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文用爾雅說文體하니 別是一調
湘旁有廟하니 曰黃陵이라 自前古立하야 以祠堯之二女舜二妃者
庭有石碑 斷裂分散在地하야 其文剝缺이라컨대 漢荊州牧劉表景升之立이요 題曰湘夫人碑라하니라
今驗其文하니 乃晉太康九年이요 又其額曰虞帝二妃之碑라하니 非景升立者
湘君者 堯之二女, 舜妃者也 , 亦皆以二妃爲湘君이라
旣有湘君하고 又有湘夫人이라 之解 以爲湘君者 自其水神이요 而謂湘夫人 乃二妃也
從舜南征三苗不及하고 道死沅湘之間하니라 山海經曰 洞庭之山 帝之二女居之라하니라
疑二女者帝舜之后 이라하고 因以二女爲天帝之女라하니라
以余考之컨대 璞與王逸俱失也 堯之長女娥皇爲舜正妃 故曰君이요 其二女女英 自宜降曰夫人也
故九謌辭謂娥皇爲君하고 謂女英帝子하니 禮有하니 明其正自得稱君也
書曰 라하야늘 傳謂舜昇道南方以死라하고 或又曰 舜死葬蒼梧하니從之不及하야 溺死沅湘之間이라하니라
余謂 帝王之沒 皆曰陟이라하니 昇也 謂昇天也
書曰 이라하니 言以道終하야 其德協天也
書紀舜之沒云陟者 與竹書周書同文也 其下言方乃死者 所以釋陟爲死也
地之勢東南下하니 如言舜南巡而死 宜言下方이요 不得言陟方也
以此謂舜死葬蒼梧하고 於時二妃從之不及而溺者 皆不可信이라
二妃旣曰以謀語舜하야 脫舜之厄하야 成舜之聖하니 堯死而舜有天下하야 爲天子 二妃之力이니
宜常爲神하야 食民之祭 今之渡湖江者 莫敢不進禮廟下
元和十四年春 余以하야 爲潮州刺史하니라 其地於漢南海之揭陽으로 厲毒所聚 懼不得脫死하야 過廟而禱之니라
其冬 移袁州刺史하니라 明年九月 拜國子祭酒하니라
使以私錢十萬扺岳州하야 願易廟之圮桷腐瓦於刺史王堪하니라
長慶元年 刺史張愉自京師往하니 與愉故善이라 謂曰 丐我一碑石이면 載二妃廟事하고 且令後世知有子名하리라 愉曰 諾이라하다
旣至州 報曰 碑謹具라하야늘 遂篆其事俾刻之하니라


03. 黃陵廟
이 문장은 ≪爾雅≫와 ≪說文解字≫의 文體를 사용하였으니, 별개의 한 格調이다.
湘江 가에 ‘黃陵’이라는 가 있는데, 임금의 두 따님으로 임금의 두 后妃가 된 〈娥皇女英을〉 제사하기 위해 이미 옛날에 세운 것이다.
廟庭石碑가 있으나 끊어지고 갈라져서 땅에 여기저기 흩어졌고 글자는 깎이고 이지러져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圖記의 말을 상고하건대 “나라 荊州牧使 劉表 景升이 세운 것인데, ‘湘夫人碑’라고 쓰여 있다.”고 하였다.
지금 그 碑文을 검증해보니, 바로 나라 太康 9년이고, 그 碑額에 ‘虞帝(虞舜) 二妃’라고 하였으니, 景升이 세운 것이 아니다.
나라 博士始皇帝에게 말하기를 “湘君임금의 두 딸이고 임금의 두 后妃입니다.”라고 하였다. 劉向鄭玄도 모두 二妃湘君이라고 하였다.
離騷〉의 〈九歌〉에 湘君章이 있고, 또 湘夫人章이 있는데, 王逸注解에 “湘君은 본래 湘江水神이고, 湘夫人은 바로 두 后妃이다.
