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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家語(2)

공자가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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季桓子死 魯大夫朝服而弔어늘 子遊問於孔子曰 禮乎잇가 夫子不答이러라
他日 又問墓而不墳한대 孔子曰 今丘也 東西南北之人이라 不可以弗識也니라
吾見封之若堂者矣注+堂形 四方高者 又見若坊者矣注+坊形하고 平上而長이라 又見夏屋者矣 又見若斧形者矣 吾從斧者焉호리라
於是封之하니 崇四尺이러라 孔子先反하고할새 門人後러니 雨甚至 墓崩하여 修之而歸러라
孔子問焉曰 爾來何遲 對曰 防墓崩이러이다 孔子不應하니 三云한대
孔子泫然而流涕曰 吾聞之호니 古不修墓 及二十五月而大祥하고 五日而彈琴不成聲하고 十日過禫而成笙歌注+孔子 大祥하고 二十五月禫이라 故十日踰月而歌也라하니라


季桓子가 죽자 나라 대부가 朝服을 입고 弔問하였는데 子遊가 공자에게 물었다. “예에 맞습니까?” 부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훗날 또 무덤을 만들고 封墳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지금 나는 東西南北을 떠도는 사람인지라 무덤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봉분을 모양처럼 쌓은 것을 보았고,注+ 모양은 사방이 방정하면서도 높은 형태이다.堤防 모양처럼 쌓은 것을 보았으며,注+제방 모양은 옆이 줄어들고 위에는 평평하면서도 긴 형태이다. 또 큰 집의 지붕을 덮은 모양처럼 쌓은 것을 보았고, 또 도끼 모양처럼 쌓은 것을 보았는데
나는 도끼 모양처럼 쌓은 것을 따르겠다.”
이에 봉분하니 높이가 4자였다. 공자가 먼저 돌아오고 虞祭를 지낼 때 門人들이 뒤늦게 왔는데, 이때 비가 매우 많이 내려 묘가 무너져서 修築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공자가 물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늦게 왔느냐?” 문인이 대답하였다. “ 땅의 묘가 무너졌습니다.” 공자가 응답하지 않자 〈문인이 공자가 잘못 들으신 것으로 알고〉 세 번을 말하였는데
공자가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옛날에는 무덤을 修築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사 지낸 지 25개월이 되면 大祥을 지내고, 大祥을 지낸 뒤 5일 후에 을 연주하되 하나의 곡조를 끝까지 연주하지 않으며, 10일이 지나 禫祭를 지낸 뒤에 笙篁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이다.”注+


역주
역주1 43-12 : 이 부분은 四部叢刊本을 저본으로 하였다.
역주2 나는……보았는데 : 이것은 네 가지 모양으로 封土하는 것을 말한다. 堂 모양은 人家의 집처럼 평평하고 방정하면서도 높은 형태이고, 제방 모양은 둑처럼 좁고 긴 형태이고, 큰 집의 지붕을 덮은 모양은 큰 집의 지붕처럼 옆으로 길고 낮은 형태이고, 도끼 모양은 도끼날처럼 위가 좁은 형태이다. 앞의 세 경우는 모두 功力이 많이 들고 쌓기 어렵지만 도끼 모양으로 봉토하는 것은 검소하면서도 쉽게 쌓을 수 있기 때문에 공자가 이것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다.(≪禮記集說大全≫ 〈檀弓 上〉 陳澔 注)
역주3 공자는……것이다 : ≪儀禮≫ 〈士虞禮〉에 ‘中月而禫’이라는 말이 있는데, ‘中月’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王肅의 설로 ‘中月’을 ‘月中’의 뜻으로 보아, 大祥을 지내고 나서 그달 중에 다시 禫祭를 지낸다는 것이다. 둘째 ≪儀禮≫ 注를 낸 鄭玄의 설로, ‘中’을 ‘間’의 뜻으로 보아, 大祥과 禫祭 사이에 한 달을 띄운다는 주장으로서 상제의 기간을 모두 27개월로 보는 것이다.(≪通典≫ 권87 〈喪制〉) 이 부분은 王肅이 注를 낸 부분이므로 25개월째에 大祥을 치르고 26개월째에 담제를 치른다고 주장한 것이다.
역주4 (若)[而] : 저본에는 ‘若’으로 되어 있으나, 漢文大系本에 의거하여 ‘而’로 바로잡았다.
역주5 (殺)[旁] : 저본에는 ‘殺’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漢文大系本에 의거하여 ‘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 ≪禮記≫ 〈檀弓 上〉에는 ‘覆’로 되어 있다.

공자가어(2) 책은 2020.11.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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