魯問篇에 墨子語魏越云 國家昏亂이면 則語之尙賢尙同하며 國家貧이면 則語之節用節葬하며
國家憙音湛湎이면 則語之非樂非命하며 國家淫僻無禮면 則語之尊天事鬼하며
國家務奪侵淩이면 則語之兼愛非攻이라하니 今書雖殘缺이나 然自尙賢으로 至非命三十篇히 所論略備하여 足以盡其恉要矣라
經說上下篇
은 與
書所述惠施之論及公孫龍書
로 相出入
하니 似原出墨子
하여 而諸
以其說
로 綴益之
라
備城門以下十餘篇
은 則又
所受兵家之遺法
이니 於墨學
에 爲別傳
이라
惟修身親士諸篇은 誼正而文靡하니 校之它篇에 殊不類라
當染篇은 又頗涉晩周之事하니 非墨子所得聞이라 疑皆後人이 以儒言緣飾之요 非其本書也라
墨子之生
이 蓋稍後於七十子
라 不得見孔子
나 然亦甚老壽
라 故
로 前得與
相問答
하고
身丁戰國之初하여 感悕於獷暴淫侈之政이라 故로 其言이 諄復深切하고 務陳古以剴今이라
亦喜稱道詩書及孔子所不修百國春秋라 惟於禮則右夏左周하여 欲變文而反之質하며
至其接世하야는 務爲和同호대 而自處絶艱苦하고 持之太過하여 或流於偏激하니 而非儒尤爲乖盩라
然이나 周季道術分裂에 諸子舛馳어늘 荀卿爲齊魯大師하여
而其書非十二子篇
이 於遊夏孟子諸大賢
에 皆深相排笮
하니 齗齗
이러라
儒家已然이어늘 墨儒異方하여 跬武千里니 其相非 甯足異乎아
綜覽厥書하여 釋其紕駮하며 甄其純實하니 可取者 蓋十六七이라
其用心篤厚하여 勇於振世救敝하니 殆非韓呂諸子之倫比也라
莊周天下篇之論墨氏에 曰 不侈於後世하며 不靡於萬物하며
不暉於數度하여 以繩墨自矯而備世之急이라하고 又曰 墨子眞天下之好也니
將求之不得也인댄 雖枯槁라도 不舍也하니 才士也夫라하니 斯는 殆持平之論與인저
墨子
는 旣不合於儒術
하니 孟荀
之倫
이 咸排詰之
라 漢晉以降
으로 其學幾絶而書僅存
이나 然治之者殊尟
이라
故
로 脫誤尤不可校
요 而古字古言
을 轉多沿襲未改
라 非精究形聲
之原
이면 無由通其讀也
라
樂臺注
러니 今久不傳
이러니 近代鎭洋畢尙書沅
이 始爲之注
하고
籐縣
이 復刊其誤
하여 刱通涂徑
하여 多所諟正
이라 余昔事讎覽
할새 旁摭衆家
하여 擇善而從
하고
於畢本外
에 又獲見明吳寬寫本
注+이 所景鈔者라 今臧杭州丁氏니 缺前五卷이라 大致與道臧本同이라과 顧千里校道臧本
注+本은 明正統十年刊이라 畢本이 亦據彼校定이나 而不無舛屚라 顧校又有季本한대 傳錄에 或作李本하니 未知孰是라 明槧諸本은 大氐皆祖臧本하니 畢注略具라 今竝不復詳校라 又嘗得倭寶閒放刻明茅坤本하니 竝爲六卷而篇數尙完具요 冊耑에 附校異文하여 閒有可采나 惜所見本이 殘缺이라 僅存後數卷이라하여 用相勘覈
하여 別爲寫定
이라
復以王觀察念孫尙書引之父子
와 洪州倅頤煊
과 及年丈兪編修樾
과 亡友
所校
로 參綜考讀
이라
竊謂非儒以前諸篇은 誼恉詳焯하니 畢王諸家校訓略備나 然亦不無遺失이라
經說兵法諸篇은 文尤奧衍淩襍하여 檢攬舊校에 疑滯殊衆일새 揅覈有年에 用思略盡이라 謹依經誼字例하여 爲之詮釋이라
至於訂補經說上下篇의 旁行句讀하고 正兵法諸篇之譌文錯簡하야는
尤私心所竊自喜以爲不繆者로대 輒就畢本하여 更爲增定하여 用遺來學이라
昔
이 注淮南王書
하고 題曰 鴻烈閒詁
注+據宋槧本淮南子及晁公武讀書志라라하니 閒者
