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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家語(2)

공자가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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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司寇像注+玉紅色 綠簪 黃纓 紫褐
祖庭廣記 曰 先聖 生有異質하니 凡四十九表 反首 洼面 月角 日準
河目注+上下眶 平而長이라 海口 斗脣 昌顔 均頤 騈齒 龍形 龜脊 虎掌 騈脇 參膺
圩頂 山臍 林背 翼臂 注頭 阜脥 堤眉 地足 谷覈 雷聲 澤腹이요
面如蒙倛하고 手垂過膝하며 眉一十二彩 目六十四理 立如鳳峙하고 坐如龍蹲하며
手握天文하고 足履度字하며 望之如仆하고 就之如升하며 脩上 趨下 末僂 後耳
視若營四海하고 耳垂珠庭하고 胸有文하니 曰制作定世符 身長九尺六寸이요 腰大十圍라하니라
○孔子適周 周大夫萇弘 語劉文公曰 吾觀孔仲尼호니 有聖人之表
河目而龍顙 黃帝之形貌也 脩肱而龜背하고 長九尺有六寸하니 成湯之容體也
言稱先王하고 躬履謙讓하고 洽聞強記하고 博物不窮하니 抑非聖人之興者乎아하니라
○齊子與適魯하여 見孔子 子與曰 聞子之名호대 不覩子之形 久矣러니
今而後 知泰山之爲高 淵海之爲大라하니라
○先聖四十七世孫孔傅云 家廟所藏 衣燕居服하고 顔子從行 謂之小影이라하니 於像 最眞이라
唐劉禹錫新州廟碑 謂堯頭禹耳 華冠象佩 取之自鄒魯者 卽所傳小影也라하니라
○四十六世孫孔宗壽云 家藏所畵 先聖 按几而坐하고 從其十弟子者 亦謂之小影이요
其立而顔淵侍者 世謂之行敎 行敎 已有世本이어니와 小影 摹者多訛라하니라
○廣陵馬大年 爲夏縣令하여 寄居司馬朴家할새 見所藏先聖畫像하니
乃唐人王維筆이니 眼中神彩 殊不類 常像 上長下短하고 背微僂하니 以傳考之하면 當然이라
莊子 載老萊子出薪하여 遇先聖하고 反以告曰 有人於此하니 脩上而趨下하고 末僂而後耳하며 視若營四海注+ 長上而促下 末僂 微曲也 後耳 耳近後也 視若營四海 則憂世之容可掬이라라하니
其像 皆可畵로대 若夫視若營四海 則非摩詰이면 不能作也 抑形狀 末也
論語 記聖人之氣象曰 子 溫而厲하며 威而不猛하며 恭而安 則雖摩詰이라도 亦莫作也注+見祖庭廣記하니라


注+옥빛과 붉은빛이 감도는 안색에 녹색 비녀와 황색 갓끈, 자줏빛 갖옷을 착용하였다.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先聖께서는 남과 다른 형질을 타고 나셨으니 모두 49가지의 특이점이 있으셨다. 와 우묵한 얼굴, 가운데가 튀어나온 이마와 높은 코,
河水 같이 긴 눈과注+위아래 눈언저리가 평평하고 길다. 바다 같이 큰 입, 큰 입술과 빛나는 미간, 평평한 턱과 와 용 같은 형상, 거북이 같은 등과 범 같은 손바닥, 과 솟은 가슴,
오목한 정수리와 산처럼 불룩한 배꼽, 숲처럼 널찍한 등과 날개를 드리운 듯한 긴 팔, 움푹 꺼진 머리, 언덕처럼 두툼한 뺨과 제방처럼 긴 눈썹, 땅 같이 네모난 발과 깊이 통하는 우레 같은 목소리와 윤택한 배가 있다.
얼굴은 와 같고 손은 무릎 아래로 늘어지고, 눈썹은 열두 빛깔이 나고 눈에는 예순네 개의 결이 있고, 서 있으면 봉황이 우뚝 선 듯하고 앉아 있으면 용이 웅크린 듯하고,
손바닥에 천문을 쥐고 있고 발바닥에 자 모양이 있고, 멀리서 바라보면 엎드린 듯하고 가까이 가서 보면 올라갈 듯하고, 상반신은 길고 하반신은 짧고, 등줄기는 굽고 귀는 뒤로 붙었고,
에 드리우고, 가슴에는 라는 글자가 있다. 신장은 9척 6촌, 허리둘레는 10이다.”
魯司寇像魯司寇像
○공자께서 주나라에 갔을 때 주나라 대부 萇弘劉文公에게 말하였다. “내가 孔仲尼를 살펴보니 聖人의 표시가 있었습니다.
河水 같이 긴 눈에 용 같은 이마는 黃帝의 모습이고, 팔이 길고 거북 같은 등을 하고 있으며 키는 9척 6촌이니 成湯의 용모입니다.
