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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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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有精爽이나 但句字生割하니 不免昌黎本色이라
王姓李氏 諱臯 字子蘭이요 謚曰成이라 其先王明 以太宗子러니 絶復封하야 傳五王至成王하니라
成王嗣封 在玄宗世하니 葢於時年十七八이라 紹爵三年 而河南北兵作하야 天下震擾하니
王奉母太妃逃禍民伍하야 得間走蜀從天子하니라 天子念之하사 自都水使者拜左領軍衛將軍이라가하니라
王生十年而失이라 哭泣哀悲하니 弔客不忍聞이라 喪除하고 委己於學하니라
稍長 重知人情하고 急世之要하야 恥一不通하니라 侍太妃從天子于蜀하니 旣孝旣忠하고 持官持身하니 內外斬斬이라
由是朝廷滋欲試之於民하니라 上元元年 除溫州長史하야 刺史事하니라
江東新刳於兵하고 郡旱饑하야하야 死無弔하니라
王及州하야 不解衣하고 下令掊鎻擴門하야 悉棄倉實與民하야 活數十萬人하니라
奏報하니 升秩少府하니라 하야 仍徙秘書兼州別駕라가 하니 하니라
法成令修하야 治出張施하니 聲生勢長하니라 觀察使噎媢不能出氣하야 誣以過犯하니 御史助之하야 貶潮州刺史하니라
하야 相德宗 還王于衡하야 하니라
王之遭誣在理 念太妃老하야 將驚而戚하야 出則囚服就辯하고 入則擁笏垂魚하야 坦坦施施하니라
卽貶于潮 以遷入賀하니라 及是然後 跪謝告實하니라
斂兵荊黔洪桂伐之 二年尤張이라 於是以王帥湖南하야 將五萬士하야 以討良爲事하니라
王至則屏兵하고 投良以書하야 中其忌諱하니 良羞畏乞降이나 進退하니라
王卽假爲使者하야 從一騎하고 踔五百里하야 扺良壁하야 鞭其門하고 大呼호되 我曹王來受良降이어늘
良今安在오하니 良不得已하야 迎拜하고 盡降其軍하니라
太妃薨 王棄部하고 隨喪之河南葬하니라 及荊 被詔責還하니라
會梁崇義反일새 王遂不敢辭以還하니라 升秩散騎常侍하니라
明年 李希烈反하니 遷御史大夫하야 授節帥江西以討希烈하니라 命至 王出止外舍하야 禁無以家事라하니라
裒兵大選江州하야 群能著職하고 王親敎之之法하고 하니라
艦步二萬人으로 以與賊하야 하야 踣之하고 剜蘄之黃梅하고 大鞣長平하고 鏺廣濟하고
掀蘄春하고 撇蘄水하고 掇黃岡하고 筴漢陽하니라 行跐汊川이라가 還大膊蘄水界中하야 披安三縣하야 拔其州하고 斬僞刺史하니라
標光之北山하고 𦧟隨光化하고 梏其州하니라 하야 하고 還開軍受降하니라 大小之戰 三十有二 取五州十九縣이라 民老幼婦女不驚하고 市賈不變하며 田之果穀 下無一跡이라 加銀靑光祿大夫 工部尙書라가 改戶部하고 하야 眞食三百이라 王之在兵 天子西巡于梁하니라 希烈北取汴鄭하고 東略宋圍陳하고 西取汝하고 薄東都하니라 王坐南方北向하야 落其하니 賊死不能入寸尺이라 亡將卒十萬이요 하니라
王始政於溫하고 終政於襄하니라 恒平物估하야 賤斂貴出하니 民用有經하니라 하고 使令하며 無所宿하니 府中不聞急步疾呼하니라 治民用兵 各有하니 世傳爲法하니라 偕盡其力能하니라 薨贈右僕射하니라 元和初 以子道古在朝 更贈太子太師하니라
道古 進士하야 司門郞하고 刺利, 隨, 唐, 睦이라가 徴爲少宗正兼御史中丞하고 以節督黔中하니라
朝京師 改命觀察鄂, 岳, 蘄, , 安, 黃하고 提其師以伐蔡하니라
且行 泣曰 先王討蔡하고 實取(汚)[沔], 蘄, 安, 黃하야 寄惠未亡이어늘 今余亦受命有事於蔡
而四州適在吾封하니 庶其有集하리라 先王薨于今二十五年이요
吾昆弟在而墓碑不刻無文 其實有待 子無用辭하라 乃序而詩之하노라

이라
하여
이라

以有成王이라
成王之作
一自其躬이라
文被明章하고
武薦畯功이라
하여
이라
以報于宗하고
以昭于王이라
王亦有子로되
處王之所하며
唯舊之視
하여
實取實로다
刻詩其碑하여
爲示無止하노라
昌黎每自喜陳言之去 故曹成王碑當亦屬公得意之文이라
而愚見則以務去陳言이라가 却行穿鑿生割하니 亦昌黎病處 特其識正而語確이라 故學者不能訾니라


05. 曹成王
문장에 精爽(정신)이 담겨 있으나 字句生割(생경)하니, 昌黎本色을 면치 못하였다.
