共底道理요 性是人生以後에 此理具於我而爲我所有者라
性字從生從心하니 才說性時엔 此理已附於形氣之中하니 便兼氣稟而言이니 不全是性之本體라
張橫渠曰 形而後에 有氣質之性하니 善反之면 則天地之性存焉이라하시니 天地之性은 乃性之本體也라
其實은 天地之性도 亦不離氣質之中이로되 只就其中하야 認出不相雜者而爲之言耳니라
21-6 凡人說性은 只是說繼之者善也니 孟子言性善이 是也라
皆水也로되 有流而至海에 終無所汙하면 此何煩人力之爲也리오
有流而未遠
에 固已漸濁
하며 有出而甚遠
에 方有所濁
호되 有濁之多者
하고 有濁之少者
하니 淸濁
이 雖不同
이나 然不可以濁者不爲水也
注+欄外書曰 繼之者善也는 旣已理氣合一이니 非如後儒判然爲二也니라注+朱子曰 此繼之者善은 指發處而言之也라 性之在人은 猶水之在山하야 其淸을 不可得而見也요 流出而見其淸然後에 知其本淸也라 所以孟子只就見孺子入井에 皆有怵惕惻隱之心處하야 指以示人하야 使知性之本善者也라 易所謂繼之者善也는 在性之先이요 此所引繼之者善也는 在性之後하니 蓋易은 以天道之流行者言이요 此는 以人性之發見者言이라 唯天道流行如此라 所以人性發見도 亦如此니 若水之就下處는 當時只是袞說了니 蓋水之就下는 便是喩性之善이니라 ○ 流至海而不汚者는 氣稟淸明하야 自幼而善이니 聖人性之而全其天者也요 流未遠而已濁者는 氣稟偏駁之甚하야 自幼而惡者也요 流旣遠而方濁者는 長而見異物而遷焉하야 失其赤子之心者니 濁有多少는 氣之昏明純駁이 有淺深也라 不可以濁者不爲水니 惡亦不可不謂之性也니라 ○ 說水流而就下了하고 又說從淸濁處去하야 與就下로 不相續하니 這處는 只要認得大意可也니라니라
繫辭曰 一陰一陽之謂道니 繼之者善也라하시니 蓋天道流行하야 發育萬物호되 賦受之間에 渾然一理 純粹至善하니
所謂性善者也
니 繼之云者
는 猶水流而就下
注+按 朱子曰 所謂繼之者善은 猶水流而就下也요 皆水也로되 有流而至於海라하시니 他這是兩箇譬喩라 水之就下處엔 他這下更欠言語하니 要須爲他作文補這裏라야 始得이어늘 他當時只是袞說了라 然則水流而就下와 及皆水也此兩語를 當分作別段이요 不可連接看이라 朱子說破繼之者善과 水流而就下等語가 詳且盡矣어늘 而葉氏引易所謂繼之者善하야 混而言之하고 至於繼之云者는 猶水流而就下하야는 此說이 尤不明快니라요 其有淸濁遠近之不同
은 猶氣稟昏明純駁
이 有淺深也
라
水固本淸이나 及流而濁을 不可謂之非水니 猶性雖本善이나 及局於氣而惡을 不可謂之非性이니라
故用力敏勇則疾淸하고 用力緩怠則遲淸하나니 及其淸也하야는 則却只是元初水也라
不是將淸來하야 換却濁이요 亦不是取出濁來하야 置在一隅也라
故不是善與惡이 在性中爲兩物相對하야 各自出來니라
故不可不加澄治之功이니 惟能學以勝之면 則知此理渾然하야 初未嘗損이니 所謂元初水也라
雖濁而淸者存故로 非將淸來換濁이요 旣淸則本無濁이라 故非取濁置一隅也니 如此則其本善而已矣라
愚謂 不知性之本善
이면 則不能自勉以復其初
요 不知性有時而陷於惡
이면 則不能力加澄治之功
注+按 非自勉之外에 復有澄治之功也니 下語亦恐不精이라이니 二說蓋互相發明也
니라
但前以其本言하면 則曰相對而生이요 此以其用言하면 則曰相對各自出來니라
21-8 此理는 天命也니 順而循之則道也요 循此而修之하야 各得其分則敎也라
自天命以至於敎
히 我無加損焉
이니 此舜有天下而不與焉者也
