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畢云 孔書에 作弗用靈制以刑하니 靈練과 否弗과 折制는 音同이라하다
錢大昕云 古書에 弗與不同하며 否卽不字라 靈練聲相近이라
緇衣에 引作匪用命이라한대 命은 當是令之譌이니 令與靈은 古文多通用이라
令靈은 皆有善義라 鄭康成注禮에 解爲政令하니 似遠이라하다
云 古音
에 靈讀若連
하다 故
로 轉爲練也
하며 折爲制
하니 古字亦通
하다
古文論語에 云 片言可以折獄이라한대 魯論에 折作制하니 是也라하다
段玉裁云 靈作練者
는 也
라 依墨子上下文觀之
컨대 練亦訓善
하니 與孔正同
이라하다
詒讓案 僞孔傳
에 云
이 習蚩尤之惡
하여 不用善化民而制以重刑
이라 三苗
는 帝堯所誅
라한대
呂刑及緇衣孔疏에 引書鄭注하여 云 苗民은 謂九黎之君也라 九黎之君이 於少昊氏衰에 而棄善道하고 上效蚩尤하여 重刑하다
必變九黎言苗民者는 有苗가 九黎之後일새니라 顓頊이 代少昊誅九黎하고 分流其子孫하여 爲居於西裔者가 三國이라
至高辛之衰하여 又復九黎之君惡한대 堯興하여 又誅之라 堯末에 又在朝라가 舜時又竄之하다
後禹攝位에 又在洞庭逆命하니 禹又誅之하다 後王深惡此族三生凶惡이라 故로 著其氏하되 而謂之民이라하니
民者
는 冥也
니 言
見仁道
라하다 又鄭緇衣注
에 云 命
은 謂政令也
라 高辛氏之末
에 諸侯有三苗者作亂
하다
其治民不用政令
하고 專制禦之以嚴刑
이라가 乃作
하고 以是爲法
이라하다
案 鄭書禮二注不同하고 書注與此合하고 於義爲長이라 戰國策魏策에 吳起云 昔者三苗之居는 左彭蠡之波하고
恃此險也하여 爲政不善이라 而禹放逐之하다 史記吳越傳에 作左洞庭右彭蠡라하며
五帝本紀張守節正義에 據彼하여 云 今江州鄂州岳州가 三苗之地也라하다 案 古三苗國은 當在今湖南湖北境이라
注
畢沅:≪僞古文尙書≫에는 “弗用靈 制以刑”으로 되어 있으니, ‘靈’과 ‘練’, ‘否’와 ‘弗’, ‘折’과 ‘制’는 音이 같다.
錢大昕:옛 글에 ‘弗’은 ‘不’과 같으며, ‘否’는 곧 ‘不’자이다. ‘靈’과 ‘練’은 소리가 서로 비슷하다.
≪禮記≫ 〈緇衣〉에 “匪用命”이라 하였는데, ‘命’은 마땅히 ‘令’의 誤字이니, ‘令’과 ‘靈’은 古文에서 흔히 글자를 통용한다.
‘令’과 ‘靈’은 모두 ‘좋다[善]’는 뜻이 있다. ≪禮記≫ 鄭玄의 注에 〈‘令’을〉 ‘政令’으로 풀었으니, 옳지 않은 듯하다.
王鳴盛:古音에 ‘靈’은 ‘連’과 같이 읽는다. 그러므로 轉變하여 ‘練’이 되고 ‘折’은 ‘制’가 되었으니, 古字에 또한 글자를 통용하였다.
≪古文論語≫에 “片言可以折獄”이라 하였는데, ≪魯論≫에는 ‘折’이 ‘制’로 되어 있으니, 이것이다.
段玉裁:‘靈’이 ‘練’으로 되는 것은 雙聲이다. ≪墨子≫의 앞뒤 글에 의거하여 살펴보면 ‘練’ 역시 ‘善’으로 풀이하였으니, 孔安國의 說과 똑같다.
詒讓案:≪僞古文尙書≫의 僞孔安國傳에 “三苗의 임금이 蚩尤의 惡行을 답습하여 善으로써 백성을 교화하지 않고 무거운 刑으로써 통제하였다. 三苗는 帝堯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라 하였는데,
≪書經≫ 〈呂刑〉 및 ≪禮記≫ 〈緇衣〉 孔穎達의 疏에 ≪書經≫ 鄭玄의 注를 인용하여 “苗民은 九黎의 임금을 말한다. 九黎의 임금은 少昊氏가 쇠퇴했을 때, 善道를 버리고 위로 蚩尤를 그대로 따라하여 刑을 무겁게 하였다.
굳이 ‘九黎’를 ‘苗民’으로 바꾸어 말한 것은 有苗가 九黎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顓頊이 少昊를 대신하여 九黎를 주벌하고 그 子孫들을 나누어 유배 보내어 서쪽 끝자락에 살게 한 것이 세 나라이다.
高辛氏가 쇠퇴한 때에 이르러서 또다시 九黎의 임금이 惡해지니, 堯임금이 일어나 또 이들을 誅伐하였다. 堯임금 말엽에 다시 朝廷에 있었다가 舜임금 때에 다시 이들을 쫒아내었다.
이후에 禹임금이 攝位할 때 다시 洞庭에서 命을 거스르자 禹임금이 또 이들을 誅伐하였다. 후대의 王이 이 족속이 세 번 흉악함을 일으킨 것을 매우 미워하였기 때문에 氏를 붙이되 ‘民’이라고 하였다.
‘民’이란 ‘冥(몽매하다)’이라는 뜻이니, 仁道를 아직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라 하였다. 또 ≪禮記≫ 〈緇衣〉 鄭玄의 注에 “‘命’은 政令을 말한다. 高辛氏 末葉에 諸侯 중에 三苗가 亂을 일으켰다.
그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政令을 쓰지 않고 오로지 嚴刑으로만 제어하다가 급기야 蚩尤의 五虐의 刑을 지어 이로써 法을 삼았다.
案:≪書經≫ 鄭玄의 注와 ≪禮記≫ 鄭玄의 注가 같지 않은데, ≪書經≫의 注가 ≪墨子≫의 이 대목과 합치하며, 뜻에 있어서는 더 낫다. ≪戰國策≫ 〈魏策〉에 “吳起가 이르기를 ‘옛날 三苗가 살던 곳은 왼쪽으로는 彭蠡의 파도가,
오른쪽으로는 洞庭의 물이 있었으며, 文山이 그 남쪽에 있고 衡山이 그 북쪽에 있으니,
이러한 지형의 험준함을 믿고서 政事를 베푸는 것이 善하지 않았으므로 禹임금이 이들을 쫒아내었다.’라 하였다.”라 하였다. ≪史記≫ 〈吳越傳〉에는 “左洞庭 右彭蠡”라 하였으며,
≪史記正義≫ 〈五帝本紀〉에서 張守節이 저것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江州와 鄂州와 岳州가 三苗의 땅이다.”라 하였다. 생각건대, 옛날 三苗의 나라는 마땅히 지금의 湖南과 湖北의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