曹成王李氏이고 이며 子蘭이고 이다. 그 先王 李明太宗의 아들로 曹王에 봉해졌는데, 〈李明이 죽은 뒤에〉 封國이 끊겼다가 다시 함을 받아 5를 전하여 成王에 이르렀다.
成王이 선왕의 封國承繼한 것은 玄宗 때이니, 그때 成王의 나이 열일고여덟이었다.
封爵을 승계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河南河北의 군대가 반란(安史)을 일으켜 천하가 진동하니,
成王母后太妃를 모시고 민간으로 피란하였다가 틈을 타 으로 도주하여 天子를 따랐다. 天子는 그를 귀여워해 都水使者에서 左領軍衛將軍에 제수하셨다가, 뒤에 國子司業 秘書少監으로 轉職시켰다.
成王은 열 살 때에 先王을 여위었는데, 하는 소리가 애절하니 弔問客들이 차마 들을 수 없었다. 喪期를 마치고는 富豪家 〈자제의 오만한〉 버릇을 통렬히 씻어버리고 자신을 학문에 맡겼다.
조금 자란 뒤엔 人情(民情)을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세간의 요긴한 일을 急務로 여겨 이 중에 하나라도 통달하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다.
太妃를 모시고 으로 가서 天子를 따랐으니 효도와 충성을 다한 것이고, 官職를 지키고 몸을 지켰으니 안과 밖이 整肅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더욱 그를 백성을 〈다스리는 地方官에〉 임용하고자 하였다.
上元 원년(760)에 溫州長史에 제수되어 刺史의 일을 兼攝하였다.
이때 江東은 새로 兵禍를 입었고, 溫州郡은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서 사람이 죽어도 弔喪하는 자가 없었다.
成王溫州에 부임하여 채 옷도 갈아입기 전에, 창고의 자물쇠를 깨부수고 창고문을 활짝 열어 창고 안의 糧穀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하여 수십만 인을 살렸다.
奏章을 올려 이 일을 보고하니, 품계를 올려 少府에 임명하였다.
袁賊(反賊 袁晁)을 討平함에 미쳐[] 秘書少監으로 승진하고 溫州別駕를 겸임하였다가 管轄區域[]이 無事하다고 보고하니, 정식으로 衡州刺史에 임명하였다.
衡州刺史가 되어서는〉 法規를 만들고 條令을 실행하여 정치가 張施(部署)에서 나오니 명성이 생기고 세력이 커졌다. 〈그러자〉 觀察使 辛京杲는 질투로 마음이 답답해[噎媢]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成王이 법을 범하였다고 무함하니, 御史가 관찰사를 도와 成王潮州刺史左遷시켰다.
楊炎道州를 떠나 조정으로 들어가 德宗宰相이 되어, 성왕을 衡州刺史로 복귀시켜 전에 당했던 억울한 무함을 씻어주었다.
성왕이 무함을 당해 審理를 받고 있을 적에 연로하신 太妃께서 놀라 슬퍼하실 것을 염려하여, 심리를 받으러 갈 때는 罪囚服을 입고 가서 변론하고, 돌아올 때는 을 끼고 魚符(魚形符信)를 차고서 편안하고 즐거운 모습을 지었다.
魚符(≪集古虎符魚符考≫)魚符(≪集古虎符魚符考≫)
潮州刺史로 좌천되었을 때에 太妃께 들어가서 승진되었다고 축하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무함을 벗은 뒤에야 태비께 무릎 꿇고 사죄하면서 사실을 고하였다.
당초에 觀察使 辛京杲가 포학하여, 衙將 王國良을 파견[使]해 변방을 지키게 하니, 王國良武岡縣에서 戍軍 만여 명을 이끌고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荊州黔州洪州桂州의 군대를 불러모아 叛軍을 토벌하였으나, 2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고〉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이에 成王湖南觀察使로 삼아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王國良을 토벌하게 하였다.