는 發其疑啎
요 詁者
는 正其訓釋
이라
今於字誼에 多遵許學이라 故로 遂用題署하니 亦以兩漢經儒 本說經家法하여 箋釋諸子 固後學所睎慕而不能逮者也일새라
光緖十有九年 歲在癸巳十月에 瑞安 孫詒讓은 序하노라
注
墨子書는 舊多古字라 許君說文擧其羛繃二文이나 今本에 竝改易不見하니
則其爲後人所竄定者 殆不知凡幾라 蓋先秦諸子之譌舛하여 不可讀이 未有甚於此書者라
今謹依爾雅說文하여 正其訓故하고 古文篆隷는 校其文字라
注
若尙同篇引術令은 卽書說命之佚文이라 魏晉人이 作僞古文尙書에 不知術爲說之叚字라 遂摭其文하여 竄入大禹謨矣라
兼愛篇注召之邸虖池之瀆의 召之邸는 卽孫炎本 爾雅釋地之昭餘厎니 亦卽周禮職方氏之召餘祁라
今本召譌爲后하니 其義不可解라 畢氏 遂失其句讀矣라
非攻篇之不著何는 卽周書王會之不屠何니 畢氏 不憭하여 依俗本改爲中山하여 遂與墨子舊文으로 不合矣라
明鬼篇迓無罪人乎道路術徑의 迓는 卽孟子禦人於國門之外之禦요
非樂篇折壤坦의 折은 卽周禮硩蔟氏之硩이로되 今本迓譌爲退하며 折譌爲拆하니
畢蘇諸家 各以意校改하여 遂重悂貤繆하여 不可究詰矣라
耕柱篇夏後啓使
𣃈雉已卜於白若之
는 이 卽嗌之
이라 亦卽伯益
이니 與漢書述尙書古文伯益字
로 正合
이어늘
今本
𣃈雉已 譌作翁難雉乙
하고 又脫雉字
라 遂以翁難乙爲人姓名矣
라
非攻下篇說禹攻有苗에 有神人面鳥身이 奉珪以侍라하니 此與秦穆公所見句芒同이라
奉珪者는 東方之玉이니 與禮經의 祀方明東方以珪之義로 合하나 而今本에 奉珪誤作若瑾하니 其義 遂不可通矣라
注
若此之類
는 輒罄
하여 證厥違迕
어니와 它若經說篇之螾爲
虎爲霍
과
兵法諸篇之幎爲順 又爲類
와 芒爲芸
과 桴爲杯
는 其
尤不易理董
이러니 覃思十年
에 略通其誼
라 凡所發正
에 咸具於注
注+凡譌脫之文을 舊校精塙者는 徑據補正하여 以資省覽이라 其以愚意訂定者는 則箸其說於注하고 不敢專輒增改하여 以昭詳愼이라라
世有成學治古文者 儻更宣究其恉하여 俾二千年古子로 釐然復其舊觀인댄 斯亦達士之所樂聞與인저
注
此書
는 寫定於壬辰癸巳閒
이라가 遝甲午夏
하여 屬吳門梓人毛翼庭
하여 以
印成三百部
하고 質之通學
하여 頗以爲不謬
라
然多苦其奧衍
하여 瀏覽率不能終卷
이라 惟吾友黃中弢學士爲詳校一過
하여 擧正十餘事多精塙
하니 亦今之
矣
라
余亦自續勘得賸義逾百事라 有前誤讀誤釋이 覆勘에 始覺之者는 咸隨時迻錄하여 別冊存之라
注
此書最難讀者
는 莫如經經說四篇
이라 余前以未見
經說解爲憾
이러니
一日得如皐
書
에 云 武進
이 臧有先生手稿本
이라하여 急屬鶴亭
하여 馳書求叚錄
이라
金君得書하여 則自校寫一本寄贈하니 得之에 驚喜?日이라
余前補定經下篇句讀는 頗自矜爲刱獲이러니 不意張先生이 已先我得之로다
其解善談名理
하니 雖校讎未宷
하여 不無望文生義之失
이나 然固有精論
이 足補正余書之闕誤者
라 金冒兩君
이 惠我爲不淺矣
어늘 旣又從姻戚
許
하여 叚得陽湖楊君葆彝經說校注
한대 亦閒有可取
일새 因與張解
로 幷刪簡補錄
하여 入冊
하고 凡余舊說與兩家有闇合者
는 皆改從之
라 蓋深喜一得之愚與前賢
으로 冥符遙契
니 固不敢攘善也
라
注
竊謂先秦古子誼恉深遠이 如登岳觀海하여 莫能窮其涯涘라