○제나라 태사 子與가 노나라에 가서 공자를 뵈었다. 자여가 말하였다. “그대의 이름을 듣고서도 그대의 모습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先聖의 47세손 가 말하였다. “家廟에 소장된 것 가운데, 공자께서 燕居服을 입으시고 顔子께서 따르고 있는 그림을 小影이라고 하니, 초상 중에 본래 모습에 가장 가깝다.
○46세손 가 말하였다. “집에 소장한 그림 가운데, 선성께서 안석에 기대어 앉아서 열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계신 것 역시 ‘小影’이라고 한다.
선성께서 서 계시고 안연이 모시고 있는 것을 세상에서는 ‘行敎’라고 하는데, ‘행교’는 세상에 전하는 본이 있으나 ‘소영’은 摹寫한 것 가운데 잘못된 것이 많다.”
廣陵 夏縣의 현령이 되어 의 집에 기거할 때 소장되어 있던 先聖의 화상을 보았다.
바로 당나라 사람 의 필적이었는데, 눈 속의 정신과 광채가 전혀 닮지 않았다. 일반적인 화상은 상반신이 길고 하반신이 짧으며 등이 약간 굽어 있는데, 전하는 기록으로 고증해보면 이런 모습이 당연한 것이다.
莊子≫에 “老萊子가 나무를 하러 갔다가 선성을 우연히 만나고 돌아와 ‘이곳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상반신은 길고 하반신은 짧았으며 등이 조금 굽고 귀가 뒤로 붙어 있었으며 눈초리가 사해를 경영할 듯하였습니다.’注+郭象의〉 에 “상반신은 길고 하반신은 짧다.”라고 되어 있다. 末僂는 조금 굽은 것이다. 後耳는 귀가 뒤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눈초리가 사해를 경영할 듯하였다는 것은 세상을 걱정하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한 것이다.라고 고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 형상은 모두 그릴 수 있으나, 눈초리가 사해를 경영할 듯하다는 것은 摩詰(王維)이 아니면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형상을 그리는 것은 지엽적인 것이다.
論語≫에 성인의 기상을 “공자께서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시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시고 공손하면서 편안하시다.”라고 기록한 것은 비록 마힐이라도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注+


역주
역주1 魯나라 司寇 : 공자의 벼슬이 魯나라 大司寇에 이르렀기 때문에 불리게 된 칭호이다. ≪史記≫ 〈孔子世家〉에 “그 후 定公이 공자를 中都의 邑宰로 삼으니, 1년 만에 사방에서 모두 본받았다. 중도의 읍재에서 司空으로 승진하였고 사공에서 大司寇로 승진하였다.[其後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皆則之 由中都宰爲司空 由司空爲大司寇]”라고 하였다.
역주2 孔氏祖庭廣記 : 金나라 때 공자의 51대손인 孔元措(1182~1251)가 12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본래 공자의 47대손인 孔傳이 1124년 ≪공씨조정광기≫ 2권을 지었는데, 姓譜에서 世系에 이르기까지 사적을 기술한 것이었다. 공원조가 이를 기초로 증보하여 남경에서 출판하였다. 후에 금나라 조정에 의해 곡부로 돌아가 제사를 받들게 되자 다시 곡부에서 중각하였는데. 이것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이 책에 실린 공자 故居의 문헌과 공씨 묘림의 碑刻은 공자 연구에 있어 매우 진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역주3 反首 : 머리 가운데가 우묵하고 둘레는 높은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史記≫ 〈孔子世家〉의 “태어날 때부터 머리 위가 圩頂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丘라고 하였다.[生而首上圩頂 故因名曰丘云]”라는 구절에 대해 司馬貞의 ≪史記索隱≫에서 “圩頂은 정수리 위가 낮은 것을 말하므로 공자의 정수리가 反宇와 같다는 것이다. 反宇라는 것은 지붕의 反과 같으니, 가운데가 낮고 네 귀퉁이가 높은 것이다.[圩頂言頂上窳也 故孔子頂如反宇 反宇者 若屋宇之反 中低而四傍高也]”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反首의 反자는 反宇의 反자와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反首를 “反首拔舍”의 의미로 머리를 늘어뜨린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문맥상 타고난 모습으로 보아야 하므로 맞지 않는 듯하다.
역주4 輔喉 : 미상이다. 튀어나온 울대뼈로 해석하기도 한다.
역주5 騈齒 : 치열이 중첩된 것을 가리킨다. 帝嚳, 文王 등이 병치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범인과 다른 성인의 儀表로 여겨진다.
역주6 騈脇 : 갈비뼈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통뼈가 된 것을 가리킨다. 宋의 林堯叟가 “騈은 합하는 것이고 脅은 갈비뼈이니, 겨드랑이 아래 갈비뼈가 합하여 하나처럼 된 것이다.[騈 合也 脅 肋也 蓋腋下肋骨 合比若一]”라고 주를 낸 바 있다.
역주7 七覈 : 사람 머리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으로, 두 눈과 두 귀, 두 콧구멍과 입을 가리킨다.
역주8 蒙倛 : 섣달 역신을 쫓는 데 쓰던 신령이다. ≪荀子≫ 〈非相篇〉 楊倞의 注에 “倛는 方相이다. 머리에 덤불을 쓴 것 같기 때문에 蒙倛라 한다.[倛 方相也 其首蒙茸然 故曰蒙倛]”라고 하였다.
