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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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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客形主로되 而立論奇高하고 造語怪偉하니 當是昌黎大文字
徐與秦俱出하니 爲嬴姓이라 하니라
하야 專用武勝이러니 遭世衰하야 無明天子하니 遂虎呑諸國爲雄하니라
諸國旣皆入秦爲臣屬하야 秦無所取利하니 上下相賊害타가하니라
徐處得地中하야 文德爲治러니 及偃王誕當國하야 益除去刑爭末事하고 凡所以一出於仁義하니라
當此之時하야 周天子穆王無道하야 意不在天下하고 好道士說하야
하야 騎之西遊하야하야 하니라
四方諸侯之爭辯者 無所하야於徐하야 于徐之庭者 三十六國이요 하니라
穆王聞之恐하야 遂稱受命하야하고 長驅而歸하야 하니라
徐不忍鬪其民하야 北走彭城武原山下하니 百姓隨而從之 萬有餘家
偃王死 民號其山爲徐山이라하고 鑿石爲室하야 以祠偃王하니라
偃王雖走死失國이나 民戴其嗣爲君如初하니라 祖孫相望하니라
自秦至今 名公巨人 繼跡史書하니라 徐氏十望 其九皆本於偃王이나 而秦後迄玆無聞家하니라
天於柏翳之緖 非偏有厚薄이라 施仁與暴之報 自然異也ㄹ새니라
衢州 故會稽太末也 民多姓徐氏하고 支縣龍丘 有偃王遺廟하니라
或曰 偃王之逃戰 不之彭城하고 之越城之隅하며 棄玉几硏於會稽之水라하고
或曰 徐子章禹旣執于吳 徐之公族子弟散之徐揚二州間하야 卽其居立先王廟云이라
開元初 相屬爲刺史하야 帥其部之同姓하야 改作廟屋하고 載事于碑하니라
後九十年 當元和九年하야 而徐氏放 復爲刺史하니라 放字達夫 前碑所謂今戶部侍郞 其大父也
春行視農할새 至于龍丘하야 有事于廟러니 思惟本原하야 曰 故制觕樸下窄하야 不足以揭虔妥靈하고
而又梁桷赤白하야 陊剝不治하고 圖像之威 䵝昧就滅하고 藩拔級夷하고 庭木禿缺이라
祈甿日慢하야 祥慶弗下하니 州之群支 不獲蔭庥 余惟遺紹하니
不卽不圖하야 以有資聚 罰其可辭 乃命因故爲新하니 衆工齊事하야
惟月若日 工告訖功이어늘 大祠于廟할새 하니라
是歲 州無怪風劇雨하고 民不夭厲하며 穀果完實하니
民皆曰 耿耿祉哉 로다 乃相與請辭京師하야 歸而鑱之於石하니라
辭曰
秦傑以顚하고
徐由遜緜이라
秦鬼久饑하고
徐有廟存이라
婉婉偃王
惟道之耽이라
以國易仁하야
爲笑于頑이라
自初擅命으로

歷短詈長하니
有不償亡이라
課其利害하면
孰與王當
姑蔑之墟
太末之里
誰思王恩하야
立廟以祀
王之聞孫
世世多有하니
唯臨玆邦하야
廟土實守
堅嶠之後
達夫廓之하야
王歿萬年

王孫多孝하야
世奉王廟
達夫之來
先愼詔敎하야
盡惠하고
不主於神이라
維是達夫
知孝之元이라
太末之里
姑蔑之城
廟事時修하야
仁孝振聲하니
宜寵其人하야
以及後生이라
嗟嗟維王이여
雖古誰亢
王死于仁하고
以暴喪이라
文追作誄하야
刻示茫茫하노라
按 偃王事不見傳記어늘 昌黎特採世所傳小說하야 撰次本末이라
而其議論歸本處 當以徐之公族子弟祠偃王於其土爲是


04. 衢州 徐偃王廟
으로서 주인을 드러내었는데, 논리를 세운 것이 奇高(기묘하고 高雅함)하고 말을 만든 것이 怪偉(怪異)하니, 昌黎大文字(뛰어난 문장)로 여겨짐이 마땅하다.