畢王張蘇諸家 於此書揅校에 亦良勤矣나 然이나 其偶有不照하여 爲後人所匡正者 不可僂指數라
余幸生諸賢之後하여 得據彼成說하여 以推其未竟之緖라 然이나 此書甫成에 已有旋覺其誤者하니
則其不自覺而待補正於後人이 殆必有倍蓰於是者니 其敢侈然以自足邪아
甲辰春에 取舊寫別冊하여 散入各卷하여 增定爲此本할새 幷識之以見疏陋之咎無可自掩하노니
且以睎望於後之能校讀是書者하노라 光緖丁未四月에 籒廎居士는 書하노라
≪漢書≫ 〈藝文志〉에 ≪墨子≫는 71편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53편이다.
≪墨子≫ 〈魯問〉에 墨子가 魏越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혼란하면 ‘尙賢’과 ‘尙同’을 말해주며, 국가가 가난하면 ‘節用’과 ‘節葬’을 말해주며,
국가가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非樂’과 ‘非命’을 말해주며, 국가가 淫僻하여 禮가 없으면 ‘尊天’과 ‘事鬼’를 말해주며,
국가가 침탈하는 데 혈안이 되어 〈타국을〉 侵攻하고 능멸하면 ‘兼愛’와 ‘非攻’을 말해준다.”라 하였으니, 지금 남아 있는 책이 비록 殘缺되어 있지만 〈尙賢〉부터 〈非命〉까지의 30편에 이르기까지 논한 내용이 대략 구비되어 있어서 그 要旨를 알기에 충분하다.
〈經說 上〉과 〈經說 下〉는 莊子의 글에 기술된 惠施의 논변 부분 및 公孫龍의 글과 내용에 出入이 있으니, 아마도 원래 ≪墨子≫에서 나왔고 鉅子들이 자신의 說을 엮어서 보탠 듯하다.
〈備城門〉 이하 10여 편은 또 禽滑釐가 전수받은 兵家의 遺法이니, 墨學에 있어서 別傳이라 하겠다.
오직 〈修身〉‧〈親士〉 등 편들은 뜻이 바르고 글이 아름다우니, 다른 편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매우 다르다.
〈當染〉은 또 周나라 말엽에 속하는 일이 퍽 많으니, 墨子가 직접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모두 후인이 儒家의 말로 보기 좋게 꾸며댄 것이지 본래 〈墨家의〉 글은 아닐 것이다.
墨子가 태어난 때는 아마도 〈孔門의〉 七十弟子보다 조금 뒤일 것이므로 〈墨子가〉 孔子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매우 장수하였기 때문에 前期에는 魯나라 陽文子와 公輸般과 서로 問答하였으며,
晩年에는 田齊의 太公 田和를 만났으며, 또 齊나라 康公이 음악을 흥기시킨 일과 楚나라의 吳起가 亂을 일으킨 것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직접 전국시대 초엽을 만나 橫暴하고 淫亂한 정치를 슬퍼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반복되고 매우 간절하였으며, 옛일을 이야기하여 당시 사람들을 깨우치는 데 힘썼다.
