當大曆世
하야 文辭獨行
하니 天下之欲
其先人功行取信來世者
는 咸歸韓氏
하니라
授余以其家科斗孝經
과 漢
官書
어늘 兩部合一卷
하야 愈寶蓄之而不暇學
하니라
後來京師
하야 爲四門博士
에 識
하니 歸公好古書
하야 能通之
하니라
愈曰 古書得其據依면 盖可講이라하고 因進其所有書屬歸氏하니라
元和來
로 愈亟不獲讓
하야 嗣爲銘文
하야 功德
하니라
思凡爲文辭宜略識字라하고 因從歸公乞觀二部書하야 得之하야 留月餘하니라
令進士
寫以留愈
하니 盖得其十四五
라 而歸其書歸氏
하니라
典雅(문사가 우아하여 천박하지 않음)하고 平實(소박하고 꾸밈이 없음)하다.
大曆 연간에 오직 나의 叔父(韓雲卿)의 文章만이 조정 안에 유행하니, 천하 사람 중에 그 先人의 功業과 行績을 記述[銘述]하여, 후세 사람들의 믿음을 받고 싶어 하는 자들은 모두 韓氏에게 와서 碑文을 청하였다.
이때
將作監 李陽氷이 홀로
篆書에 능하였고,
同姓 叔父 韓擇木이
八分을 잘 썼으니, 물어보지 않아도 〈비문을 지을 이와
篆額과
碑文을 쓸 이가〉 이분들임을 알 수 있다.
李陽氷의 篆書 韓擇木의 隸書
이와 같지 않은 비석은 중국[三服]에서 칭송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세 家門이 〈文과 筆을〉 자제에게 傳受하고 〈지금까지〉 서로 왕래한다.
貞元 연간에 내가 汴州의 幕府에서 董丞相을 섬길 때에, 開封令 李服之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李陽氷의 아들이었다.
그가 자기 집안에 전해오는 科斗文字로 쓰인 ≪孝經≫과 漢나라 衛宏의 ≪官書≫를 나에게 주기에 이 두 책을 合本해 한 권으로 만들고서, 나는 그 책을 보물로 여겨 간직하였으나 學習할 겨를이 없었다.
뒤에 京師로 와서 四門博士가 되었을 때에 歸登을 알게 되었는데, 歸公은 고대문자(隷書가 쓰이기 전의 옛 文字)를 좋아하고 능통하였다.
나는 “그 根據을 얻으면 고대문자를 講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내가 갖고 있던 책을 歸氏에게 주었다.
元和 이래로 나는 자주 사양할 수가 없어서 계속 墓碑銘과 墓碑文을 지어 功德을 찬양하였다.
나는 文辭를 지으려면 마땅히 古字를 대략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이어 歸公에게 두 부의 책을 볼 수 있도록 빌려달라고 〈청해〉 그 책을 빌려 가지고 와서 한 달이 넘도록 두고 보았다.
張籍이 進士 賀拔恕에게 筆寫하도록 시켜 나에게 주었는데, 대체로 열에 네댓은 알 수 있었다. 빌려온 책은 歸氏에 돌려주었다.
元和 11년(816) 6월 4일에 右庶子 韓愈는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