徐國秦國은 모두 柏翳에게서 나왔으니 이다. 두 나라는 때에 모두 大功이 있었다.
나라는 서쪽 변방에 위치하여 오로지 무력만을 사용해 승리를 취하였는데, 世道가 쇠한 때를 만나 밝은 天子가 없자, 마침내 여러 나라를 倂呑하고서 〈西方의〉 영웅으로 자처하였다.
여러 나라들이 모두 나라에 귀순[]해 신하가 되어 나라가 〈더 이상〉 이익을 취할 곳이 없게 되자 상하가 서로 해치다가 끝내 그 나라를 망치고 그 종족을 멸망시켰다.
徐國은 천하의 중앙(지금의 彭城)에 위치하여, 禮樂敎化[文德]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偃王 國政을 담당함에 미쳐 刑罰競爭 등 말단의 일을 더욱 제거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養育하고 사방(이웃나라)을 대우하는 방법을 하나같이 仁義로써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 天子 穆王이 무도하여 마음이 천하의 일에 있지 않고 道士邪說을 좋아하여
여덟 필의 駿馬를 타고서 서쪽으로 유람을 떠나 西王母와 함께 瑤池 가에서 잔치를 열어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돌아오기를 잊었다.
그러자 사방의 爭訟하는 諸侯들이 質正할 곳이 없어서, 모두 徐國賓服(귀순)하여 玉帛‧죽은 짐승‧산 짐승 등의 禮物을 가지고 와서 徐國廟庭에 늘어놓은 나라가 서른여섯이었다. 또 붉은 활과 붉은 화살 등 상서로운 물건을 얻었다.
穆王은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天命을 받았다고 하고서 造父에게 명하여 수레를 몰게 하여 먼 길을 달려 돌아와서 나라와 공모해 徐國을 토벌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언왕은 그 백성들을 차마 전쟁에 희생시킬 수가 없어서, 북쪽의 彭城 武源山 밑으로 도망가니 따르는 백성이 만여 였다.
偃王이 죽은 뒤에 백성들은 武源山徐山이라 호칭하고 바위를 깎아 石室을 만들고서 〈그 석실에서〉 偃王에게 제사를 올렸다.
偃王이 비록 도망해 〈타향에서〉 죽고 나라를 잃었으나, 백성들이 그 後嗣를 추대해 임금으로 삼아 받들기를 당초에 偃王을 받들 듯이 하였다. 駒王章禹祖孫이 서로 承繼하였다.
徐氏는〉 나라로부터 지금까지 명망 높은 貴人史書에 끊임없이 잇따랐다. 徐氏의 명망 있는 열 개 家門 중에 아홉 집은 모두 偃王의 후손인데, 나라의 후손 중에는 지금까지 명망 있는 가문이 없다.
이는 하늘이 柏翳의 후손들에 대해 치우치게 厚待하거나 薄待한 것이 아니라 仁政을 베풀고 暴政을 베푼 應報가 자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衢州는 옛날의 會稽 太末인데, 住民 중에 徐氏인 자가 많고, 衢州支縣(屬縣)인 龍丘偃王遺廟(古廟)가 있다.
혹자는 “徐偃王이 전쟁을 피해 도망갈 때에 彭城으로 가지 않고 越城邊境으로 가면서 玉几(옥으로 장식한 几案)와 벼루[]를 會稽의 물속에 버렸다.”고 하고,
혹자는 “徐子(나라 임금) 章禹나라에 잡혀간 뒤에 徐氏宗族子弟들이 徐州揚州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이 사는 곳에 先王를 세웠다고 한다.”고 하였다.