또한 ≪詩經≫과 ≪書經≫ 및 공자가 편수하지 않은 제후국들의 歷史를 일컫기를 좋아하였다. 다만 禮에 있어서는 夏나라를 높이고 周나라를 낮추어 文彩에 치우치는 것을 변화시켜 質樸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며,
樂에 있어서는 끝내 막고 끊어버렸으니, 이는 儒家의 四術과 六藝와는 필시 합치될 수 없는 부분이다.
處世에 이르러서는 同和하기를 힘쓰되 자신의 處身은 매우 艱苦하게 하였으며, 지키는 것이 너무 지나쳐 간혹 편벽하고 한쪽으로 흐르기도 하였으니, 〈非儒〉는 더욱 常道에 어긋났다.
그러나
周나라 말엽
道術이 분열됨에
諸子들이 바른길을 벗어나 제멋대로 치달렸다.
荀卿은
齊나라와
魯나라의
大師가 되어
荀卿
그 책 ≪荀子≫ 〈非十二子〉에서 子遊‧子夏‧孟子 등 大賢들을 모두 신랄하게 排斥하니, 儒家의 학자들이 爭辯하였다.
儒家가 이미 그렇거늘 墨家와 儒家는 방향을 달리하여 반걸음의 차이가 천 리나 벌어지게 되었으니, 그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어찌 이상할 게 있겠는가.
그 책(≪墨子≫)을 종합하여 살펴보아 잘못되고 잡된 것을 辨釋하고 純實한 것을 밝혀보니, 취할 만한 것이 16, 7편 정도이다.
마음 씀이 篤實하고 敦厚하여 세상을 진작시키고 時弊를 구제하는 데 용감하였으니, 아마도 韓非子나 呂不韋가 미칠 수준이 아닐 것이다.
莊周의 ≪
莊子≫ 〈
天下〉에서
墨子를 논하기를 “후세 사람들에게
奢侈를 물려주지 아니하며,
萬物을 낭비하지 아니하며,
莊周
예법이나 제도를 화려하게 내걸지 아니하여, 法으로써 자신을 바로잡으며 세상의 急務에 대비한다.”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墨子는 참으로 천하를 사랑하였다.
방도를 講究하다가 얻지 못하면 몸이 비쩍 마르는 것도 마다치 않았으니, 才士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아마 공평한 평가일 것이다.
墨子는 이미 儒術에 부합하지 못하였으니, 孟子‧荀子‧董無心‧孔子魚 등의 무리가 모두 배척하고 힐난하였다. 漢나라와 晉나라 이후로는 그 학문이 거의 끊어지고 글만 겨우 남았으나 공부하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
그러므로 글자가 빠지고 잘못된 것을 더욱 교정할 수 없었고 古字와 古言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른 것이 더욱 많아서 形聲字와 通假字의 根源을 정밀히 연구한 자가 아니면 通讀할 길이 없었다.
舊本에 孟勝과 樂臺의 注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은 지 오래였는데, 근대에 鎭洋의 尙書 畢沅이 처음으로 ≪墨子≫에 注를 달았다.
籐縣의 孝廉 蘇時學이 그 오류를 바로잡아 다시 간행하여 비로소 올바른 길로 소통시켜 是正한 것이 많았다. 내가 예전에 이 책을 교정할 때에 널리 諸家의 설을 두루 취하여 좋은 것을 택하여 따랐고,
畢沅이
注를 단 책 이외에 또
明나라
吳寬의
寫本과
注+黃丕烈이 影鈔한 것이다. 지금 杭州의 丁氏의 〈가택에〉 소장되어 있는데, 전반부 다섯 권이 빠져 있다. 대략 道藏本과 같다. 顧千里가 교정한 도장본을 입수하여 정밀히 교감하여
注+道藏本은 명나라 正統 10년(1445)에 간행한 것이다. 畢沅의 책이 또한 저 교정본에 의거했으나 틀리고 빠진 것이 없지 않다. 顧千里의 교정본에는 또 ‘季本’이 있는데, 傳하는 기록에 ‘李本’으로 되어 있기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明나라 때의 刻本들은 대체로 도장본을 이어받았으니, 畢沅의 注에 그 내용이 대략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제 아울러 다시 상세히 교정하지는 않는다. 또 일찍이 倭의 寶曆 연간(1751~1764)에 明나라 茅坤本을 倣刻한 것을 얻은 적이 있는데, 모두 6권인데도 篇數가 오히려 완비되어 있고 책 끝에 異文을 교정한 것을 첨부하여 간간이 참고할 만한 것이 있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얻어 본 책이 殘缺되어서 겨우 뒤의 몇 권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따로 필사하여
定本을 만들었다.
