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二疏美少尹호되 而專於虛景簸弄이라 故出沒變化를 不可捉摸이라
昔
二子以年老
로 一朝辭位而去
하니라 于時公卿設供張
하고 都門外
하니
漢史旣傳其事하고 而後世工畫者又圖其迹일새 至今照人耳目하야 赫赫若前日事니라
國子司業楊君巨源이 方以能詩訓後進이러니 一旦以年滿七十으로 亦白丞相去歸其鄕하니라
世常說古今人不相及이나 今楊與二疏로 其意豈異也리오
로되 遇病不能出
하니 不知楊侯去時城門外送者幾人
이며 車幾兩
이며 馬幾疋
이며
道傍觀者亦有歎息知其爲賢
否
며 而太史氏又能張大其事爲傳
하야 繼二疏蹤跡否
아 不
否
아
見今世無工畫者
하니 而畫與不畫
는 固不論也
라 然吾聞楊侯之去
에 丞相有愛而惜之者
하야 白以爲
하야 不絶其祿
하고
又爲歌詩以勸之하니 京師之長於詩者亦屬而和之라하니라
又不知當時二疏之去에 有是事否아 古今人同不同을 未可知也라
中世士大夫以官爲家
하니 罷則無所於歸
하니라 楊侯
에 하야 歌
而來也
러니
今之歸에 指其樹曰 某樹는 吾先人之所種也요 某水某丘는 吾童子時所釣遊也라하리라
鄕人莫不加敬
하야 誡子孫以楊侯不去其鄕爲法
하리니 古之所謂
沒而可祭於
者
가 其在斯人歟
ㄴ저 其在斯人歟
ㄴ저
唐荊川曰 前後照應
하고 而
變化
를 不可言
이라 此等文字
는 蘇曾王集內無之
라
疏廣와 疏受 두 사람의 일로써 少尹을 찬미하면서 오로지 상상 속의 일로 문장을 엮었다. 그러므로 出沒하는 변화를 종잡을 수가 없다.
옛날에 疏廣과 疏受 두 분이 연로함을 이유로 어느 날 벼슬을 사양하고 떠나갔다. 이때 公‧卿이 장막을 치고 都城門 밖에서 祖道祭를 지내고서 餞別하니,
이때 모인 수레가 수백 채였고, 길에서 구경하던 자들 중에도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두 두 분의 어짊을 말하는 이가 많았다.
漢나라 史書에 이미 두 분의 일을 列傳에 記入하였고, 후세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들이 또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 열전과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耳目을 비추어 며칠 전의 일처럼 선명하다.
國子司業 楊君 巨源이 이때[方] 詩의 재능으로 後進을 가르치다가 어느 날 나이가 70에 찼다는 이유로 또한 丞相께 아뢰고 떠나 그 고향으로 돌아갔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지금 사람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楊巨源이 벼슬을 버리고 떠난 것이 두 疏氏의 뜻과 어찌 다르겠는가?
나는 분에 넘치게 官位가 公卿의 뒤에 있으면서도 병에 걸려 〈전별하는 자리에〉 나가지 못하였으니, 楊侯가 떠날 때에 城門 밖에서 전송하는 자가 몇 사람이었는지, 수레가 몇 輛이었는지, 말이 몇 필이었는지,
길에서 구경하는 자가 또한 탄식하면서 그의 어짊을 알았는지, 太史氏가 또 그 일을 확대해 傳을 지어서 두 疏氏의 업적을 이었는지, 落莫(쓸쓸함)하지는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지금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없으니, 그림을 그렸는지 그리지 않았는지는 본래 논할 것이 못 되지만, 내가 듣건대, 楊侯가 떠날 때에 丞相 중에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 계셔서 황제께 아뢰어 楊侯를 〈그의 고향〉 中都의 少尹으로 삼아 그 祿俸이 끊이지 않게 하고,
또 歌詩를 지어 권면하니, 京師의 詩에 능한 자들이 승상의 뒤를 이어 시를 지어 和答하였다고 한다.
또 두 疏氏가 떠나던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
中世의 士大夫들은 관청을 집으로 삼았으니, 관직에서 물러나면 돌아갈 곳이 없었다. 楊侯는 弱冠의 나이에 그 鄕邑의 추천을 받아 〈鹿鳴〉을 노래하며 〈京師로 와서 禮部試에 應試하였는데,〉
지금 돌아가시면 나무를 가리키면서 “아무 나무는 내 先人께서 심으신 것이고, 아무 물과 아무 언덕은 내가 어릴 적에 낚시질하고 노닐던 곳이다.”라고 하실 것이다.
그 고장 사람들은 더욱 공경하여, 자손들에게 “楊侯가 고향을 버리지 않은 것을 본보기로 삼으라.”고 경계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鄕先生이 죽으면 社에서 제사 지낸다는 것이 아마 이런 분에 해당할 것이다. 아마 이런 분에 해당할 것이다.
唐荊川이 말하였다. “앞뒤가 서로 호응하고 錯綜한 變化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文字는 蘇軾, 曾鞏, 王安石 등의 文集 안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