注+欄外書曰 理는 卽性之理也니 不曰性而曰理는 理只是一理라 無內外하고 無彼此하니 因該上文所言인댄 不得不然이니 亦爲天命也라 各得其分은 謂各得性分之所固有요 無加損은 謂於性分에 無增減이라 末引舜者는 證聖人所遇之境有異나 而於性分則無加損也니라 又曰 程意는 蓋指君仁, 臣敬, 父慈, 子孝之類니라 又曰 이 卽是不與니라注+按 性理大全에 朱子論生之謂性而段段說破하야 以示人하시니 生之謂性으로 至生之謂也一段이요 人生氣稟으로 至不可不謂之性也一段이요 生之謂性으로 至水流而就下也一段이요 皆水也로 至各自出來一段이요 此理天命也로 至不與焉이 一段이라 而且曰 生之謂性이 是一節이요 水流就下 是一節이요 淸濁又是一節이라하야 其作段分節이 互有不同은 何也오 所謂三節者는 此分別天命之性, 氣質之性而言之也니 生之謂性은 氣質之性也요 水流而就下는 天命之性也요 淸濁은 又是氣質之性也라 上項作段은 以文意之止處로 爲主하니라注+論語集註에 不與는 言不以位爲樂也라 ○ 陵陽李氏曰 此又自其性之本然者而推言之라 나 大率以爲一循其本然하야 非私智所能與耳니라 ○ 按 此言舜亦不過率性修道之盡其極耳요 不加毫末於性分之外라 雖至於受堯之禪하야 以有天下之大라도 而此則於舜에 不相關하니 所樂이 不在乎此也니라시니라
修道는 雖以人事言이나 然其所以修之者는 莫非天命之本然이니 非人私智所能爲也라
21-1 〈
명도선생明道先生이 말씀하였다.〉
“낳는 것을
성性이라 이르니,
성性은 바로
기氣이고
기氣는 바로
성性이라는 것은
생生(낳음, 또는 생겨남)을 이른다.
注+“생지위성生之謂性과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같습니까?” 하고 묻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성자性字를 똑같이 논할 수가 없다. 생지위성生之謂性은 다만 사람이 품부받은 것을 풀이한 것이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은 성性의 이理를 말한 것이다.”
○ “기질氣質이란 말이 어떤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것은 장자張子와 정자程子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성문聖門에 지극히 공이 있고 후학後學들에게 큰 보탬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적에
기氣가 모여 형체를 이룸에
이理가 인하여 갖추어졌으니, 이것을
성性이라 하는 바,
注+살펴보건대 ‘생지위성生之謂性’은 고자告子의 말인데, 정자程子가 성性이 곧 기氣이고 기氣가 곧 성性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말씀하기를 “이는 정자程子가 고자告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이란 말을 발명發明하여, 성性이 곧 기氣이고 기氣가 곧 성性이라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하였다. 사람이 태어난 이후에야 비로소 성性을 말할 수 있으니 성性을 말할 때에는 이미 기氣를 띠고 있어 성性과 기氣를 나누어서 둘로 삼을 수 없으니, 이 성자性字는 바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인데, 섭씨葉氏의 이른바 ‘이理가 인하여 갖추어졌으니, 이것을 성性이라 한다.’는 것은 이것은 이理로 말한 것이니, 생지위성生之謂性을 해석함에 적절하지 못할 듯하다.성性과
기氣는 본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性이 바로 기氣이고 기氣가 바로 성性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정자程子가 이理와 기氣를 겸하여 성性을 말씀한 것이니, 바로 맹자孟子의 성선性善의 뜻과 서로 발명發明되고 고자告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이라는 말과는 같지 않다.