다시 觀察使 王念孫과 尙書 王引之 父子와 州倅 洪頤煊 및 年伯인 編修 兪樾과 亡友인 茂才 戴望이 교정한 것들을 가지고 참고하여 종합하면서 읽었다.
삼가 생각건대 〈非儒〉 이전의 篇들은 要旨가 상세하고 분명하니, 畢氏와 王氏 諸家의 교정과 훈고가 그런대로 자세하지만, 그럼에도 또한 빠뜨리고 잘못된 것이 없지 않다.
〈經說〉과 兵法에 관한 편들은 더욱 글의 뜻이 깊고 넓으며 수준이 높고 복잡하여 옛날 교감본들을 검토해보면 의심스럽고 막히는 곳이 너무 많아서 연구하여 따져 밝힌 지 몇 년 만에 心力을 거의 다 소진하고서야, 삼가 經의 뜻과 글자의 용례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었다.
〈經說 上〉과 〈經說 下〉의 旁行한 句讀를 수정‧보완하고, 兵法에 관한 편들의 잘못된 글자와 착간을 바로잡은 일로 말하자면,
더욱 내심 스스로 기뻐하며 틀린 부분이 없다 여겼으나, 번번이 畢本을 가져다 더욱 보완하고 확정하여 후학에게 남기노라.
옛적
許叔重이 ≪
淮南子≫를
注釋하고 제목을 달기를 ≪
鴻烈閒詁≫라 하였으니,
注+宋나라 간행본 ≪淮南子≫와 晁公武의 ≪郡齋讀書志≫에 의거하였다. ‘
閒’이란 의심스럽거나 뜻이 순하지 않은 것을 밝히는 것이고, ‘
詁’란
訓釋을 바로잡는 것이다.
지금 글자의 뜻에 있어서 허숙중의 학설을 따른 것이 많기 때문에 마침내 〈‘閒詁’라는〉 제목을 붙이니, 또한 실로 兩漢의 經儒가 경전을 설명하는 방법에 근본하여 諸子書를 註釋한 것이 진실로 後學이 敬慕하면서도 미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光緖 19년(1893) 癸巳년 10월에 瑞安 孫詒讓은 序하노라.
注
≪墨子≫라는 책은 예로부터 古字가 많아서, 許君(許愼)의 ≪說文解字≫에 ‘羛’와 ‘繃’이 들어간 두 문장을 〈≪墨子≫에서 추출하여〉 제시하고 있지만 지금 판본에는 모두 바뀌어 보이지 않으니,
그렇다면 후인이 멋대로 개정한 것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 아마도 先秦의 諸子書 중에 오류가 많아 읽을 수 없는 것이 이 책보다 심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제 삼가 ≪爾雅≫와 ≪說文解字≫에 의거하여 訓故를 바로잡고 古文(蝌蚪文字)과 篆字‧隷字는 그 文字를 교감하였다.
注
예컨대 〈尙同〉에서 인용한 〈術令〉은 바로 ≪書經≫ 〈說命〉의 佚文인데, 魏晉 사람이 지은 ≪僞古文尙書≫에는 ‘術’자가 ‘說’의 假借字임을 알지 못했기에 마침내 그 문장을 뽑아 〈大禹謨〉에 집어넣었다.
