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畢云 蛩은 初學記에 引作鞏하며 一本에 亦作鞏하다 北堂書鈔後漢書注太平御覽에 俱引作卭하다
呂氏春秋安死
에 云 堯葬於穀林
이라한대 高誘曰 堯葬成陽
이어늘 此云穀林
은 成陽山下
에 有
林
이라하다
水經瓠子河注에 引帝王世紀하여 云 墨子에 堯北敎八狄하여 道死하니 葬鞏山之陰이라하며
山海經에 曰 堯葬狄山之陽하니 一名崇山이라하다 二說各殊나 以爲成陽近是堯冢也라
史記五帝本紀集解
에 云
에 曰 堯冢在濟陰城陽
이라한대 劉向曰 堯葬濟陰
이라하니 丘壟皆小
라
呂氏春秋에 曰 堯葬穀林이라한대 皇甫謐曰 穀林卽城陽이라하다
正義에 云 括地志에 云 堯陵은 在濮州雷澤縣西三里라하며
郭緣生述征記에 云 城陽東有堯冢한대 亦曰堯陵이요 有碑라하니 是也라하다
도중에 돌아가시니, 蛩山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
注
畢沅:‘蛩’은 ≪初學記≫에서 이 대목을 인용한 곳에 ‘鞏’으로 되어 있으며, 한 본에 또한 ‘鞏’으로 되어 있다. ≪北堂書鈔≫‧≪後漢書注≫‧≪太平御覽≫에 모두 이 대목을 인용한 곳에 ‘卭’으로 되어 있다.
≪呂氏春秋≫ 〈安死〉에 “堯를 穀林에서 장사 지냈다.”라 하였는데, 高誘는 〈注에서〉 “堯를 成陽에서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여기서 ‘穀林’이라고 하는 것은 成陽山 아래에 ‘穀林’이 있어서이다.”라 하였다.
詒讓案:≪後漢書≫ 〈趙咨傳〉의 李賢의 注에 “堯를 卭之山에서 장사 지냈다.”라 하였으며,
≪水經注≫ 〈瓠子河〉에서 ≪帝王世紀≫를 인용하면서 “≪墨子≫에 ‘堯가 북쪽으로 가서 八狄을 교화하다가 도중에 돌아가시니, 鞏山의 북쪽에 장례를 지냈다.’라 하였다.”라 하였으며,
≪山海經≫에 “堯를 狄山의 남쪽에 장사 지냈으니, 〈狄山은〉 일명 崇山이라고도 한다.”라 하였다. 두 설이 각각 다르나 成陽이 아마도 堯가 묻힌 곳으로 옳은 듯하다.
≪史記集解≫ 〈五帝本紀〉에 “≪皇覽≫에 ‘堯의 무덤이 濟陰 城陽에 있다.’라 하였는데, 劉向은 ‘堯를 濟陰에서 장사 지냈다.’라 하였으니, 무덤이 모두 작다.
≪呂氏春秋≫ 〈安死〉에 ‘堯를 穀林에서 장사 지냈다.’라 하였는데, 皇甫謐은 ‘穀林은 바로 城陽이다.’라 하였다.”라 하였다.
≪史記正義≫에 “≪括地志≫에 ‘堯의 陵은 濮州 雷澤縣 서쪽 3里에 있다.’라 하였으며,
郭緣生의 ≪述征記≫에 ‘城陽의 동쪽에 堯의 무덤이 있는데, 이 또한 堯陵이라 하며 碑가 있다.’라 하였으니, 옳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