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之旨는 孟氏沒而周程始能言之라 昌黎原不見得일새 特按三家之言而剖析之如此라 然於天命之原엔 已隔一二層矣라
性也者
는 與生俱生也
요 情也者
는 接於物而生也
라 性之
有三
이나 而其
며 情之品有三
이나 而其所以爲情者七
이라
曰何也오 曰性之品有上中下三하니 上焉者는 善焉而已矣요 中焉者는 可導而上下也요 下焉者는 惡焉而已矣라
其所以爲性者五
니 曰仁, 曰禮, 曰信, 曰義, 曰智
라 上焉者之於五也
에 하고
中焉者之於五也
에 하야 其於四也混
하고 下焉者之於五也
에 反於一而
라
이니 情之品有上中下三
이라 其所以爲情者七
이니 曰喜, 曰怒, 曰哀, 曰懼, 曰愛, 曰惡, 曰欲
이라
上焉者之於七也
에 하고 中焉者之於七也
에 有所甚有所亡
이라 然而求合其中者也
라
下焉者之於七也
에 亡與甚
하야 也
니 情之於性視其品
이라
孟子之言性曰
이라하고 荀子之言性曰
이라하고 楊子之言性曰
이라하니라
夫始善而進惡과 與始惡而進善과 與始也混而今也善惡은 皆擧其中而遺其上下者也니 得其一而失其二者也라
堯之朱와 舜之均과 文王之管蔡는 習非不善也로되 而卒爲姦하고
瞽瞍之舜과 鯀之禹는 習非不惡也로되 而卒爲聖하니 人之性善惡果混乎아
故曰三子之言性也는 擧其中而遺其上下者也니 得其一而失其二者也라
曰 然則性之上下者는 其終不可移乎아 曰 上之性은 就學而愈明하고 下之性은 畏威而寡罪라
是故上者可敎而下者可制也
니 其品則
라 曰 今之言性者異於此
는 何也
오
曰 今之言者는 雜佛老而言也라 雜佛老而言也者가 奚言而不異리오
性의 뜻에 대해서는 孟子가 죽은 뒤로 周敦頤‧程顥‧程頤만이 비로소 말할 수 있었다. 昌黎는 원래 性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三家(孟子‧揚雄‧荀況)의 말을 고찰해 이와 같이 辨別한 것뿐이다. 그러나 天命의 근원에 대해서는 이미 한두 층의 膈膜(간격)이 있다.
性이란 출생과 함께 생겨난 것이고, 情이란 사물과 접촉하여 생기는 것이다. 性의 등급에는 셋이 있으나 性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다섯 가지이며, 情의 등급에는 셋이 있으나 情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일곱 가지이다.
무슨 뜻인가? 性의 등급에는 상‧중‧하 셋이 있다. 上等人의 性은 善할 뿐이며, 中等人의 성은 인도해서 상등이 되게 할 수도 있고 하등이 되게 할 수도 있으며, 下等人의 성은 惡할 뿐이다.
그 性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다섯 가지이니, 仁‧禮‧信‧義‧智이다. 상등인의 性은 이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仁)를 主로 삼아서 〈그 밖의〉 네 가지를 〈類推해〉 행하며,
중등인의 性은 다섯 가지 중에 어떤 한 가지가 지나치게 많거나 지나치게 적어서 〈그 밖의〉 네 가지도 뒤섞여 순수하지 못하며, 하등인의 性은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위반하여 〈그 밖의〉 네 가지도 亂雜[悖]하다.
性의 등급은 情의 등급과 같으니, 情에도 상‧중‧하 세 등급이 있다. 情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일곱 가지이니, 喜‧怒‧哀‧懼‧愛‧惡‧欲이다.
상등인의 情은 일곱 가지에 있어 항상[動] 中을 取하고, 중등인의 情은 이 일곱 가지에 있어 지나침[甚]이 있기도 하고 미치지 못함[亡]이 있기도 하지만 中에 부합하기를 구하고,
하등인의 정은 일곱 가지에 있어 미치지 못하거나 지나침이 있어서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니, 情의 등급은 性의 등급으로 인해 결정된다.
孟子는 性을 論하기를 “사람의 性은 善하다.”고 하고, 荀子는 性을 論하기를 “사람의 性은 惡하다.”고 하고, 楊子는 性을 論하기를 “사람의 性에는 善과 惡이 섞여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善하였으나 〈뒤에〉 惡해졌다는 것과, 처음에는 惡하였으나 〈뒤에〉 善해졌다는 것과, 처음에는 善과 惡이 섞여 있었으나 지금은 아예 善하거나 惡해졌다는 것은 모두 중등의 性만을 擧論하고 상등과 하등의 성을 빠뜨린 것이니, 그 하나만을 얻고 그 둘을 잃은 것이다.
叔魚가 출생하였을 때에 그 모친이 그를 보고서 그가 반드시 受賄罪로 죽을 줄을 알았고, 楊食我가 출생하였을 때 叔向의 모친이 그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그가 반드시 滅族의 禍를 부를 줄을 알았고,
越椒가 출생하였을 때에 子文이 크게 슬퍼하면서 若敖氏의 귀신(조상)이 제사를 받아먹지 못할 것을 알았으니, 사람의 性이 과연 善하다 하겠는가?
后稷이 출생할 때에 그 모친에게 〈産門이 찢어지는〉 災害가 없었고, 처음 기어 다닐 때부터 지혜가 있고 총명하였으며, 文王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에 모친은 근심이 없었고,
출생한 뒤에는 保傅가 수고로워하지 않았고, 進學한 뒤에는 스승이 귀찮아하지 않았으니, 사람의 성이 과연 惡하다 하겠는가?
堯의 아들 丹朱와 舜의 아들 商均과 文王의 아들 管叔‧蔡叔은 익히 본 것이 善이었으되 끝내 간악한 짓을 하였고,
瞽瞍의 아들 舜과 鯀의 아들 禹는 익히 본 것이 惡이었으되 끝내 聖人이 되었으니, 사람의 性에 善과 惡이 과연 섞여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세 사람이 性을 논한 것은 모두 중등의 性만을 擧論하고 상등과 하등의 성은 빠뜨린 것이니, 그 하나만을 얻고 그 둘을 잃은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등의 性과 하등의 성은 끝내 옮길 수 없는 것인가? 상등의 性을 지닌 사람은 배움으로 인해 〈도리가〉 더욱 밝아지고, 하등의 성을 지닌 사람은 威刑을 두려워해 죄를 적게 짓는다.
그러므로 상등의 性을 지닌 사람은 가르칠 수 있고, 하등의 性을 지닌 사람은 制約할 수 있으니, 그 등급으로 말하면 孔子께서 말씀하신 ‘不移(변화할 수 없음)’이다.
오늘날 性을 논하는 자들의 말이 이와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오늘날 성을 논하는 자들은 佛‧老의 說을 섞어서 性을 설명한다. 佛‧老의 說을 섞어서 말하는 것이 어찌 우리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