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4 湯이 得之하여 擧以爲己相하여 與接天下之政하고 治天下之民이라 傅說은 被褐帶索하고 庸築乎傅巖한대
注
畢云 庸은 史記索隱에 引作傭이라 孔安國書傳에 云 傅巖은 在虞虢之界라하고
史記索隱
에 云 在河東太陽縣
이라 又夏靖書
에 云 倚氏六十里
西岸吳阪下
에 便得隱穴
이라하니
是說所潛身處也라한대 案 今在山西平陸縣東二十五里라하다
詒讓案 賈誼傳의 索隱에 引被作衣하고 乎作於한대 義竝通이라
書敍에 云 高宗夢得說하여 使百工營求諸野하여 得諸傅巖이라한대
孔疏에 引馬融하여 云 高宗이 始命爲傅氏라하고 又鄭康成云 得諸傅巖이라 高宗因以傅命說爲氏라하다
說文𡕥部에 引書敍釋之하여 云 傅巖은 巖穴也라하다 僞古文說命에 云 說築傅巖之野라한대
僞孔傳
에 云 傅氏之巖
은 在虞虢之界
하니 通道所經
에 有澗水壞道
라 常使
刑人
으로 築護此道
라
說賢而隱하여 代胥靡築之하여 以供食이라한대 孔疏에 引皇甫謐하여
云 高宗이 夢天賜賢人할새 胥靡之衣를 蒙之而來하고 且曰 我徒也라 姓傅名說이라한대 明以夢示百官하니 百官皆非也라
乃使百工寫其形象하여 求諸天下하니 果見築者胥靡衣褐帶索하고 執役於虞虢之間傅巖之野하니 名說이라
以其得之傅巖하여 謂之傅說이라하다 水經河水注에 云 沙澗水는 出虞山하여 東南逕傅巖하여
歷傅說隱室前한대 俗謂之聖人窟이라하다 史記殷本紀에 傅巖은 作傅險하니 音近字通이라
湯임금이 그를 얻어서 발탁하여 자신의 재상으로 삼아 함께 천하의 정권을 쥐고 천하의 인민을 다스렸다. 傅說은 거친 베옷을 입고 새끼줄을 허리에 두르고 傅巖의 성을 쌓는 공사장에서 품을 팔았는데,
注
畢沅:‘庸’은 ≪史記索隱≫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傭’으로 썼다. ≪尙書≫ 〈說命〉 孔安國의 傳에 “傅巖은 虞와 虢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고,
≪史記索隱≫에서는 “河東 太陽縣에 있다. 또 夏靖의 書에 이르기를 ‘倚氏 60리 지점 黃河의 西岸의 吳阪 아래에서 隱穴을 찾았다.’라 하니
이는 傅說이 몸을 숨긴 곳이다.”라 하였다. 생각건대 지금 山西 平陸縣 동쪽 25리 지점이다.
詒讓案:≪史記索隱≫ 〈賈誼傳〉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被’를 ‘衣’라 하고 ‘乎’를 ‘於’라 하였는데 뜻은 모두 통한다.
≪尙書≫ 〈說命〉의 〈書敍〉에 “高宗이 꿈에 傅說을 보고서 百工들에게 재야에서 찾게 하여 傅巖에서 傅說을 얻었다.”라 하였는데,
孔穎達이 疏에서 馬融의 설을 인용하여 “高宗이 비로소 명을 내려 傅氏가 되게 하였다.”라 하였고, 또 鄭玄의 설을 인용하여 “傅巖에서 얻었으니 高宗이 이로 인하여 傅說에게 ‘傅’를 氏로 삼게 하였다.”라 하였다.
≪說文解字≫ 〈𡕥部〉에서 〈書敍〉를 인용하면서 이를 해석하여 “傅巖은 巖穴이다.”라 하였다. ≪僞古文尙書≫ 〈說命〉에 “說이 傅巖의 들판에서 성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僞孔安國傳에서 “傅氏의 바위는 虞와 虢의 경계에 있으니, 큰 길이 지나가는 곳에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있어 길을 망가뜨리는지라 항상 胥靡를 시켜 이 길을 고치게 하였다.
傅說은 현자로서 몸을 숨겨 胥靡를 대신하여 이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였다.”라 하였는데, 孔穎達이 疏에서 皇甫謐의 설을 인용하여
“高宗이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어진 사람을 내려 胥靡의 옷을 입혀 보내오면서 ‘나의 무리이다. 성은 傅이고 이름은 說이다.’라 하였다. 다음날 高宗이 百官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는데, 百官 중 그런 사람은 없었다.
이에 百工들에게 그의 形象을 그려 천하를 뒤져 찾게 하였는데 과연 성을 쌓는 이들 중에 胥靡로서 거친 베옷을 입고 새끼줄을 허리에 두르고 虞와 虢의 사이의 傅巖의 들에서 복역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으니 이름이 說이었다.
그를 얻은 곳이 傅巖이라 그를 傅說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水經注≫ 〈河水〉에 “沙澗水는 虞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傅巖을 지나면서
傅說이 숨어 있던 집 앞을 거치니 세상 사람들은 이를 ‘聖人窟’이라 한다.”고 하였다. ≪史記≫ 〈殷本紀〉에는 ‘傅巖’이 ‘傅險’으로 되어 있는데, 음이 비슷하고 글자의 뜻이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