湘旁有廟하니 曰黃陵이라 自前古立하야 以祠堯之二女舜二妃者라
庭有石碑
나 斷裂分散在地
하야 其文剝缺
이라 考
言
컨대 漢荊州牧劉表景升之立
이요 題曰湘夫人碑
라하니라
今驗其文하니 乃晉太康九年이요 又其額曰虞帝二妃之碑라하니 非景升立者라
湘君者
는 堯之二女, 舜妃者也
라 ,
도 亦皆以二妃爲湘君
이라
而
에 旣有湘君
하고 又有湘夫人
이라 之解
에 以爲湘君者
는 自其水神
이요 而謂湘夫人
은 乃二妃也
라
從舜南征三苗不及하고 道死沅湘之間하니라 山海經曰 洞庭之山에 帝之二女居之라하니라
疑二女者帝舜之后
니 이라하고 因以二女爲天帝之女
라하니라
以余考之컨대 璞與王逸俱失也라 堯之長女娥皇爲舜正妃라 故曰君이요 其二女女英은 自宜降曰夫人也라
故九謌辭謂娥皇爲君
하고 謂女英帝子
하니 也
라 禮有
하니 明其正自得稱君也
라
書曰
라하야늘 傳謂舜昇道南方以死
라하고 或又曰 舜死葬蒼梧
하니 二
從之不及
하야 溺死沅湘之間
이라하니라
余謂
에 帝王之沒
을 皆曰陟
이라하니 陟
은 昇也
니 謂昇天也
라
書紀舜之沒云陟者가 與竹書周書同文也라 其下言方乃死者는 所以釋陟爲死也라
地之勢東南下하니 如言舜南巡而死면 宜言下方이요 不得言陟方也라
以此謂舜死葬蒼梧하고 於時二妃從之不及而溺者는 皆不可信이라
二妃旣曰以謀語舜하야 脫舜之厄하야 成舜之聖하니 堯死而舜有天下하야 爲天子는 二妃之力이니
宜常爲神하야 食民之祭라 今之渡湖江者는 莫敢不進禮廟下라
元和十四年春
에 余以
하야 爲潮州刺史
하니라 其地於漢南海之揭陽
으로 厲毒所聚
라 懼不得脫死
하야 過廟而禱之
니라
其冬에 移袁州刺史하니라 明年九月에 拜國子祭酒하니라
使以私錢十萬扺岳州하야 願易廟之圮桷腐瓦於刺史王堪하니라
長慶元年에 刺史張愉自京師往하니 與愉故善이라 謂曰 丐我一碑石이면 載二妃廟事하고 且令後世知有子名하리라 愉曰 諾이라하다
旣至州에 報曰 碑謹具라하야늘 遂篆其事俾刻之하니라
이 문장은 ≪爾雅≫와 ≪說文解字≫의 文體를 사용하였으니, 별개의 한 格調이다.
湘江 가에 ‘黃陵’이라는 廟가 있는데, 堯임금의 두 따님으로 舜임금의 두 后妃가 된 〈娥皇과 女英을〉 제사하기 위해 이미 옛날에 세운 것이다.
廟庭에 石碑가 있으나 끊어지고 갈라져서 땅에 여기저기 흩어졌고 글자는 깎이고 이지러져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圖記의 말을 상고하건대 “漢나라 荊州牧使 劉表 景升이 세운 것인데, ‘湘夫人碑’라고 쓰여 있다.”고 하였다.
지금 그 碑文을 검증해보니, 바로 晉나라 太康 9년이고, 그 碑額에 ‘虞帝(虞舜) 二妃의 碑’라고 하였으니, 景升이 세운 것이 아니다.
秦나라 博士가 始皇帝에게 말하기를 “湘君은 堯임금의 두 딸이고 舜임금의 두 后妃입니다.”라고 하였다. 劉向과 鄭玄도 모두 二妃를 湘君이라고 하였다.
〈離騷〉의 〈九歌〉에 湘君章이 있고, 또 湘夫人章이 있는데, 王逸의 注解에 “湘君은 본래 湘江의 水神이고, 湘夫人은 바로 두 后妃이다.