성왕은 戰地로 가서 즉시 부대를 철수시키고, 王國良에게 편지를 보내어 〈投降을 권하였는데〉 그가 꺼리고 숨기려는 것을 정확히 말하니, 王國良은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항복하고 싶어 하면서도 의심하여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성왕은 즉시 使者로 가장해 한 騎兵侍從으로 대동하고서 500리를 달려 王國良軍營으로 가서 채찍으로 그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부르기를 “나 曹王王國良의 항복을 받으러 왔는데,
王國良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니, 王國良은 깜짝 놀라[錯愕] 마지못해 나와 맞이해 절하고, 그 군대를 모두 항복시켰다.
太妃薨逝하자, 성왕은 官府의 일을 버리고[棄部] 喪柩를 모시고 河南으로 가서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荊州에 이르렀을 때에 〈돌아오라고〉 꾸짖는 詔書를 받고 돌아왔다.
이때 〈山南節度使梁崇義가 배반하였기 때문에 성왕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官階가 올라 散騎常侍가 되었다.
이듬해 〈淮寧軍節度使李希烈이 배반하니, 성왕은 御史大夫로 승진하여 江西節度使符節을 받고 가서 李希烈을 토벌하였다.
詔命이 이르자, 성왕은 바깥채로 나가 起居하며 “私家의 일을 나에게 고하지 말라.”고 禁令을 내렸다.
그리고 江西에 군사들을 한곳에 모아놓고서 대대적으로 人才를 선발하여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모두 관직을 주고서[著職], 성왕이 직접 摶力勾卒嬴越兵法을 가르치고, 패전하면 그 무리에게 벌을 내리고 승리하면 그 부대에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水軍陸軍 2만 명을 거느리고 과 교전하여 蔡山을 섬멸하여 무너뜨리고, 蘄州 黃梅縣에서 賊將의 목을 베고, 長平의 적을 유린하고 廣濟의 적을 무찌르고,
蘄春縣을 함락하고 蘄水縣을 공격하고, 黃崗縣을 탈취하고, 漢陽縣을 제압하였다.
汊川縣을 공격하려다가 돌아와서, 蘄水縣 경내에서 크게 교전하여 安州의 세 을 갈라놓고서[] 安州를 함락하여 적이 세운 刺史斬首하였다.
光山縣北山을 공격하고, 隨州光化縣을 점령하고서 隨州를 포위하였다.
未成年者 열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군사로 뽑아 隨州 동북의 厲鄕을 구원하고 돌아와서 軍門을 활짝 열고 적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번 토벌에〉 크고 작은 전투가 32차례였고, 공격해 탈취한 곳이 5 19이었다. 민간의 늙은이나 어린이, 부녀자들이 놀라지 않았고 시장의 물가에 변동이 없었으며, 과일나무 밑이나 곡식을 심은 전지에는 사람 발자국이 나지 않았다.
銀靑光祿大夫加資되어 工部尙書에 제수하였다가 戶部尙書改授되고, 다시 荊南襄州節度使가 되어 300食邑으로 받았다.
성왕이 軍中에 있을 때에 天子가 서쪽 梁州逃走[]하였다. 李希烈이 북쪽으로 汴州鄭州를 취하고, 동쪽으로 宋州를 약탈하고 陳州를 포위하고, 서쪽으로 汝州를 탈취하고서 東都 가까이 다가왔다. 성왕은 南方鎭守하다가 북쪽을 향해 〈進軍해〉 적의 정예군을 격파하니, 적은 죽을힘을 다해 공격하였으나, 한 치[] 한 자[]도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고, 사망한 將卒이 10만이었다. 李希烈이 점령했던 남방의 여러 들을 모두 收復되었다.
성왕은 溫州에서 政事를 시작하고 襄州에서 정사를 마쳤다. 그는 항상 物價를 안정시키는 데 〈뜻을 두어〉 값이 싸면 買入하고 값이 비싸면 放出하니, 백성들의 消費가 항상 일정하였다. 吏屬에겐 한마음이 되게 하고 백성에겐 법을 준수하게 하며, 집집마다 밝게 깨우쳐 간악한 자들이 몸을 숨길 곳이 없게 하니, 府中에 다급한 발자국소리나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군대를 부리는 데에 각각 조리와 次序가 있으니, 세상에서는 이것을 전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그가 임용한 馬彞와 장군 伊愼王鍔李伯潛도 모두 그 힘과 재능을 다하였다.