〈兼愛〉에 “注召之邸虖池之瀆”의 ‘召之邸’는 바로 孫炎本 ≪爾雅釋地≫의 ‘昭餘厎’이니, 또한 ≪周禮≫ 〈職方氏〉의 ‘召餘祁’이다.
今本에는 ‘召’자가 잘못되어 ‘后’자로 되어 있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畢沅이 句讀를 잘못 뗀 것이다.
〈非攻〉의 ‘不著何’는 바로 ≪逸周書≫ 〈王會〉의 ‘不屠何’니, 畢氏가 잘 알지 못하여 俗本에 의거하여 ‘中山’으로 고쳐서 결국 ≪墨子≫의 舊文과 합치되지 않게 되었다.
〈明鬼〉의 “迓無罪人乎道路術徑”의 ‘迓’는 바로 ≪孟子≫ 〈萬章 下〉 “禦人於國門之外”의 ‘禦’이고,
〈非樂〉의 “折壤坦”의 ‘折’은 바로 ≪周禮≫ 〈秋官 司寇〉 “硩蔟氏”의 ‘硩’인데, 今本에는 ‘迓’자가 잘못되어 ‘退’로 되어 있고, ‘折’자가 잘못되어 ‘拆’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畢沅‧蘇時學 諸家가 저마다 뜻으로 판단하여 교감하고 개정하여 마침내 거듭 잘못되어 따져 묻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
耕柱〉의 “
夏後啓使𣃈
雉已卜於白若之”는 ‘
’이 곧 ‘
嗌’의
籒文으로 곧
伯益이니, ≪
漢書≫에서 ≪
尙書≫
古文을 이어받아 쓴 ‘
伯益’과 〈글자가〉 딱 합치하는데,
今本에는 “
𣃈
雉已”가 잘못되어 “
翁難雉乙”로 되어 있고 또 ‘
雉’자가 빠져 있는지라 마침내 ‘
翁難乙’을 사람의
姓名이라고 하였다.
〈非攻 下〉에서 禹가 有苗를 공격한 일을 말하는 대목에 “有神人面鳥身 奉珪以侍(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가진 신이 珪를 들고 侍立하다.)”라 하니, 이는 秦 穆公이 본 ‘句芒’과 같다.
‘奉珪’란 동방의 玉이니, ≪禮經≫(≪儀禮≫ 〈覲禮〉)의 “祀方明 東方以珪(막 밝을 때에 제사를 지내면 동방은 규를 쓴다.)”는 뜻과 부합한다. 그러나 今本에는 ‘奉珪’가 잘못되어 ‘若瑾’이라 되어 있으니, 그 뜻이 마침내 통할 수 없게 되었다.
注
이와 같은 사례는 매번
管見을 다 쏟아부어 그 오류를 증명했으나, 그 외 예컨대 〈
經說〉의 〈
今本에〉 ‘
螾’이 ‘
’으로 되어 있고 ‘
虎’가 ‘
霍’으로 되어 있는 것과,
兵法을 다룬 여러 편에 ‘
幎’이 ‘
順’이나 ‘
類’로 되어 있는 것, ‘
芒’이 ‘
芸’으로 되어 있는 것, ‘
桴’가 ‘
杯’로 되어 있는 것은 그
跂互하여 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깊이 사색한 지 10년 만에 대략 그 뜻이 통하여
是正한 모든 것을 다
注에 갖추어 싣는다.
注+잘못되고 빠진 글 중, 이전에 정밀하고 확실하게 교감한 것은 그대로 補正한 것에 의거해서 살펴볼 수 있게 하였고, 내 생각으로 訂定한 것은 注에 설명을 덧붙여 함부로 더하거나 고치지 않아 상세함과 신중함을 다하였다.
세상에 학문을 이루고 古文을 전공한 자가 혹 다시 그 旨意를 궁구하여 2000년 전의 옛 전적을 옛 모습대로 분명하게 회복한다면 이 또한 達士가 즐겨 들을 것이다.
교정하고 필사하는 일을 마치고서 다시 〈自序의〉 뒤에 쓰노라. 詒讓.