생生은 곧 기氣이고, 생生의 이理는 곧 성性이다.
그러나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성립하지 못하고, 이理는 기氣가 아니면 행해지지 못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형체를 이루어 기氣와 이理가 갖추어져서 이것을 받아 나에게 있는 성性을 삼았다.
그렇다면 성性을 말할 적에 기氣를 떠날 수가 없으니 성性이 바로 기氣이고, 기氣를 말할 적에 성性을 떠날 수가 없으니 기氣가 바로 성性이다.
고자告子가 말한 것은 이치를 버리고 기氣만 말하여 오로지 생生의 지각知覺하고 운동運動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였으니, 말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21-2 사람이 태어날 때에 받은
기품氣稟은 이치상
선악善惡이 있게 마련이나
성性 가운데에 원래 이 두 물건(善‧
악惡)이 상대하여 나온 것은 아니다.
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理는 다만 합合〔마땅히〕字로 보아야 한다.”
기품氣稟이 뒤섞임에 선善‧악惡이 이로 말미암아 나누어지니, 이 또한 이치상 있는 것이나 그 성性의 근본을 근원해 보면 선善일 뿐이요, 성性 가운데에 원래 선善‧악惡 두 가지가 아울러 나오는 것은 아니다.
21-3 어릴 때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이 있으니,
본주本註에 이르기를 “
후직后稷의
숙성夙成함
注+《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편生民篇〉에 이르기를 “〈후직后稷이〉 실로 기어다닐 때부터 능히 숙성夙成하시었다.” 하였다. 과
자월초子越椒注+《좌전左傳》 선공宣公 4년조年條에 초楚나라 사마자량司馬子良이 아들 월초越椒를 낳았는데, 자문子文이 말하기를 “반드시 이 아이를 죽여라. 이 아이는 곰과 호랑이의 형상에 시랑豺狼의 소리를 내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약오씨若敖氏를 멸망시킬 것이다.” 하였다.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사람들이 반드시
약오씨若敖氏의 집안을 멸망시킬 것임을 안 따위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21-4 이는 기품氣稟에 그러함이 있어서이다.
선善이 진실로 성性이나 악惡 또한 성性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선善과 악惡이 모두 천리天理이니, 악惡이라고 말하는 것이 본래는 악惡이 아니요, 다만 과過하거나 불급不及하여 곧 이와 같이 된 것이다.”
“
천하天下에
성性 밖의 물건이 없으니, 본래는 모두
선善한데
악惡으로 흘러갔을 뿐이다.”
注+살펴보건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분의 말씀은 다만 그 근본은 선善하나 악惡으로 흘러감을 말씀하였을 뿐이다. 예컨대 주자朱子의 이른바 ‘기질氣質의 편벽됨으로 인하여 이 성性이 악惡에게 어지럽힘을 당하니, 물이 진흙에 뒤섞여지더라도 이것을 물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과 같은 바, 악惡 또한 성性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 있어서 뜻이 지극히 분명하다.
내가 생각하건대 천명天命이 부여賦與된 처음을 근원해 보면 진실로 선善만 있고 악惡이 없지만 기품氣稟이 구애하고 막은 뒤에 이르러서는 악惡해지니, 이것을 선善의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성性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성性은 하나인데 가리키는 곳이 같지 않을 뿐이다.
21-5
생生을
성性이라 이르는 것은 ‘
인생이정人生而靜(人物이 태어나기 이전의
정靜한 상태)’ 이상은
성性을 말할 수가 없으니, 조금이라도
성性을 말할 때에는 곧 이미
성性이 아니다.
