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書
는 也
라 天子猶以爲
하야 不得朝夕視
라하야 하고
別置
하야 曰學士, 曰校理
라하고 常以寵丞相爲大學士
하고 其他學士皆
也
라
校理則用天下之名能文學者
하니 苟在選
이면 不計其
하고 하니라
由是集賢之書盛積하야 盡秘書所有라도 不能處其半하니라 書日益多하고 官日益重하니라
四年에 鄭生涵始以長安尉選爲校理하니 人皆曰 是宰相子로되 能恭儉守敎訓하고
好古義施於文辭者라 如是而在選하니 公卿大夫家之子弟其勸耳矣리라
愈爲博士也
에 始事相公於
하고 東都生也
에 事相公於東太學
이러니 今爲郞於都官也
하야 又事相公於居守
하니라
三爲屬吏
하야 經時五年
에 觀道德於前後
하고 聽敎誨於左右
하니 可謂
矣
로다
其高大遠密者
는 不敢
論也
나 其勤己而務博施
하고 以己之有
로 欲人之能
하니 不知古君子何如耳
라
今生始進仕
하야 獲重語於天下
로되 而
若不足
하니 眞能守其家法矣
라 其在門者可進賀也
로다
求告來寧하야 朝夕侍側하니 東都士大夫不得見其面이라
盛賓客以餞之하니라 旣醉에 各爲詩五韻하고 且屬愈爲序하니라
古人의 글은 이처럼 예스럽고 솔직하며 질박하고 혼후함이 있다. 지금 사람들을 대체로[類] 이런 글을 짓지 못한다.
秘書省은 御府이다. 天子께서는 오히려 외지고도 멀어서 아침저녁으로 가서 閱覽할 수 없다고 여겨, 비로소 圖書를 集賢殿에 모아놓고,
따로 校讐官을 두어 ‘學士’와 ‘校理’로 칭하고, 항상 총애하는 丞相을 大學士로 삼고, 그 밖의 學士도 모두 達官(高官)이었다.
校理는 문장과 학문이 능하다고 천하에 이름난 자를 뽑아 임용하였는데, 만약 그 선발에 들면 그 사람의 品階과 祿俸의 高下를 따지지 않고 오직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이로 인해 集賢殿에 圖書가 많이 쌓여, 秘書省이 소유한 도서를 다 계산해도 집현전 도서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책은 날로 더욱 많아지고 관직은 날로 더욱 중요해졌다.
元和 4년에 鄭生 涵이 비로소 長安尉에서 선발되어 校理가 되니, 사람들은 모두 “이 사람은 宰相의 자제이면서도 〈몸가짐이〉 恭儉하고 옛 敎訓을 준수하며,
古人의 의리를 文章에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이와 같으므로 선발에 뽑혔으니, 公卿大夫家의 子弟들은 응당[其]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博士로 있을 때에 祭酒로 계시던 相公(鄭涵의 부친 鄭餘慶)을 처음으로 섬겼고, 東都의 館學에서 學生들을 分敎할 때에 東都太學에서 相公을 섬겼더니, 이제 都官員外郞이 되어 또 居守(留守)로 계시는 相公을 섬기고 있다.
나는 세 차례 相公의 屬吏(下官)가 되어 5년을 보내는 동안, 상공의 앞뒤에서 상공의 道德을 우러러보았고 상공의 좌우에서 상공의 가르침을 들었으니, 가까이서 영향을 받아 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의 높고 큰 〈德行과〉 深遠하고 周密한 〈計謀는〉 감히 추측[隱度]해 논할 수 없으나, 그분이 자기의 직무에 근면하고 은혜를 널리 베풀기를 힘쓴 것과, 자기가 가진 〈德行을〉 남도 갖게 하고자 한 것은 옛 君子에 비해 어떤지 모르겠다.
지금 鄭生은 처음 出仕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소중한 인물이란 평가[語]를 받았으되, 마치 부족한 듯이 〈겸양하니,〉 참으로 그 家門의 법도를 잘 지킨다고 하겠다. 〈그러니〉 그 門下에 있는 나로서는 축하를 올릴 만하다.
鄭涵은 휴가를 받아 〈京師에서 洛陽으로〉 돌아와서 어버이를 뵙고는 아침저녁으로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며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東都의 士大夫들은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가 〈京師로 돌아가기 위해〉 떠나던 날에 東都에 分司한 관리와 留守의 從事(幕僚)들이 술과 안주를 싣고 와서 定鼎門 밖에 宴席을 마련하고서
많은 賓客들을 불러 모아 그를 전송하였다. 술이 거나하자, 많은 이들이 각각 五韻詩(10句의 詩)를 짓고서, 나에게 부탁해 序文를 짓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