성왕이 薨逝하니 右僕射追贈하였다. 元和 초년에 그 아들 李道古가 조정의 官員이 되었으므로 다시 太子太師에 추증되었다.
李道古進士試에 급제하여 司門員外郞을 지내고, 利州隨州唐州睦州刺史가 되었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서 宗正寺少卿 兼御史中丞이 되었고 符節을 받아 黔中觀察使가 되었다.
京師로 와서 朝見하자 다시 鄂州岳州蘄州沔州安州黃州觀察使로 임명하고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蔡州의 〈吳元濟를〉 토벌하게 하였다.
李道古는 떠날 때에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先王(曹成王)께서 蔡州를 토벌하시고 沔州蘄州安州黃州를 취해 남기신 은혜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는데, 이제 나 또한 조정의 명을 받고 蔡州를 토벌하게 되었다.
利州隨州唐州睦州〉 네 가 마침 나의 관할이니 성공이 있기를 희망한다. 先王께서 薨逝하신 지 이제 25년인데,
우리 형제가 살아 있으면서도 墓碑를 새기지 않아 비문이 없는 것은 실로 그대를 기다려서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序文을 짓고 를 붙인다.
는 다음과 같다.
태종의 아들 열세 사람 중에
曹王의 서열이 가장 막내셨네
이미 죽은 이도 있고 미천한 이도 있어
조왕께서 비로소 王位에 오르셨네
의 첫 번째 왕께서는
축출을 겁내다가 유배 중에 자살하였고
零陵王黎國公
목숨 부지했단 말 듣지 못했네
조카와 숙부 번갈아 봉해져
세 왕이 빈 이름만 지니셨네
장구하게 백 년이 흐른 뒤에
비로소 成王께서 나오셨네
성왕께서 일어나신 것은
모두 자신의 능력이셨네
文治는 백성들에게 밝은 교화 입히고
武公은 나라에 큰 공을 바치셨네
죽어가는 초목 소생시키고 강한 세력 약화시키며
간사한 무리 누차 깨뜨리셨네
이로써 祖宗에 보답하고
성왕의 명성 드러내셨네
성왕 또한 아드님 두셨는데
성왕이 수복한 지방에 거처하며
오직 성왕의 옛 법을 지키셨네
일에 민첩하고 차례가 있어
공업을 이루어 선왕을 이으셨네
그 비석에 이 시를 새겨
끊임없이 나올 자손들에 보이노라
昌黎는 매양 진부한 말을 버리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曹成王碑〉 또한 의 뜻에 맞는 문장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진부한 말을 제거하는 데 힘쓰다가 도리어 견강부회하고 생잽이로 字句分割하였으니, 이 또한 昌黎의 결점이지만 그 식견이 바르고 말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헐뜯을 수 없다.


역주
역주1 曹成王碑 : 이 碑文은 元和 11년(816)에 지은 것이다. 이해 봄에 韓愈는 승진하여 中書舍人이 되었는데, 여름에 蔡州 討伐을 奏請한 일로, 執政者의 미움을 사서 右庶子로 轉任되었다.
이때 李臯의 아들 李道古가 京師에 왔다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蔡州의 吳元濟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한유를 보고서 자기의 부친 李臯의 碑文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한유는 나라를 사랑하는 그들 父子의 열성에 감복하였는데, 더구나 채주를 평정하는 것이 한유의 일관된 주장이었음에랴. 그러므로 이도고의 청구를 받아들여 이 비문을 지은 것이다.
역주2 國曹 : 曹王으로 封한 것이다.
역주3 貳國子秘書 : 貳는 副官을 뜻하는 말이고, 國子는 國子監을, 秘書는 秘書監을 가리키므로, 국자감의 부관은 國子司業을, 비서감의 부관은 秘書少監을 이른다.
역주4 先王 : 曹成王의 父王 李戢을 이른다. 開元 20년(732)에 李戢이 卒하였다.
역주5 刮磨豪習 : 刮磨는 때를 벗겨내고 깨끗이 닦아 윤이 나게 한다는 ‘刮垢磨光’의 준말로, 결점을 떨쳐버림이고, 豪習은 富豪家의 習氣(버릇)를 이르니, 곧 부호가 자제의 오만한 버릇을 통렬히 씻어냈다는 말이다.