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성性은 모름지기 기질氣質이 있어야 비로소 성자性字를 말할 수 있으니, 만약 인생이정이상人生而靜以上 같은 것은 다만 천도天道만 말할 수 있고 성자性字를 놓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자공子貢이 ‘부자夫子께서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한 것을 얻어 듣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니, 곧 이와 같다. 이른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 가운데에 나아가서 이 천명天命의 성性이 기품에 뒤섞이지 않은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
○ 조금이라도 성性을 말할 때에는 곧 기질氣質을 뒤섞어서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성性을 말했을 때에는 곧 성性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인생이정人生而靜’ 이상은 사람과 물건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이니, 다만 이理라고만 이르고 성性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이른바 ‘하늘에 있으면 명命이라 한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성性을 말할 때에는 곧 사람이 태어난 이후이니, 이 이理가 이미 형기形氣의 가운데에 떨어져 있어 온전한 성性의 본체本體가 아니니, 이른바 ‘사람에게 있으면 성性이라 한다.’는 것이다.”
○ 이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을 거듭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생지위성生之謂性’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인생이정人生而靜 이상은 사람과 물건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이니, 선善만 있고 악惡이 없음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단지 이理라고만 말하고 성性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이理는 바로 천지天地와 인물人物에 공공公共한 도리道理이고 성性은 사람이 태어난 이후에 이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져서 내가 소유로 삼는 것이다.
성자性字는 생生을 따르고 심心을 따랐으니, 조금이라도 성性을 말할 때에는 이 이치가 이미 형기形氣의 가운데에 붙어 있으니 기품氣稟을 겸하여 말한 것으로 온전한 성性의 본체本體가 아니다.
장횡거張橫渠가 말씀하기를 “형체가 있은 뒤에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으니, 이것을 잘 돌이키면 천지天地의 성性이 보존된다.” 하였으니, 천지天地의 성性은 바로 성性의 본체本體이다.
그 실제는 천지天地의 성性 역시 기질氣質 가운데에서 떠나지 않으나 다만 이 가운데에서 서로 뒤섞이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말했을 뿐이다.
21-6 무릇 사람들이 성性을 말하는 것은 다만 계지자선繼之者善을 말하는 것이니, 맹자孟子가 말씀한 성선性善이 이것이다.
이른바 계지자선繼之者善이라는 것은 물이 흘러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똑같은 물이지만 흘러서 바다에 이르러서도 끝내 더럽혀진 바가 없다면 이 어찌 번거롭게 인력人力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흘러서 멀리 가기도 전에 이미 점점 흐려지는 경우가 있으며 흘러나와 아주 멀리 간 뒤에야 비로소 흐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흐려짐이 많은 경우도 있고 흐려짐이 적은 경우도 있으니, 맑고 흐림이 비록 똑같지 않으나 흐린 것도 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계지자선繼之者善은 이미 이理와 기氣가 하나로 합한 것이니, 후세의 유자儒者들이 판연判然히 둘로 나눈 것과는 같지 않다.”注+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여기의 계지자선繼之者善은 발發하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성性이 사람에게 있음은 물이 산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맑음을 볼 수가 없고, 물이 흘러 나와서 맑은 것을 본 뒤에야 본래 맑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孟子는 다만 어린 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았을 때에 모두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나아가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여 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性이 본래 선善함을 알게 한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른바 계지자선繼之者善은 성性의 앞에 있고, 여기에 인용한 계지자선繼之者善은 성性의 뒤에 있으니, 역易은 천도天道가 유행流行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고 여기서는 인성人性이 발현發見한 것을 가지고 말하였다. 오직 천도天道의 유행함이 이와 같다. 이 때문에 사람의 성性이 발현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니,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부분은 당시에 다만 뒤섞어서 말씀한 것이니,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바로 성性의 선善함을 비유한 것이다.”