后妃가 남방의 三苗로 간 임금을 찾아가다가 이르지 못하고 沅江湘江 사이의 路上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山海經≫에 “洞庭()의 두 따님이 住居한다.”라고 하였는데,
郭璞은 “二女帝舜后妃라면 응당 작은 湘水下降하여 그 水神夫人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의심하면서 二女天帝(하느님)의 딸이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郭璞王逸이 모두 옳지 않다. 長女 娥皇正妃이기 때문에 ‘’이라 한 것이고, 그 次女 女英은 응당 스스로 낮추어 ‘夫人’으로 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九歌〉의 歌辭娥皇이라 하고, 女英帝子라 한 것은 각각 二女의 성대한 것을 미루어 말한 것이다. ≪儀禮≫에 小君君母란 호칭이 있으니, 이는 正妃으로 칭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尙書≫에 “巡狩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는데, 孔安國에 “이 남방으로 순수하는 길에 올랐다가 죽었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또 “이 죽자 蒼梧山에 장사 지냈는데, 두 后妃을 따르다가 미치지 못하여 沅江湘江 사이에 빠져 죽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竹書紀年≫에 “帝王의 죽음을 모두 ‘’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은 오름이니 하늘에 오름이다.
尙書≫에 “나라 는 제왕이 죽으면 하늘에 配享한다.”고 하였으니, 로써 죽어 그 이 하늘에 부합함을 말한다.
尙書≫에 의 죽음을 ‘’으로 기록한 것은 ≪竹書紀年≫ 및 ≪商書≫ 〈周書〉의 기록과 글자[]가 같다. 그 아래에 “方乃死”라 말한 것은 ‘’을 ‘죽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땅의 형세는 동남이 낮으니, 만약 南巡하다가 죽은 것을 말했다면 응당 ‘下方’이라고 말했을 것이고 ‘陟方’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이 죽자 蒼梧山에 장사 지냈다는 과 이때 두 后妃을 따르다가 미치지 못하여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은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다.
后妃가 이미 計謀에게 말해주어 困厄에서 탈출시켜 聖人이 되게 했다고 하였으니, 가 죽은 뒤에 이 천하를 소유하여 천자가 된 것은 두 后妃의 힘이므로,
영원히 이 되어 백성들의 제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날 洞庭湖湘江을 건너는 사람 중에 에 가서 〈두 后妃께〉 예를 올리지 않는 자는 없다.
元和 14년 봄에 나는 諫言을 올린 일로 죄를 얻어 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潮州나라 때의 南海 揭陽縣으로 전염병을 일으키는 독한 기운이 모인 곳이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黃陵廟를 지날 때에 二妃께 기도하였다.
그해 겨울에 나는 袁州刺史로 옮겼다. 이듬해 9월에 나는 國子祭酒에 제수되었다.
나는 사람을 시켜 나의 私錢 10만 냥을 岳州刺史 王堪에게 보내며 ‘〈이 돈으로〉 黃陵廟의 망가진 서까래와 썩은 기와를 바꾸기를 원하다.’고 하였다.
長慶 원년(821)에 張愉京師에서 그곳 刺史로 가게 되었는데, 나는 張愉와 오랜 벗이었기에 그에게 “나에게 碑石 하나를 〈마련해〉 주면 二妃廟의 사적을 기재하고, 또 후세로 하여금 그대의 이름을 알게 하겠네.”라고 하였더니, 張愉가 “그러겠다.”고 승낙하였다.
그가 岳州에 도착한 뒤에 “비석을 마련했다.”고 알려왔기에 드디어 그 일(二妃에 관한 일)을 서술하여 비석에 새기게 하였다.


역주
역주1 黃陵廟碑 : 元和 14년(819) 봄에 한유가 佛骨을 맞이하는 일을 諫하였다가 憲宗의 미움을 사서 潮州刺史로 左遷되었다. 赴任 길에 岳州를 지나다가 黃陵廟로 가서 神靈의 도움을 빌었다.
同年 10월에 한유는 조주를 떠나 袁州刺史로 轉任되었고, 15년 10월에 부름을 받고 경성으로 와서 國子祭酒에 제수되었다. 이때 한유는 신령이 保佑해준 은혜에 감사하여, 한 편의 祭文을 써서 張德一을 파견해 악주 황릉묘로 가서 湘君과 湘夫人께 제사 지내게 하고, 자기의 돈 10만 냥을 가지고 가서 廟宇를 重修하게 하였다.
역주2 圖記 : 地理志를 가리킨다.
역주3 秦博士對始皇帝云 : ≪史記≫ 〈秦始皇本紀〉에 “상이 박사에게 물었다. ‘상군이 어떤 신인가?’ 박사가 대답하였다. ‘듣자니, 堯의 따님이고 舜의 아내인데, 이곳에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上問博士曰 湘君何神 博士對曰 聞之 堯女舜之妻而葬此]”라는 말이 보인다.
