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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三百首(2)

당시삼백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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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懷古跡 其一〉
杜甫
天地間
事主終無賴
詞客哀時且未還
平生最蕭瑟
暮年詩賦動
[集評]○ 五首各一古迹 第一首古迹不曾說明 盖庾信宅也 借古迹以詠懷 非詠古迹也 - 明 王嗣奭, 《杜臆》 卷8
○ 其一 自蜀言之 則中原皆爲東北 支離猶云割裂 不相屬也
公在巫峽 棲于西閣
故云三峽樓臺 而淹日月 謂留滯多時也
五溪衣服 猶云左袵 而共雲山 謂同居也
說到羯胡 追溯其漂泊之由
公于此自稱詞客 盖將自比庾信 先用引起下句 而以己之哀時 比信之哀江南也
荊州有庾信宅 江關正指其地
公自蕭瑟 借詩以陶冶性靈 而借信以自詠己懷也 - 明 王嗣奭, 《杜臆》 卷8
○ 此詠懷也 與古跡無涉 與下四首亦無關會
通首以漂泊西南爲主句 首句 追言其由
三四 正詠飄泊 五六 流水 乃首尾關鍵
終無賴申支離 且未還起蕭瑟
末以庾信之懷況己懷也 卽子山 卽子美 - 淸 浦起龍, 《讀杜心解》 卷4의 2
○ 按舊說俱五詩例看 殊無具眼
杜臆疑首章不類 遂以爲五詩總冒 其說似是而非
古跡則人各其人 各事其事 與諸將一類 彼何以獨無冒乎
旣云冒矣 又謂其古跡則庾信宅也 一詩兩用 成何體裁
且詩中止言庾信 不言其宅 而宅又在荊州 公身未到 何得詠及之
自知不的 因以將至江陵爲言 枝梧特甚
至顧辰則謂因己懷而感古跡 黃生則謂因古跡而自詠懷 總緣胸中爲本章所碍 不得解脫 遂添幾許蛇足耳
予直以詩意詩法斷之 世或不以其言爲河漢也 - 淸 浦起龍, 《讀杜心解》 卷4의 2
○ 首章詠懷 以庾信自方也 上四 漂泊景況 下四 漂泊感懷 - 淸 仇兆鰲, 《杜詩詳注》 卷17
○ 五六 賓主雙關 蓋祿山叛唐 猶侯景叛梁
公思故國 猶信哀江南
首章拈庾信 從自敍帶言之耳
或因信曾居江陵宋玉故宅 遂通首指信
按子山自梁使周 被留不返 三峽五溪 踪跡未到 不當付會 - 淸 仇兆鰲, 《杜詩詳注》 卷17
○ 此五章乃借古跡以詠懷也
庾信避難 由建康至江陵 雖非蜀地 然曾居宋玉之宅
公之飄泊類是
故借以發端
次詠宋玉以文章同調相憐 詠明妃爲高才遇寄慨 先主武侯則有感於君臣之際焉
或疑首章與古跡不合 欲割取別爲一章 何其固也 - 淸 楊倫, 《杜詩鏡銓》 卷13
○ 五詩詠古卽詠懷 一面當作兩面看 其源出太沖詠史 - 淸 楊倫, 《杜詩鏡銓》 卷13


〈옛 자취를 읊으며 심회를 적다 첫 번째 시〉
두보
동북에 먼지 일 때 사방으로 흩어져
서남의 천지간을 떠돌아다니네
삼협의 누대에서 세월을 보내고
오계의 주민들과 운산에 함께 머무네
갈호가 임금을 섬겼으나 끝내 믿음을 저버렸으니
시인은 시대를 슬퍼하며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네
유신은 평생을 가장 쓸쓸하게 보냈지만
만년의 詩賦는 江關을 울리지 않았던가


역주
역주1 支離東北風塵際 : ‘支離’는 본래 부서져서 형체가 온전치 못한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거처가 정해지지 않아 流離한다는 뜻이다. ‘東北風塵際’는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던 시기를 가리킨다.
역주2 漂泊西南 : 杜甫는 蜀으로 들어간 후 兵亂으로 인해 成都와 梓州 사이를 오갔고, 마지막에는 三峽을 나와 雲安을 거쳐 夔州로 갔다.
역주3 三峽樓臺淹日月 : ‘三峽’은 長江三峽으로 瞿塘峽‧巫峽‧西陵峽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夔州 일대를 가리킨다. ‘淹’은 ‘오래 머문다.’는 뜻이고 ‘日月’은 세월을 지칭한다.
역주4 五溪衣服共雲山 : ‘五溪’는 고대의 五溪族을 말한다. 《水經注》 〈沅水〉조에 의하면, 武陵에 五溪가 있는데, 雄溪‧樠溪‧㶃溪‧酉溪‧辰溪가 그것이다. 일설에는 雄溪‧蒲溪‧酉溪‧沅溪‧辰溪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지역은 모두 蠻族의 거주지로 부락을 이루어 살았으므로 이들을 五溪蠻族이라 부르는데 지금 湖南省의 서부에 있다. 《後漢書》 〈南蠻傳〉에 “무릉의 五溪蠻族은 五彩의 의복을 좋아한다.[武陵五溪蠻 好五彩衣服]”고 하였다. 여기서는 기주 지방이 멀고 궁벽하여 옷을 입는 풍속이 中原과 다름을 말한 것이다.
역주5 羯胡 : 고대 북방의 소수민족인데, 여기서는 安祿山을 지칭한다. 안녹산은 본래 胡人으로, 唐 玄宗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東平郡王에 봉해진 후, 河北 諸道의 節度使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신을 들어 ‘羯胡’라 칭한 것이다.
역주6 庾信 : 字는 子山이며 南陽 新野(지금의 河南省 新野縣) 사람이다. 梁朝에서 벼슬하였는데 侯景이 반란을 일으키자 江陵으로 도망쳤다. 이때 梁 元帝의 명을 받아 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西魏를 이은 北周의 孝閔帝가 그에게 洛州刺史의 벼슬을 주고 그의 文才를 아껴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였다. 이 시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哀江南賦〉를 지었는데, 이것이 당대를 驚動시켰다. 여기서는 안녹산을 후경에 빗대고 시인 자신을 유신에 빗대어 말하였다.
역주7 江關 : 여기서는 荊州 江陵을 가리킨다. 梁 元帝가 강릉에 도읍하였는데, 庾信이 北周에 가기 전에 강릉에 산 적이 있다. 그가 살던 곳은 전하는 말에 宋玉의 옛 집이라고 한다.
역주8 左袵 :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민다는 뜻으로 미개한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論語》 〈憲問〉에 孔子가 말씀하기를 “管仲이 桓公을 도와 諸侯의 霸者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管仲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管仲 相桓公霸者侯 一匡天下 民到于今 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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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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