○ 물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도록 더러워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기품氣稟이 청명淸明하여 어릴 때부터 선善한 것이니 성인聖人이 성性대로 하여 그 천성天性을 온전히 한 것이요, 흘러서 멀리 가기도 전에 이미 탁한 것은 사람의 기품氣稟이 편벽되고 잡박雜駁함이 심하여 어렸을 때부터 악한 것이요, 흘러서 이미 멀리가고 나서야 비로소 탁한 것은 사람이 장성하매 다른 물건을 보고 옮겨가서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은 것이니, 탁함이 많고 적음이 있는 것은 기氣의 어둡고 밝음과 순수하고 잡박함에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이다. 탁한 것을 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악惡 또한 성性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물이 흘러서 아래로 내려감을 말씀하고 또 청탁淸濁을 따라서 흘러감을 말씀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서로 이어지지 않으니, 이 부분은 다만 대의大意를 인식하는 것이 좋다.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한 번 음陰이 되고 한 번 양陽이 되는 것을 도道라 이르니, 계속하는 것이 선善이다.” 하였으니, 천도天道가 유행流行하여 만물萬物을 발육發育하는데, 부여하고 받는 사이에 혼연渾然한 한 이치가 순수하여 지극히 선善하다.
이른바
성선性善이라는 것이니, 계속한다는 것은 물이 흘러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요,
注+살펴보건대 주자朱子가 말씀하기를 “이른바 계지자선繼之者善이라는 것은 물이 흘러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으며, 똑같은 물이지만 흘러가서 바다에 이른다.” 하였으니, 이것은 두 가지의 비유이다. 물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부분에는 그 아래에 다시 내용이 빠졌으니, 모름지기 글을 지어 이것을 보충하여야 비로소 말이 되는데 당시에 다만 뒤섞어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흘러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과 ‘똑같은 물이지만 흘러가서 바다에 이른다.’는 이 두 말씀을 마땅히 나누어 별개의 단락으로 만들어야 하고, 연접하여 보아서는 안 된다. 주자朱子가 계지자선繼之者善과 물이 흘러서 아래로 내려간다는 등의 말씀을 설파說破한 것이 상세하면서도 극진한데, 섭씨葉氏가 《주역周易》의 이른바 계지자선繼之者善을 인용하여 뒤섞어 말하였고, 계속한다는 것은 물이 흘러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말함에 이르러서는 이 말이 더욱 명쾌하지 못하다. 여기에
청탁淸濁과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음은
기품氣稟의
혼명昏明과
순박純駁에 깊고 얕음이 있는 것과 같다.
물은 진실로 본래 맑으나 흘러가서 흐려진 것을 물이 아니라고 이를 수 없으니, 마치 성性이 비록 본래 선善하나 기질氣質에 국한되어 악해진 것을 성性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이는 선이 진실로 성性이나 악 또한 성性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음을 거듭 해석한 것이다.
21-7 이와 같다면 사람은 맑게 하는 공력功力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힘쓰기를 민첩하게 하고 용맹스럽게 하면 빨리 맑아지고, 힘쓰기를 느리고 게을리하면 더디게 맑아지니, 그 맑아짐에 미쳐서는 단지 원초元初의 물일 뿐이다.
맑은 것을 가져다가 흐린 것과 바꾸는 것도 아니요, 또한 흐린 것을 꺼내어 한 귀퉁이에 두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善과 악惡이 성性 가운데에 있어 두 물건이 되어서 상대하여 각각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비록 기氣에 어두워졌으나 성性은 일찍이 이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맑게 하는 공력功力을 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직 배워서 이겨내면 이 이치가 혼연渾然하여 애당초 일찍이 줄어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니, 이른바 원초元初의 물이라는 것이다.
비록 흐리더라도 맑은 것이 남아 있으므로 맑은 것을 가져다가 흐린 것과 바꾸는 것이 아니요, 이미 맑아지면 본래 흐린 것이 없으므로 흐린 것을 취하여 한 귀퉁이에 두는 것이 아니니, 이와 같다면 그 근본은 선善일 뿐이다.
성性 가운데에 어찌 선善‧악惡 두 물건이 대립하여 병행竝行함이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성性이 본래
선善함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힘써
성性의 처음을 회복하지 못하고,
성性이 때로
악惡에 빠지는 것을 알지 못하면 맑히는
공력功力을 힘써 가하지 못할 것이니,
注+살펴보건대 스스로 힘쓰는 것 외에 다시 맑게 다스리는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니, 글을 쓴 것이 또한 정밀하지 못한 듯하다. 두 말씀이 서로
발명發明된다.