역주4 劉向 : 漢나라 楚元王의 4世孫으로 前漢 元帝 때에 光祿大夫를 지냈다. ≪新書≫, ≪說苑≫, ≪列女傳≫ 등의 著書가 있다. ≪列女傳≫ 〈有虞二妃〉에 “순이 순행하다가 창오에서 죽었는데, 호를 ‘重華’라 하였다. 두 비는 沅江과 湘江 사이에서 죽었는데, 세속에서 그를 ‘湘君’이라 한다.[舜陟方死於蒼梧 號曰重華 二妃死於江湘之間 俗謂之湘君]”라는 말이 보인다.
역주5 鄭玄 : 東漢의 經學者로 많은 典籍에 註釋을 달았다.
역주6 離騷九謌 : 屈原의 〈楚辭〉와 〈九歌〉에 湘君章과 湘夫人章이 있는데, 王逸의 ≪楚辭章句≫에 “상군을 상수의 신이라 하고, 상부인을 순의 次妃라 하였다.[以湘君爲湘水之神 湘夫人爲舜之二妃]”고 하였다.
역주7 王逸 : 東漢의 文學家로 ≪楚辭章句≫를 지었다.
역주8 郭璞 : 東晉의 學者로 ≪爾雅≫‧≪山海經≫ 등에 주석을 달았다. ≪山海經≫ 〈中山經〉 郭璞의 注에 “〈九歌〉를 고찰하건대, 상군과 상부인은 본래 두 神이다. 江湘에 부인이 있는 것이 河洛(洛水)에 虙妃가 있는 것과 같다.[按九歌 湘君湘夫人 自是二神 江湘之有夫人 猶河洛之有虙妃也]”고 하였다.
역주9 不當降小水爲其夫人 : ≪五百家注昌黎文集≫에 “오악은 三公과 같은 등급으로 제사하고, 사독은 제후와 같은 등급으로 제사한다. 지금 湘川은 사독만 못하여 命祀(祀典)에 禮秩(신의 등차에 따라 제례의 등급을 정함)이 없다. 二女는 제순의 후비로 神祇의 配位이니, 다시 小水로 내려와서 〈소수의〉 부인이 될 까닭이 없다. 小水는 바로 湘川을 이른다.[五嶽比三公 四瀆比諸侯 今湘川不及四瀆 無秩於命祀 而二女帝舜之后 配靈神祇 無緣當復下降小水而爲夫人也 小水卽謂湘川]”라고 하였다.
역주10 各以其盛者推言之 : 其盛者는 가장 성대한 호칭을 이른다. 장녀인 娥皇을 舜의 正妃라 하여 君이라 칭하고, 차녀인 女英은 堯의 딸이라 하여 帝子라 칭한 것을 이른다.
역주11 小君君母 : 小君은 諸侯의 어머니와 아내를 이른다. ≪儀禮≫ 〈喪服傳〉에 “임금의 어머니와 아내는 소군이다.[君之母妻 則小君也]”라는 말이 보인다. 君母는 諸侯의 庶子가 아버지의 適妻에 대한 호칭이다.
역주12 舜陟方乃死 : ≪尙書≫ 〈舜典〉에 “舜은 30세 때에 〈堯의〉 부름을 받아 任用되고, 30년 동안 신하의 자리에 있었고, 〈帝位에 오른 지〉 50년이 되던 해에 巡守의 길[方]에 올랐다가 죽었다.[舜生三十徵庸 三十在位 五十載舜陟方乃死]”라는 말이 보이는데, 孔安國의 傳에 “方은 道(길)이다. 舜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던 해에 南方 巡守 길에 올랐다가 蒼梧의 들에서 죽으니, 그곳에 장사 지냈다.[方 道也 舜卽位五十年 升道南方巡守 死於蒼梧之野而葬焉]”고 하였다.
역주13 (女)[妃] : 저본에는 ‘女’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妃’로 바로잡았다.
역주14 竹書紀年 : 晉 武帝 太康 2년(281)에 汲郡 사람이 魏 襄王의 墓를 도굴하여 얻은 冊名이다.
역주15 殷禮陟配天 : ≪尙書≫ 〈君奭〉에 보인다. 殷人의 禮는 帝王이 죽으면[陟] 天神에 배향하고 帝로 칭하였다는 말이다.
역주16 言事得罪 : 〈論佛骨表〉를 올린 일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