역주6 : 本職 이외의 관직을 겸하여 처리[兼攝]함이다. ≪唐六典≫에 “官職에 임명함에 있어, 품계가 낮은데 높은 관직에 擬定하면 ‘守’라 하고, 품계가 높은데 낮은 관직에 의정하면 ‘行’이라 한다.[任官 階卑而擬高則曰守 階高而擬卑則曰行]”는 규정이 보인다.
역주7 : 俱(모두)와 皆(다)의 訓이 있다.
역주8 與平袁賊 : 與는 及이니, 곧 ‘袁賊을 討平함에 미쳐서’라는 말이다.
역주9 部告無事 : “溫州에는 앞서 가뭄으로 기근이 들었었는데, 지금 비로소 무사하게 되었다.[溫州前此旱飢 而今始無事也]”는 말이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
역주10 遷眞于衡 : 전에는 溫州長史로서 刺史의 일을 兼攝하였을 뿐이었는데, 이제 비로소 정식으로 衡州刺史로 升遷하였다는 말이다.
역주11 楊炎起道州 : 大曆 12년(777) 4월에 吏部侍郞 楊炎을 강등시켜 道州司馬로 삼았는데, 14년에 5월에 德宗이 즉위하여 楊炎을 불러들여 宰相으로 삼은 것을 이른다.
역주12 以直前謾 : 前謾은 전에 당했던 억울한 무함이고 直은 伸雪함이니, 곧 전에 당했던 억울함을 씻어버림이다.
역주13 觀察使虐……良以武岡叛 : ≪新唐書≫ 〈李臯傳〉에 “前任 觀察使[帥] 辛京杲가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部將 王國良을 파견해 武岡을 지키게 하고는 그의 많은 재산을 탐하여 즉시 死罪로 판결[劾]하니, 王國良은 두려워 武岡縣을 점거해 반란을 일으켰다.[前帥辛京杲貪虐 使部將王國良戍武岡 賴其富 卽劾以死 國良恐 據縣反]”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14 狐鼠 :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함이다. ≪新唐書≫ 〈李臯傳〉에는 ‘首鼠’로 되어 있다.
역주15 錯愕 : 뜻밖의 일로 깜짝 놀람이다.
역주16 : 告함이다.
역주17 摶力勾卒嬴越 : 摶力은 힘을 집결하는 秦나라 兵法이고, 勾卒은 다섯 명씩 서로 연결하는 越나라의 병법이고, 嬴越은 秦나라와 越나라의 軍事敎鍊法이다.
역주18 曹誅五畀 : “패전하면 罰이 그 무리(패전한 부대)에 미치고, 鹵獲物이 있으면 그 伍(승리한 부대)에 나누어줌이다.[敗則誅及其曹 有獲則分畀其伍]”라는 말이다. ≪唐宋八大家文鈔 校註集評≫
역주19 : 遇(만남)이다.
역주20 嘬鋒蔡山 : 嘬는 한입에 삼킴이니, 곧 蔡山의 적을 일거에 섬멸하는 것이다.
역주21 十抽一推 : 미성년자 10인 중에 1인을 군인으로 뽑음이다. 唐나라는 20세의 남자를 ‘丁’이라 하고, 20세 이하의 남자를 ‘推’라 하였다.
역주22 救(兵)[其]州東北(屬)[厲]鄕 : 저본에는 ‘救兵州東北屬鄕’으로 되어 있으나, ‘兵’이 ≪文章正宗≫에는 ‘其’로 되어 있고, ‘屬’이 方本에는 ‘厲’로 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여 ‘救其州東北厲鄕’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3 再換節臨荊及襄 : 貞元 원년 4월에 荊南節度使에 제수되고, 3년 윤5월에 襄州刺史‧山南節度使에 제수된 것을 이른다.
역주24 角距 : 소의 뿔과 닭의 며느리발톱인데. 精銳軍을 비유한다.
역주25 : 물어뜯음이니, 곧 공격의 뜻이다.
역주26 盡輸其南州 : 盡輸는 盡獻이니, 곧 李希烈이 점령했던 남방의 州들을 收復해 조정에 바쳤다는 뜻이다.
역주27 一吏軌民 : 吏屬들은 一心이 되게 하고, 백성들은 법을 지키게 하였다는 말이다.
역주28 家聽戶視 : 집집마다 들려주고 호호마다 보여줌이니, 곧 집집마다 일러주고 호호마다 깨우쳐주는 家喩戶曉와 같은 뜻이다.