開元 초기에 徐氏 을 가진 두 사람이 연달아 衢州刺史가 되어, 그 부하 중에 同姓인 자들을 거느리고 徐偃王의 사당을 改築하고서 그 일을 비석에 기재하였다.
그로부터 90년 뒤인 元和 9년에 徐放이 다시 衢州刺史가 되었다. 徐放達夫로 전의 비석에 이른바 ‘지금 戶部侍郞’이 바로 그 祖父이다.
그는 봄에 순행하며 농사를 시찰할 적에 龍丘에 이르러 徐偃王廟에 제사를 올렸는데, 〈그때〉 本原(뿌리)을 생각하며 말하였다.
“옛 廟宇가 거칠고 소박하며 낮고 좁아서, 정성을 바치기에도 神靈을 안치하기에도 부족하며,
또 들보와 서까래의 색깔이 흐려지고 벗겨져서 얼룩얼룩한데도 수선하지 않았으며, 위엄스러워야 할 圖像(肖像)이 시커멓게 변해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주위의 울타리는 다 뽑히고 섬돌은 무너져 평지가 되었으며, 정원의 樹木은 마치 대머리처럼 가지가 거의 없다.
기도하는 백성들이 갈수록 게을러져서 神靈祥慶()을 내리지 않으시니, 本州에 거주하는 여러 支孫들이 신의 비호를 받지 못한다. 나는 바로[] 徐偃王의 후예[遺紹]로 이 政務를 주관하고 있으니,
廟宇改修하는 일을〉 착수[]하지도 않고 도모하지도 않으면서 재물만을 모은다[資聚]면 〈의〉 懲罰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에 명을 내려 옛 를 새롭게 改修하게 하니, 모든 工人이 일제히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무 달 아무 날에 工匠完工을 보고하니, 廟中에서 성대하게 제사를 거행할 적에 州吏로 있는 宗卿(宗人)이 모두 와서 순서대로 서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衢州에는 폭풍과 폭우가 없었고, 夭死하거나 전염병에 걸린 백성이 없으며, 곡식과 과실이 풍성하니,
백성들이 모두 “이 밝게 드러났음이여! 이 일이 묻혀 알려지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서, 이에 여러 사람이 함께 京師로 와서 碑文을 청해 받아 가지고 돌아가서 그 글을 비석에 새겼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나라는 포악하여 나라 망쳤고
나라는 겸손하여 오래도록 이어졌네
진나라 귀신은 오랫동안 굶었고
서나라 조상은 사당에서 제사 받았네
온화하고 유순하신 偃王
오직 만을 즐기셨네
나라를 仁義와 바꾸시어
흉악한 무리의 비웃음 사셨네
처음 멋대로 명한 때부터
이 몇 번이나 바뀌었든가
지속한 햇수는 짧고 욕먹는 기간은 기니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상할 수 없네
그 이해를 따져보면
누가 언왕을 당할손가
姑蔑의 유허는
太末의 지역이니
누가 언왕의 은혜 생각하여
사당 세워 제사하였는가
언왕의 명망 있는 자손
대대로 많이 있으니
이 고장의 자사로 와서
사당을 실로 수호하였네
徐堅徐嶠 이후에
達夫가 확장하여
언왕이 죽은 지 만년이건만
처음 祔祭할 때와 같네
언왕의 자손에 효손들 많아
대대로 언왕의 사당에 奉祀하네
달부가 와서
먼저 백성 교도하였네
廟民에게 은혜 극진히 베풀고
신을 받드는 일에만 정신을 쏟지 않았네
이 달부는
효도의 본원을 알아
태말의 마을과
고멸의 성에서
사당에 제사를 철마다 거행하여
仁孝하다는 명성 진동하였으니
응당 그 사람 총애하여
후손에까지 그 총애 미치리
아 언왕이시여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누가 필적할 수 있으리
언왕은 인을 위해 죽었으나
진나라는 포학으로 망하였지
문자로 추기해 誄文을 지어
비석에 새겨 아득한 후인에 보이노라
고찰하건대, 偃王의 일이 傳記에 보이지 않는데, 昌黎가 특별히 세상에 전하는 小說에서 뽑아서 그 본말을 순서에 따라 엮은 것이다.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논한 곳에 徐氏宗族子弟들이 偃王을 그 지역에서 享祀하는 것을 옳게 여긴 것이 당연하다.


