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7 耳目竭於聲色하고 精神竭於外貌라 故中無主니라 中無主면 則禍福雖如丘山이라도 無從識之니라
注
○顧廣圻曰 兩可以二字는 今德經無요 傅本有니 與此合이라 皆無於字라
下知字는 今德經作見이요 傅本作知하니 與此合이라 淮南道應訓引有以字요 無於字요 下知字亦作見이라
先愼曰 闚
는 河上公及傅本作規
라 云 說文
에 窺
는 小視也
라 闚
는 閃也
라 閃
은 闚頭門中也
라하니라
方言에 凡相竊視를 南楚謂之闚라하니라 蓋穴中竊視曰窺요 門中竊視曰闚라 老子는 楚人이니 用楚語作窺요 韓子自作闚라
귀와 눈은 聲色에만 다하고 정신은 외모에만 다하기 때문에 마음에 주체가 없게 된다. 마음에 주체가 없게 되면 禍福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때문에 ≪老子≫에 “문을 나서지 않더라도 天下를 알 수 있고, 창문으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天道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注
○顧廣圻:두 차례 나오는 ‘可以’ 두 자는 지금의 ≪德經≫에 없고, 傅奕本에는 있으니 이와 합치된다. 두 곳 모두 ‘於’자가 없다.
아래의 ‘知’자는 지금의 ≪德經≫에는 ‘見’으로 되어 있고, 傅奕本에는 ‘知’로 되어 있으니 이와 합치된다. ≪淮南子≫ 〈道應訓〉에 이 글을 인용하면서 ‘以’자가 있고, ‘於’자는 없고, 아래의 ‘知’자 또한 ‘見’으로 되어 있다.
王先愼:‘闚’는 河上公本과 傅奕本에 ‘規’로 되어 있다. 畢沅의 ≪道德經考異≫에 이르기를 “≪說文解字≫에 ‘窺’는 작게 들여다보는 것[小視]이라 하였고 ‘闚’는 엿보는 것[閃]이라 하였으며, ‘閃’은 頭門을 통해서 엿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方言≫에 ‘서로 엿보는 것을 남쪽의 楚나라에서 「闚」라 한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구멍을 통해서 몰래 엿보는 것은 ‘窺’이고, 문을 통해서 몰래 엿보는 것은 ‘闚’이다. 老子는 초나라 사람이니 초나라 말을 사용하여 ‘窺’라고 한 것이고, ≪韓非子≫에는 본래 ‘闚’로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