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史記越世家에 云 其先은 禹之苗裔이고 而夏后帝少康之庶子也니 封於會稽하여 以奉守禹之祀라하다
吳越春秋에 云 少康이 恐禹迹宗廟祭祀之絶하여 乃封其庶子於越하고 號曰無餘라하다
水經漸江水注에 云 夏后少康이 封少子杼하여 以奉禹祠하여 爲越이라하니 則與帝杼로 同名이니 疑誤라
水經注에 又云 秦望山에 南有嶕峴하고 峴裏有大城하니 越王無餘之舊都也라
故吳越春秋
에 句踐
이 語范蠡曰 先君無餘
는 國在南山之陽
이라하니 則
亦兼據
說矣
라
但此云 出自有遽는 古籍無徵이라 國語鄭語에 云 羋姓은 夔越이라하니 與史記로 不同이라
吳語韋注에 云 越王句踐은 祝融之後요 允常之子니 羋姓也라하고 又引世本하여 亦云 越은 羋姓也라하다
漢書地理志顔注引臣瓚에 亦據世本하여 明越非禹後라
大戴禮記帝繫篇에 云 陸終産六子하니 其六曰季連니 是爲羋姓이라
季連産付祖氏하고 付祖氏産穴熊하여 九世至于渠라 婁鯀出自熊渠하여 有子三人이니
其孟之名이 爲無康이니 爲句亶王이요 其中之名이 爲紅이니 爲鄂王이요 其季之名이 爲疵니 爲戚章王이라
史記楚世家에 云 熊渠가 立其長子康하여 爲句亶王하고 中子紅하여 爲鄂王하고 少子執疵하여 爲越章王이라하여늘
孔廣森이 云 婁鯀은 或當爲夔越이니 越卽越章也라 戚章은 字形之誤라
詒讓案 以世本
과 帝繫證之
면 則國語之說
이 不爲無徵
이라 左僖二十六年傳
에 夔子曰 我先
熊摯
라하고
漢書古今人表及史記正義에 引宋均樂緯注하되 竝謂熊摯亦熊渠子라하다
竊疑夔越은 同出이니 孔說似可通이라 若然이면 此出自有遽는 或當云 出自熊渠니
猶帝繫云 婁鯀出自熊渠也라 渠遽는 聲近하여 古通用이라
注
≪史記≫ 〈越世家〉에 “그 선계는 禹의 후예이고 夏后帝 少康의 庶子이니, 會稽에 봉하여 禹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라 하였다.
≪吳越春秋≫에 “少康이 禹의 자취가 宗廟祭祀에 끊어질까 두려워하여 이에 그 庶子를 越에 봉하고 無餘라 이름하였다.”라 하였다.
≪水經注≫ 〈漸江水〉에 “夏后 少康이 少子 杼를 봉하여 禹의 제사를 받들게 하여 越로 삼았다.”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帝杼와 이름이 같으니 오류인 듯하다.
≪水經注≫에 또 “秦望山의 남쪽에 嶕峴이 있고 嶕峴 안에 큰 성이 있으니, 越王 無餘의 舊都이다.
그러므로 ≪吳越春秋≫에 句踐이 范蠡에게 말하기를 ‘나의 先君 無餘는 나라가 南山의 남쪽에 있었다.’라 하였다.”라 하였으니, 酈道元 또한 趙曄의 說을 아울러 의거한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出自有遽’라고 한 것은 古籍에 징험할 것이 없다. ≪國語≫ 〈鄭語〉에 “羋姓은 夔越이다.”라 하였으니 ≪史記≫와 같지 않다.
≪國語≫ 〈吳語〉 韋昭의 注에 “越王 句踐은 祝融의 후손이고 允常의 아들이니 羋姓이다.”라 하였고, 또 ≪世本≫을 인용하여 “越은 羋姓이다.”라 하였다.
≪漢書≫ 〈地理志〉 顔師古의 注에 臣瓚을 인용할 때도 ≪世本≫에 의거하여 越은 禹의 후손이 아님을 밝혔다.
≪大戴禮記≫ 〈帝繫〉편에 “陸終이 여섯 아들을 낳았다. 여섯째가 季連이니, 이가 羋姓이 되었다.
季連이 付祖氏를 낳고 付祖氏가 穴熊을 낳아 9世 뒤에 熊渠에 이르렀다. 婁鯀은 熊渠에서 나와 세 아들을 두었다.
맏이의 이름이 無康이니 句亶王이고, 둘째의 이름이 紅이니 鄂王이고, 막내의 이름이 疵이니 戚章王이다.”라 하였다.
≪史記≫ 〈楚世家〉에 “熊渠가 자신의 맏아들 康을 세워 句亶王으로 삼고, 中子 紅을 세워 鄂王으로 삼고, 少子 執疵를 세워 越章王으로 삼았다.”라 하였다.
이에 대해 孔廣森이 말하기를 “婁鯀은 혹 응당 夔越로 되어야 하니 越이 바로 越章이다. 戚章은 字形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다.”라 하였다.
詒讓案:≪世本≫과 ≪大戴禮記≫ 〈帝繫〉로 증명해보면 ≪國語≫의 설이 신빙성이 없지 않다. ≪春秋左氏傳≫ 僖公 26년에 夔子가 “우리 先王 熊摯”라 하였고,
≪漢書≫ 〈古今人表〉와 ≪史記正義≫에 宋均의 ≪樂緯注≫를 인용할 때 모두 熊摯를 일러 熊渠의 아들이라 하였다.
삼가 의심하건대, ‘夔’와 ‘越’은 出系가 같으니 孔廣森의 설이 통할 수 있을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의 ‘出自有遽’는 혹 응당 ‘出自熊渠’라고 해야 하니,
≪大戴禮記≫ 〈帝繫〉에서 “婁鯀은 熊渠로부터 나왔다.”라고 한 것과 같다. ‘渠’와 ‘遽’는 소리가 비슷하여 옛날에 통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