역주
역주1 衢州徐偃王廟碑 : 徐偃王은 周 穆王 때의 徐나라 임금이다. 偃王의 사적은 ≪史記≫ 〈趙世家〉, ≪後漢書≫ 〈東夷傳〉, ≪荀子≫, ≪韓非子≫ 등에 보이는데, 그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한유는 史傳小說의 영세한 자료에 근거해 이 碑文을 지었으니, 창작이라 할 수 있다.
一本에는 “朝議郞守尙書考功郞中知制誥昌黎韓愈撰 福州刺史元錫書 元和十年十二月九日立(朝議郞 守尙書考功郞中 知制誥 昌黎 韓愈가 짓고, 福州刺史 元錫이 쓰다. 元和 10년(815) 12월 9일에 세우다.)”이라는 내용이 있다.
역주2 柏翳 : 徐氏는 嬴姓에서 나왔다. 皐陶가 伯益을 낳고, 백익이 若木을 낳았는데, 夏后氏가 약목을 徐에 봉하였다. 그 封地는 下邳 僮縣이다. 伯益이 어찌 公(韓愈)이 이른바 ‘伯翳’가 아니겠는가? ≪史記≫ 〈秦本紀〉에 “大業의 아들이 大費이니 바로 伯翳이다. 舜이 嬴을 姓氏로 주었다. 伯翳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大廉의 후손은 秦에 봉해지고, 若木의 후손은 徐에 봉해졌다.[大業之子曰大費 是爲伯翳 舜賜姓嬴氏 伯翳二子 大廉之後爲秦 若木之後爲徐]”라고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역주3 國於夏殷周世 咸有大功 : ≪史記≫ 〈秦本紀〉에 “大廉의 玄孫이 孟戱中衍인데, 殷나라 太戊帝가 그를 御者로 삼고,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太戊 이후로 中衍의 대까지 대대로 공을 세워 殷나라를 보좌하였다. 그러므로 嬴姓에 현자가 많아서 드디어 제후가 되었다. 若木의 현손 費昌이 夏桀 때에 夏나라를 버리고 商나라에 귀순하여, 殷나라의 御者가 되어 夏桀을 鳴條에서 敗北시켰으니, 이것이 大功이 있은 것이다.[大廉玄孫孟戱中衍 殷帝太戊以爲御而妻之 自太戊以下 中衍之世 遂世有功 以佐殷國 故嬴姓多賢 遂爲諸侯 若木玄孫費昌 當夏桀之時 去夏歸商 爲殷御 敗桀於鳴條 是有大功也]”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역주4 秦處西偏 : 中衍의 曾孫이 戎胥軒인데, 軒이 仲潏을, 潏이 飛廉을, 廉이 惡來를, 來가 女防을, 防이 旁皐를, 皐가 大几를, 几가 大駱을, 駱이 非子를 낳았는데, 周 孝王이 非子를 附庸國으로 삼아 秦에 都邑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서쪽 변방에 위치한 것이다. 서쪽 변방은 戎狄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오로지 무력만을 사용해 승리를 취한 것이다.[中衍曾孫曰戎胥軒 軒生仲潏 潏生飛廉 廉生惡來 來生女防 防生旁皐 皐生大几 几生大駱 駱生非子 周孝王以爲附庸 邑之於秦 是爲處西偏也 西偏迫近戎狄 故專用武勝] ≪五百家注昌黎文集≫
역주5 僨其國而沈其宗 : 僨은 망침이고 沈은 滅亡시킴이니, 곧 그 나라를 망치고 그 종족을 멸망시켰다는 말이다.