○ 이는 성性 가운데에 원래 두 물건(善‧악惡)이 상대하여 나오는 것이 아님을 거듭 해석한 것이다.
다만 앞에서는 그 근본으로 말하여 ‘상대해서 나온다.’고 하였고, 여기서는 그 용用으로 말하여 ‘상대하여 각각 따로 나온다.’고 한 것이다.
21-8 이 이치는 천명天命이니, 순히 하여 따르면 도道이고 이것을 따라 닦아서 각각 그 분수(직분)를 얻으면 가르침이다.
천명天命으로부터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내가 더 보태거나 줄이는 것이 없으니, 이는
순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하고도 관여하지 않으신 것이다.”
注+《난외서欄外書》에 말하였다. “이理는 바로 성性의 이치이다. 성性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理라고 말한 것은 이理는 단지 똑같은 이치여서 내외內外도 없고 피차彼此도 없으니 윗글에서 말한 것을 포괄하려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바, 이 또한 천명天命이 된다. 각득기분各得其分은 각각 성분性分의 고유한 바를 얻음을 이르고, 무가손無加損은 성분性分에 증감增減이 없음을 이른다. 마지막에 순舜임금의 일을 인용한 것은 성인聖人이 만난 바의 환경(처지)은 차이가 있으나 성분性分에는 가손加損이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또 말하였다. “정자程子의 뜻은 군주가 인仁하고 신하가 공경恭敬하고 어버이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하는 유類를 가리킨 것이다.” 또 말하였다. “ ‘〈군자君子의 본성本性은〉 비록 크게 행해지더라도 더 보태지지 않으며, 비록 곤궁하게 거하더라도 줄어들지 않는다.〔大行不加 窮居不損〕’는 것이 바로 불여不與의 뜻이다.”注+살펴보건대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주자朱子가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해 논한 것을 한 단락, 한 단락 설파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는바, 생지위성生之謂性에서 생지위야生之謂也까지가 일단一段이고, 인생기품人生氣稟에서 불가불위지성야不可不謂之性也까지가 일단一段이고, 생지위성生之謂性부터 수류이취하야水流而就下也까지가 일단一段이고, 개수야皆水也에서 각자출래各自出來까지가 일단一段이고, 차리천명야此理天命也에서 불여언不與焉까지가 일단一段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생지위성生之謂性이 일절一節이고 수류취하水流就下가 일절一節이고 청탁淸濁이 또 일절一節이다.” 하여, 단락을 짓고 절節을 나눈 것이 같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이른바 세 절節이라는 것은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분별하여 말한 것이니, 생지위성生之謂性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이고 수류이취하水流而就下는 천명지성天命之性이고 청탁淸濁은 또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그리고 위의 항項에서 단락을 지은 것은 글뜻이 끝나는 곳을 위주로 한 것이다.注+《논어집주論語集註》에 “불여不與는 지위로써 즐거움을 삼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능양이씨陵陽李氏가 말하였다. “이는 또 그 성性의 본연本然인 입장에서 미루어 말한 것이다. 인용한 《논어論語》의 내용은 비록 본문本文의 뜻은 아니지만 대체로 ‘한결같이 본연本然을 따라서 사사로운 지혜가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 살펴보건대 이는 순舜 또한 성性을 따르고 도道를 품절品節함에 그 지극함을 다한 것에 불과할 뿐이요, 성분性分 밖에 털끝만큼도 더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비록 요堯임금의 선양禪讓을 받아 천하의 큼을 소유함에 이르렀으나 이는 순舜임금에게 관여됨이 없으니, 즐거워하는 바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도道를 품절品節함은 비록 인간人間의 일을 가지고 말하였으나 품절品節하는 대상은 모두가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이니, 사람이 사사로운 지혜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인聖人이 아니면 다하지 못하므로 순舜임금의 일을 가지고 밝히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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