楚靈王
은 汰侈
注+驕汰奢侈라러라 右尹子革
이 侍坐
注+右尹은 官名이요 子革은 이라러니 左史倚相
이 趨而過
한대 王曰 是良史也
니 子善視之
하라 是能讀三墳五典八索九丘
注+三墳은 三皇之書요 五典은 五帝之典이요 八索의 索은 法이요 丘는 國聚也라하니라
對曰 夫良史者는 記君之過하고 揚君之善이어늘 而此子以潤辭爲官하니 不可爲良史니이다
曰 臣又
嘗聞焉
호대 昔
에 周穆王
은 欲肆其心
注+肆는 極이라하여 將過行天下
하여 使皆有車轍竝馬迹焉
이어늘
祭公謀父
가 作祈昭
注+謀父는 周卿士라 祈昭는 詩名이니 猶齊景公作君臣相說之樂하니 蓋曰徵招角招是也라하니 昭宜爲招라 作招라하여 以止王心
注+止王心之逸遊라이라 王是以獲
於
이라하니
臣
其詩焉
한대 而弗知
하니 若問遠焉
이면 其焉能知
리오 王曰 子能乎
아
對曰 能
하노이다 其詩曰 祈昭之愔愔乎
여 式昭德音
注+祈昭愔愔은 言祈昭樂之安和하니 其法足以昭其德音者也라이로다 思我王度
하니 式如玉
하며 式如金
注+思王之法度하니 如金玉純美라 詩云 追琢其章이요 金玉其相이라하니라이로다 刑民之力
하여 而無有醉飽之心
注+長而字어늘 刑傷民力하여 用之不勝不節호대 無有醉飽之心이니 言無厭足이라이로다
靈王이 揖而入하여 饋不食하고 寢不寐를 數日하니 則固不能勝其情하여 以及於難하다
孔子讀其志曰 古者有志
하니 克己復禮爲仁
注+克은 勝이라 言能勝己私情하여 復之於禮則爲仁也라이라하니 信善哉
라
楚靈王
이 若能如是
면 豈期辱於乾谿
注+靈王이 起章華之臺於乾谿하니 國人潰畔하여 遂死焉이라리오 子革之非左史
는 所以風也
요 稱詩以諫
은 順哉
로다
은 교만하고 사치하였다.
注+교만하고 사치한 것이다. 右尹 子革이
楚 靈王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注+右尹은 官名이고, 子革은 이름이 然丹이다. 左史 倚相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자
楚王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훌륭한
史官이니 그대는 잘 보라. 이 사람은 ≪
三墳≫, ≪
五典≫, ≪
八索(팔삭)≫, ≪
九丘≫를 읽었다.”
注+≪三墳≫은 三皇의 책이고, ≪五典≫은 五帝의 典籍이다.
그러자 子革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훌륭한 사관이란 임금의 잘못을 기록하고 임금의 잘한 점을 드러내는데, 이 사람은 글을 潤色하는 것만으로 관직을 맡고 있으니 훌륭한 사관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또 말하였다. “신이 또 예전에 듣자오니, 옛날
은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부려
注+肆는 욕심을 극도로 부린 것이다.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모든 곳에 수레바퀴 자국과 말발굽 흔적을 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祭公(채공)
謀父(모보)가 〈
祈昭〉를 지어
注+謀父는 周나라 卿士이다. 〈祈昭〉는 시 편명이다. ≪孟子≫ 〈梁惠王 下〉에 “齊 景公이 임금과 신하가 서로 기뻐하는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지금의 〈徵招(치소)〉와 〈角招〉가 이것이다.”라고 하였으니 ‘昭’는 ‘招’가 되어야 한다. ≪春秋左氏傳≫에는 ‘招’라고 되어 있다. 왕의
私心을 막았습니다.
注+방탕하게 노는 왕의 마음을 저지한 것이다. 왕이 이 때문에
文宮에서 편안히 돌아가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이 의상에게 그 시에 대해 묻자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더 옛날 것을 물어본다면 어찌 알겠습니까.” 왕이 물었다. “그대는 아는가?”
子革이 대답하였다. “압니다. 그 시에 ‘평화로운 〈
祈昭〉의 음악이여! 법도가 왕의
德音을 밝히기에 충분하네.
注+祈昭愔愔은 〈祈昭〉의 음악이 평화로우므로, 그 음악의 법도가 임금의 德音을 밝히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우리 왕의 법도를 생각하니
玉처럼 아름답고
金처럼 아름답구나.
注+왕의 법도를 생각하니 마치 金과 玉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詩經≫ 〈大雅 棫樸〉에 “잘 다듬은 그 문장이요, 금옥 같은 그 바탕이로다.[追琢其章 金玉其相]”라고 하였다. 注+길러주고 사랑해주어야 하는데 백성들의 힘을 손상시켜 그 힘을 쓰기를 이기지 못할 듯이 하고 절제하지 못하는데도 만족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물리거나 만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楚 靈王이 揖하고 들어간 다음 며칠 동안 음식을 올려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못 이루었는데 결국 사사로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난리를 당하였다.
공자가 이 기록을 읽고 말하였다. “옛 기록에
注+克은 이긴다는 뜻이다.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仁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구나.
楚 靈王이 만약 이 말과 같이 하였다면 어찌
注+楚 靈王이 乾谿에서 章華臺를 짓자 나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결국 죽게 되었다. 子革이
左史를 비난한 것은
諷諫한 것이고, 시를 들어서 간한 것은 순리에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