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
擧者
는 誦
하고 又約通大義
하며 하고 旁出入他經者
는 又誦數十萬言
이니 其爲業也勤矣
로다
於有司者
는 하고 由是進而累爲卿相者
가 常常有之
하니 其爲獲也亦大矣
로다
然吾未嘗聞有登第於有司而進謝於其門者하니 豈有司之待之也에 抑以公不以情일새 擧者之望於有司也도 亦將然乎아
其進而謝於其門也를 則爲私乎아 抑無乃人事之未思어나 或者不能擧其禮乎아
若牛堪者
는 思慮足以及之
하고 材質足以行之
로되 而又不聞其往者
는 ㄴ저
違衆而求識하고 立奇而取名은 非堪心之所存也니 由是而觀之컨대 若堪之用心은 其至於大官也不爲幸矣리라
堪은 太學生也요 余는 博士也라 博士는 師屬也니 於其登第而歸하야 將榮於其鄕也에 能無說乎아
이 序는 필시 牛堪이 擧主(자기를 천거한 사람)에게 사례하지 않았기 때문에 昌黎가 글을 지어 이렇게 말한 듯하다.
明經科에 應試하는 자는 수십만 字의 글을 외고 또 그 뜻을 대략 이해해야 하며, 고인의 言辭나 유사한 事例를 끌어다가 증거로 삼고 널리 다른 經書를 넘나드는 자는 또 수십만 자의 글을 외야 하니, 그 學業이 수고롭다 하겠다.
그러나 有司에게 뽑혀 급제한 자는 農地[民畝]를 떠나 관리가 되어 俸祿을 받고, 이로부터 승진을 거듭하여 卿相이 되는 자가 항상 있었으니, 얻는 것 또한 크다 하겠다.
그러나 나는 有司(考官)에게 뽑혀 과거에 급제하고서 그 有司의 門(집)에 찾아가서 謝禮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有司가 擧子를 대함에 公的으로 대하고 사사로운 정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有司에 대한 擧子의 期望(기대) 또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 집에 찾아가서 사례하는 것을 사사롭다고 여긴 것인가? 아니면 人事를 생각지 못하였거나, 혹은 그 예를 행할 수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牛堪으로 말하면 思慮가 人事에 미치기에 충분하고, 材質이 예를 행하기에 충분한데도 有司의 집에 찾아갔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은 그에게 아마[將]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다.
남달리 행동하여 알아주기를 구하고 기이하게 행동하여 명성을 취하는 것은 牛堪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로써 보건대 牛堪의 마음 씀이라면 그가 大官에 이르는 것이 요행이 아닐 것이다.
牛堪은 太學生이고, 나는 博士이다. 博士는 스승이니, 그가 급제하고 돌아가서 장차 그 고향을 榮譽롭게 하고자 하는데, 내 어찌[能]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篇의 文字는 뜻과 格式이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