두 后妃가 남방의 三苗로 간 舜임금을 찾아가다가 이르지 못하고 沅江과 湘江 사이의 路上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山海經≫에 “洞庭의 山에 帝(堯)의 두 따님이 住居한다.”라고 하였는데,
郭璞은 “二女가 帝舜의 后妃라면 응당 작은 湘水로 下降하여 그 水神의 夫人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의심하면서 二女는 天帝(하느님)의 딸이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郭璞과 王逸의 說이 모두 옳지 않다. 堯의 長女 娥皇은 舜의 正妃이기 때문에 ‘君’이라 한 것이고, 그 次女 女英은 응당 스스로 낮추어 ‘夫人’으로 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九歌〉의 歌辭에 娥皇을 君이라 하고, 女英을 帝子라 한 것은 각각 二女의 성대한 것을 미루어 말한 것이다. ≪儀禮≫에 小君과 君母란 호칭이 있으니, 이는 正妃를 君으로 칭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尙書≫에 “舜이 巡狩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는데, 孔安國의 傳에 “舜이 남방으로 순수하는 길에 올랐다가 죽었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또 “舜이 죽자 蒼梧山에 장사 지냈는데, 두 后妃가 舜을 따르다가 미치지 못하여 沅江과 湘江 사이에 빠져 죽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竹書紀年≫에 “帝王의 죽음을 모두 ‘陟’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陟은 오름이니 하늘에 오름이다.
≪尙書≫에 “殷나라 禮는 제왕이 죽으면 하늘에 配享한다.”고 하였으니, 道로써 죽어 그 德이 하늘에 부합함을 말한다.
≪尙書≫에 舜의 죽음을 ‘陟’으로 기록한 것은 ≪竹書紀年≫ 및 ≪商書≫ 〈周書〉의 기록과 글자[文]가 같다. 그 아래에 “方乃死”라 말한 것은 ‘陟’을 ‘죽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땅의 형세는 동남이 낮으니, 만약 舜이 南巡하다가 죽은 것을 말했다면 응당 ‘下方’이라고 말했을 것이고 ‘陟方’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舜이 죽자 蒼梧山에 장사 지냈다는 說과 이때 두 后妃가 舜을 따르다가 미치지 못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는 說은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다.
두 后妃가 이미 計謀를 舜에게 말해주어 舜을 困厄에서 탈출시켜 舜을 聖人이 되게 했다고 하였으니, 堯가 죽은 뒤에 舜이 천하를 소유하여 천자가 된 것은 두 后妃의 힘이므로,
영원히 神이 되어 백성들의 제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날 洞庭湖와 湘江을 건너는 사람 중에 廟에 가서 〈두 后妃께〉 예를 올리지 않는 자는 없다.
元和 14년 봄에 나는 諫言을 올린 일로 죄를 얻어 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潮州는 漢나라 때의 南海 揭陽縣으로 전염병을 일으키는 독한 기운이 모인 곳이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黃陵廟를 지날 때에 二妃께 기도하였다.
그해 겨울에 나는 袁州刺史로 옮겼다. 이듬해 9월에 나는 國子祭酒에 제수되었다.
나는 사람을 시켜 나의 私錢 10만 냥을 岳州刺史 王堪에게 보내며 ‘〈이 돈으로〉 黃陵廟의 망가진 서까래와 썩은 기와를 바꾸기를 원하다.’고 하였다.
長慶 원년(821)에 張愉가 京師에서 그곳 刺史로 가게 되었는데, 나는 張愉와 오랜 벗이었기에 그에게 “나에게 碑石 하나를 〈마련해〉 주면 二妃廟의 사적을 기재하고, 또 후세로 하여금 그대의 이름을 알게 하겠네.”라고 하였더니, 張愉가 “그러겠다.”고 승낙하였다.
그가 岳州에 도착한 뒤에 “비석을 마련했다.”고 알려왔기에 드디어 그 일(二妃에 관한 일)을 서술하여 비석에 새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