역주29 姦宄 : 법을 어기고 반란을 일으킨 자를 이른다.
역주30 條次 : 조리와 차서가 있음이다.
역주31 馬彞將愼將鍔將潛 : ≪舊唐書≫ 〈李臯傳〉에 “裨將 이신‧이백잠‧유민이 모두 스스로 와서 귀의하니, 李臯는 그들의 詞氣(詩文의 기세)를 살피고, 그들의 공을 시험하여 모두 大將에 補任하고서, 왕악을 발탁해 중군을 맡기고, 마이와 허맹용을 賓佐(보좌)로 삼았다.[有裨將伊愼伊愼李伯潛劉旻皆自占 臯察其詞氣 驗其有功 悉補大將 擢王鍔委之中軍 以馬彛許孟容爲賓佐]”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32 (汚)[沔] : 저본에는 ‘汚’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沔’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33 太支十三 : 太宗의 支子(適長子 이외의 次子)가 13인이라는 말이다.
역주34 曹於弟季 : 曹成王이 막내라는 말이다.
역주35 或亡或微 : 이때 13형제 중에 이미 5인은 죽었고, 2인은 좌천되어 職位가 강등되었다.
역주36 曹始就事 : 就事는 就職이니, 곧 曹王 李明이 비로소 王의 職務를 맡았다는 말이다.
역주37 曹之祖王 : 祖는 始이니, 곧 曹의 첫 번째 王 李明을 이른다.
역주38 畏塞絶遷 : 李明이 廢太子 李賢의 일에 연루되어 零陵王으로 강등되어 黔州로 귀양 갔다가, 都督 謝祐의 핍박으로 자살하였다. 朱子의 ≪韓文考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고찰하건대, ‘畏塞絶遷’이라 한 銘文 네 자는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畏’는 畏死‧壓死‧溺死의 ‘畏’와 같고, ‘塞’는 ‘그 行步가 막히다.’의 ‘塞’와 같으니, 閉塞된 가운데에 殺害되고, 流配되었을 때에 封爵이 끊어졌다는 말인 듯하다.[今按 銘文四字 未詳其義 疑畏如畏厭溺之畏 塞如其行塞之塞 言見殺於閉塞之中 而封絶於遷謫之時也]”
역주39 零王黎公 : 零陵王 李俊과 黎國公 李傑을 이른다. 두 사람은 모두 李明의 아들이다.
역주40 不聞僅存 : 두 사람 모두 垂拱 연간에 則天武后에게 살해되었다.
역주41 子父易封 : 조카와 숙부가 번갈아 封爵된 것을 이른다. 子는 黎國公 李傑의 아들 李胤을 가리키고, 父는 李傑의 아우 李備를 가리킨다. 李胤에게 曹王의 뒤를 잇게 하였다가, 李備가 남방에서 돌아오자, 詔書를 내려 李胤을 封하는 일을 정지시키고서 李備를 봉하여 조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뒤에 李備가 죽자 다시 李胤을 봉하여 조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역주42 三王守名 : 三王은 李備‧李胤‧李戢을 이른다. 李戢은 李胤의 아들이다. 守名은 空名(虛名)이다. ≪五百家注昌黎文集≫에 “守名은 허명만 있을 뿐이란 말이다.[守名 但有空名耳]”라고 하였다.
역주43 延延百載 : 延延은 長久함이고, 百載는 百年이다. 李明이 처음 曹王에 봉해진 貞觀 21년(647)부터 李臯가 曹王을 承襲한 天寶 11년(752)까지가 모두 106년이다.
역주44 蘇枯弱強 : 蘇枯는 말라서 죽어가는 초목을 되살리는 것이니, 곧 戰亂에 곤란을 겪는 백성을 구제함을 비유한 것이다. 弱強은 강한 자를 약화시킴이니, 곧 豪強한 藩鎭의 세력을 약화시킨 것을 이른다.
역주45 齦其姦猖 : 齦은 깨물어 깨뜨림이고, 姦猖은 간악한 凶賊을 이르니, 곧 李希烈의 군대를 이른다.
역주46 蹶蹶陛陛 : 蹶蹶는 민첩한 모양이고, 陛陛는 차서가 있는 모양이니, 곧 일에 민첩하고 차례가 있음이다.
역주47 : 似承(계승)이니, 곧 노력해 功業을 이루어 前王을 계승함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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