역주6 君國子民待四方 : 君國은 治國이고, 子民은 愛民이고, 待四方은 待四隣이다.
역주7 八龍 : 여덟 필의 駿馬를 이른다. ≪列子≫에 “주 목왕이 팔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서 멀리 서쪽의 곤륜산에 갔다.[周穆王駕八駿之乘 西征崑崙]”는 말이 보인다.
역주8 王母宴于瑤池之上 : 王母는 전설 속의 仙女 西王母를 이르고, 瑤池는 崑崙山 위에 있다는 신화 속의 못[池]을 이른다. 곤륜산은 그 높이가 2,500여 리라 한다.
역주9 歌謳忘歸 : ≪穆天子傳≫에 “穆王이 西王母를 만나 瑤池 가에서 술을 마실 때에 서왕모가 天子를 위해 노래하였다. ‘흰 구름 하늘에 떠 있고 산악들 멋대로 솟아 있네. 길은 아득히 먼데 산천이 가로막혔네. 장차 그대 죽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올 수 있겠소?’ 天子가 노래하였다. ‘내 동쪽으로 돌아가서 중국을 화평하게 다스려 만민이 고루 평화롭게 되면 내 그대를 보러 올 것이니, 3년에 미쳐 장차 그대의 村野로 되돌아올 것이오.’[穆王見西王母 觴于瑤池之上 母爲天子謠曰 白雲在天 山陵自出 道里悠遠 山川間之 將子無死 尙能一來 天子曰 予歸東土 和理諸夏 萬民平均 吾顧見汝 比及三年 將復而野]”라는 기록이 보인다. ≪五百家注昌黎文集≫
역주10 質正 : 是非曲直을 판가름함을 이른다.
역주11 賓祭 : 귀순함이다.
역주12 贄玉帛死生之物 : 贄는 古代에 祭祀, 혹은 會盟과 朝聘 때에 사용하던 圭璋과 束帛 등의 禮物이다. 死生之物은 제사에 쓸 희생을 이른다.
역주13 得朱弓赤矢之瑞 : 偃王이 배[舟]를 타고서 上國을 왕래하고자 陳과 蔡 사이에 運河를 뚫다가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고는 하늘이 내린 상서로 여겨, 드디어 이로 인해 이름을 ‘弓’이라 하고 偃王이라 자칭하였다. 이에 江淮 사이의 諸侯 중에 복종하는 나라가 36國이었다. ≪五百家注昌黎文集≫
역주14 造父(보) : 周 穆王의 御者이다. 趙氏의 始祖이다.
역주15 與楚連謀伐徐 : 未詳이다.
역주16 駒王章禹 : 모두 徐國의 祖先이다.
역주17 徐姓二人 : 徐堅과 徐嶠인데, 이들은 父子이다.
역주18 尸其土 : 尸는 主이니, 곧 윗자리에 있으면서 한 州의 政務를 주관한다는 말이다.
역주19 宗卿咸序應 : 宗卿은 徐氏의 宗人으로 州의 官吏가 된 자를 이르고, 咸序應은 모두 순서대로 서서 제사를 지냄이다.
역주20 其不可誣 : 誣에는 以有爲無(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듦)의 訓이 있으므로 ‘묻혀 알려지지 않음’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21 自初擅命 其實幾姓 : 처음에 楚 文王이 멋대로 周 穆王의 명을 핑계로 徐나라를 擊滅한 뒤부터 지금까지 이곳의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느냐는 뜻이다.
역주22 王歿萬年 如始袝時 : 徐偃王이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후손이 제사 지내는 정성은 처음 祔祭 때와 같다는 말이다. 祔祭는 삼년상을 마친 뒤에 그 신주를 조상의 신주를 모신 祠堂에 모실 때에 지내는 제사이다.
역주23 廟民 : 사당이 있는 衢州의 백성을 이른다.
역주24 : 秦나라를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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