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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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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하고 將以愚之하니라
[注]明 謂多巧詐하여 蔽其樸也
謂無知守眞하여 順自然也
65.2 民之難治 以其智多
[注]多智巧詐 故難治也
65.3 故以智治國 國之賊이요
[注]智 以智而治國 所以謂之賊者라하니 故謂之智也라하니라
民之難治 以其多智也 當務塞兌閉門하여 令無知無欲하니라
而以智術動民하면 邪心旣動하니
復以巧術防民之僞라도 民知其術하여 隨防而避之하니 思惟密巧하고 姦僞益滋하니
故曰 以智治國 國之賊也라하니라
65.4 不以智治國 國之福이라
知此兩者 亦稽式이라
常知稽式 是謂玄德이니 玄德 深矣 遠矣
[注]稽 同也
今古之所同則이니 不可廢 能知稽式 是謂玄德이니 玄德 深矣 遠矣
65.5 與物反矣
[注]反其眞也
65.6 然後 乃至於大順이니라


제65장은 ‘’란 말의 이중적 의미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어떠한 것의 방법을〉 안다’는 의미에서 ‘완성하다(to master)’는 의미와 ‘다스리다(to rule)’(이에 대해서는 제33장을 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상적인 군주는 백성들을 교육시키지 않는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주인’이지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게 된다. 만약 백성들에게 앎이 생기면 제49장에서 진술한 말로 ‘미소 짓는 아이들(smiling children)’이 될 자질을 잃게 될 것이다. 백성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과업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완수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대체로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또는 ‘스스로 그렇게’ 하는 한에서이다.
현대 심리학적인 방식으로 조어造語하여 표현해본다면 이러한 ‘자동반사성自動反射性(automaticity)’은 그들의 ‘위대한 유순함’의 뿌리이자 욕구와 충족되지 않는 소망으로부터의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기서 어리석음(dullness)이란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소박함’과 같이 그것은 와 부합한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자질이다. 백성들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된다. 이것은 백성들을 불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질서와 경쟁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유순함(compliance)’이라고 번역한 한자는 ‘’인데 이것은 ‘시내’와 ‘나뭇잎’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의 개념은 글자 그대로는 ‘흐름에 맡기고 가다.(to go with the flow)’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물위에 떠다니는 나뭇잎과 꼭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순함은 자유 또는 자기 결정의 결핍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고 차라리 수고스럽지 않고, ‘느긋한’ 자연적 운동(effortless and ‘easygoing’ natural motion)으로 이해된다.
옛날에 를 잘 행한 자는 백성을 현명하게 만들지 않고 어리석게 만들었다.
이란 꾀 많고 교묘히 속여 그 〈본래의〉 소박함을 가리는 것을 이른다.
는 꾀가 없고 참된 본성을 지켜 자연스러운 〈본성에〉 순응하는 것을 이른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백성이 꾀가 많기 때문이다.
꾀 많고 교묘히 속이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꾀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고,
는 꼼수[]와 같으니, 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나라의〉 해악이라 일컬으니 이 때문에 그것을 꾀라고 일컫는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꾀가 많기 때문이니, 마땅히 〈욕심이 나오는〉 구멍을 막고 문을 닫아 꾀가 없고 욕심이 없게 힘써야 한다.
꾀와 꼼수로 백성을 동원하면 사악한 마음이 발동하게 되니,
다시 교묘한 꼼수로 백성들의 거짓된 행동을 막더라도, 백성도 그 꼼수를 알아 막는 것에 따라 그를 피하게 되니 생각이 정밀하고 교묘해지고 간사함과 거짓이 더욱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꾀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다.”라고 했다.
꾀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이다.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은 또한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준칙이다.
늘 동일한 준칙을 아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 하니, 현묘한 덕은 깊고도 아득하다.
’는 ‘같다[]’는 뜻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이 본받는 것이니 폐할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준칙을 늘 아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일컬으니, 현묘한 덕은 깊고도 아득하다.
만물과 함께 〈참된 본성으로〉 되돌아가니
그 참된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크게 순응하는 데 이른다.


역주
역주1 (見)[智] : 저본에는 ‘見’으로 되어 있으나, 아래 두 注文에 ‘多智巧詐’, ‘以其多智也’로 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智’로 수정한 陶鴻慶의 설에 따라 ‘智’로 바로잡는다.
역주2 (治)[術]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바그너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以智術動民’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治’를 ‘術’로 보는데, 타당하므로 이를 따른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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