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蘊藉沈着이라 大意以彤之爲人을 不待考其文而可見也라
讀書以爲學
하고 纘言以爲文
은 非以
也
라 盖學所以爲道
요 文所以爲理耳
니
苟行事得其宜하고 出言適其要면 雖不吾面이라도 吾將信其富於文學也로라
吾目其貌耳其言
하고 하니라 及其久也
하얀 果若不可及
하니라
吾見湖南之禮有加
하고 而同進之士交譽也
하니 又以信吾
之不失也
로라
如是而又問焉以質其學하고 策焉以考其文이면 則何信之有리오 故吾不徵於陳而陳亦不出於我하니라
凡吾
也久
로되 未見
有如陳生而不如志者
케라 於其行
에 姑以是贈之
하노라
함축되고 침착함이 있다. 大意는 陳彤의 사람됨을, 그의 문장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 학문을 하고 말을 엮어 문장을 짓는 것은, 읽은 책이 많고 지은 문장이 화려함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체로 학문을 하는 것은 道를 행하기 위함이고, 문장을 짓는 것은 이치를 설명하기 위함일 뿐이니,
가령 일을 행하는 것이 도의에 맞고 말을 하는 것이 요점에 맞는다면, 비록 내가 그를 만나보지 못했더라도 나는 장차 그가 문장과 학문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믿을 것이다.
潁川 사람 陳彤을 내가 楊湖南(湖南觀察使 楊憑)의 門下에서 처음 보았는데, 키가 훤칠하고 용모가 온화하였다.
나는 그의 용모를 보고 그의 말을 듣고는 이내[因] 그 사람됨을 알았는데, 그와 오래 교유하다 보니 과연 미칠 수 없을 것 같았다.
楊湖南은 사람들을 職務로 인해 가벼이 접촉하지 않았고, 명예를 다투는 자(楊憑에게 의지해 명성을 얻은 자)들은 文藝(문장)의 虛名으로 굴복하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유독 陳彤에게만〉 湖南이 더욱 예우하고 同進한 선비(同僚)들이 입 모아 칭찬하니, 또 이로 인해 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였다.
그런데도 또 물어서 그 학문을 검증[質]하고 시험[策]을 보여 그 문장을 考査(심사)한다면 어찌 그를 믿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陳彤에 대해 검증[徵]하지 않았고 陳彤 또한 내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옛사람이 이른바 “지혜로운 자를 위해 말해줄 수 있으나, 俗人에게 말해주기 어렵다.”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내가 이 일에 종사한 지 오래지만 擧進士 중에 陳生과 같은 자가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가 떠날 때에 우선 이 말을 序로 써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