注
이 책은 임진년(1892)과 계사년(1893)에 걸쳐 필사해두었다가, 갑오년 여름에 吳門의 출판업자 毛翼庭에게 맡겨 활자판으로 300부를 찍어내고, 이 분야에 밝은 학자에게 질정해보고는 자못 잘못된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글의 뜻이 매우 깊고 넓은 곳이 많기에 대강만 보고 대부분은 끝까지 읽지를 못하였다. 오직 내 벗 學士 黃中弢만이 한 차례 상세히 교정을 봐주었으며 지적해준 10여 사항이 대부분 精確하니, 과연 금세의 張伯松이라 하겠다.
나 또한 계속 읽어가면서 그 밖의 뜻[賸義]을 교정한 것이 백 개가 넘는지라 이전에 잘못 읽고 잘못 해석했다가 다시 교정하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들은 모두 나올 때마다 옮겨 적어 별책에다 남겨두었다.
注
이 책에서 가장 읽기가 어려운 것으로는 〈經 上‧下〉와 〈經說 上‧下〉 네 편만 한 것이 없다. 내가 전에 皐文先生의 ≪經說解≫를 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는데,
어느 날 如皐의 孝廉인 鶴亭 冒廣生의 편지를 받아보았는데, “武進의 運判인 溎生 金武祥이 선생의 手稿本을 소장하고 있다.”라 하기에 서둘러 金武祥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책을 빌려 베껴달라고 鶴亭에게 부탁하였다.
김무상 군이 편지를 받고는 스스로 한 부를 교정하여 베껴 보내주니, 그것을 얻고서 며칠 동안 놀라워하며 기뻐하였다.
내가 전에 補定한 〈經 下〉의 句讀는 자못 스스로 創發하였다고 자부했는데, 뜻밖에 張 先生이 이미 나보다 앞서 이 일을 해내셨다.
그 해석이 名稱과 道理를 잘 이야기하니, 비록 자세히 교정 작업을 하지 않아서 글자만 보고 뜻을 풀이한 잘못이 없지는 않지만, 진실로 의론이 정밀하여 내 책의 빠지고 잘못된 부분을 補正할 만하였다. 김무상 군과 모광생 군 두 사람이 내게 베풀어준 은혜가 적지 않은데, 이윽고 또 인척으로 孝廉인 文伯 張之綱의 허락을 받아 陽湖의 楊葆彝 군의 ≪經說校注≫를 빌렸는데, 또한 간간이 취할 만한 점이 있기에 장 선생의 ≪經說解≫와 아울러 산삭하고 보충하여 책자에 수록하고, 나의 舊說과 두 사람의 견해가 은연중에 합치된 것들은 모두 내 說을 고쳐 두 사람의 說을 따랐다. 어리석은 내가 前賢과 암암리에 멀리서도 부합한 것이 매우 기쁘니, 진실로 감히 남의 훌륭한 업적을 훔치지 못한다.
注
삼가 생각건대 先秦시대 옛 전적은 그 의미가 심원하기가 마치 우뚝한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볼 때에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畢沅‧王念孫‧張惠言‧蘇時學 諸家들이 이 책을 연구하고 교정하는 일에 또한 진실로 정성을 기울였지만 우연히 잘못 본 곳이 있으니, 後人이 匡正한 것이 이루 다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내가 다행히 諸賢의 뒤에 태어나서 저 이미 나온 說에 의지하여 아직 다 밝히지 못한 단서를 미루어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이루어지자마자 곧 그 오류가 발견되었으니,
나 자신도 발견하지 못한 채 후인이 補正해주기를 기다리는 곳이 필시 몇 곱절은 될 것이다. 감히 함부로 으스대며 自足할 수 있겠는가?
甲辰年(1904) 봄에 예전에 필사해놓은 別冊을 가져다가 각 권에 散入하고 增定하여 이 책을 지으면서 아울러 〈自序를〉 기록하여 스스로 감출 수 없는 疏陋한 허물을 드러내니,
또 뒷날 이 책을 능히 교정하며 읽어줄 자에게 바라노라. 光緖 丁未(1907) 4월에 籒廎居士(孫詒讓)가 書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