역주9 先聖께서는……10圍이다 : 四十九表는 공자의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는 표시 49가지를 가리킨다. 49가지가 있다고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路史≫ 권19에 보이는데, ‘堤眉’, ‘谷覈’, ‘參臂’, ‘騈脇’, ‘腰大十圍’, ‘長九尺有六寸’이 거론되어 있다. ≪孔氏祖庭廣記≫에는 43가지가 거론되어 있다. 이 문장은 ≪공씨조정광기≫에서 인용하였다고 하나 문장 순서가 다르고, ‘隆鼻’, ‘其頭似帝唐’, ‘其顙似帝舜’, ‘臯陶’, ‘其肩類子産’, ‘自腰以下不及禹三寸’이 누락되어 있다. 明나라 張岱의 ≪夜航船≫ 권13 〈容貌部〉에 ≪공씨조정광기≫에서 인용하였다고 하면서 모두 49가지의 표시를 열거하고 있다. 본래 ≪공씨조정광기≫에 보이는 皐陶 항목이 빠지고, ‘圩頂’, ‘面如蒙倛’, ‘手垂過膝’, ‘脩上趨下’, ‘末僂後耳’, ‘視若營四海’, ‘胸有文曰制作定世符’가 더 추가되어 있다. 인용문에 누락이 있으나 문장 순서가 일치한다. 따라서 인용문은 현전하는 ≪공씨조정광기≫를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夜航船≫에서 인용한 서목과 같은 문헌에서 인용한 것이거나 다른 문헌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주10 珠庭 : 珠庭은 풍성하게 나와 있는 이마를 가리키는 말로, 왕의 관상으로 일컬어진다.
역주11 제작하여……부합하리라 : ≪春秋演孔圖≫에는 “制作定世符運”의 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하였다.
역주12 : 길이의 단위이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었을 때의 길이가 1圍이다.
역주13 (求)[裘] : 저본에는 ‘求’로 되어 있으나, 慶長本에 의거하여 ‘裘’로 바로잡았다.
역주14 (侯)[喉] : 底本에는 ‘侯’로 되어 있으나, ≪孔氏祖庭廣記≫에 의거하여 ‘喉’로 바로잡았다.
역주15 공자께서……아니겠습니까 : ≪孔叢子≫ 권1 〈嘉言〉에 보인다. 원문에는 ‘龍顙’이 아니라 ‘隆顙’이라고 되어 있다.
역주16 제나라……되었습니다 : ≪孔子家語≫ 〈本姓解〉에 보인다.
역주17 孔傅 : 1065~1139. 初名은 孔若古, 자는 世文, 호는 杉溪이다. 산동 곡부 출신이다. 관직은 右朝議大夫에 이르렀다. 저서로 ≪孔子編年≫, ≪東家雜記≫, ≪杉溪集≫이 있다. 孔傳으로 표기한 곳도 많다.
역주18 新州廟碑 : ≪劉賓客文集≫ 〈許州文宣王新廟碑〉를 가리킨다.
역주19 堯임금의……것이다 : 〈許州文宣王新廟碑〉에는 “堯頭禹身 華冠象佩之容 取之自鄒魯”라고 되어 있다.
역주20 孔宗壽 : ≪孔氏祖庭廣記≫에 治平 4년(1067)에 仙源縣主簿, 紹聖 원년(1094)에 右宣德郞으로서 선원현 지현을 지냈다고 한다. 孔傅의 조부 孔道輔가 공종수의 아버지 孔良輔의 맏형이다.
역주21 馬大年 : 馬永卿(?~1136). 자는 大年이다. 1109년 進士가 되었다. 永城主簿로 있을 때 亳州로 유배를 온 劉安世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江都, 淅川, 夏縣, 關中에 관리로 나갔었다. 저서로 ≪元城語錄≫, ≪嫩眞子≫ 등이 있다.
역주22 司馬朴 : ?~? 자는 文季이다. 어릴 때 외조부 范純仁의 집에서 자랐고, 외조부의 공으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右司員外郞, 兵部侍郞을 역임하였다.
역주23 王維 : 701~761. 자는 摩詰이다. 安祿山의 난 이후 肅宗에게 기용되어 尙書右丞이 되었다. 長安 교외에 있는 輞川에 별장을 짓고 벗들과 시화를 즐기며 살았다. 시뿐만 아니라 산수화에도 능하여 南宗畵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역주24 莊子에……고하였다 : ≪莊子≫ 〈外物〉에 보인다. 본래 老萊子의 제자가 공자를 만나고 돌아와 노래자에게 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25 孔氏祖庭廣記에 보인다 : ≪孔氏祖庭廣記≫에서 이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마영경이 왕유가 그린 화상을 본 이야기는 마영경의 문집 ≪嫩眞子≫ 권4에 실려 있다. 본래 이를 인용하면서 다른 내용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어(2) 책은 2020.11.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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