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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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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條次戰功極鬯이라 然不及太史公遒逸이라
公諱燕이요 字燕奇 弘農華陰人也 大父知古 祁州司倉하고
文誨 天寳中實爲平盧衙前兵馬使하야 位至特進檢校太子賓客하고 封弘農郡開國伯하니라
世掌諸蕃互市하야 恩信著明하니 夷人慕之하니라
公年幾二十이라 進言于其父曰 大人守官하니 宜不得去어니와 王室在難하니 某其行矣리이다
其父爲之請于戎帥하야 遂率諸將校之子弟各一人하고 間道趨闕하야 變服詭行하야 日倍百里하니
天子嘉之하야 特拜左金吾衛大將軍員外置하고 賜勳上柱國하니라
寳應二年春하고 又從河北하니라
大曆八年 帥師納戎帥勉于滑州하니라 九年 從朝于京師하니라
建中二年 城汴州 功勞居多하니라 三年 從攻李希烈 先登하니라
貞元二年 從司徒劉公復汴州하니라 十二年 與諸將執以城叛者하야 歸之于京師하다
事平 授御史大夫하니 食實封百戸 賜繒綵有加하니라 十四年 年六十一 五月某日 終于家하니라
自始命左金吾大將軍으로 凡十五遷하야 爲御史大夫하니 職爲節度押衙右廂兵馬使 兼馬軍先鋒兵馬使 階爲特進이요
勳爲上柱國이요 爵爲淸邊郡王으로 自三百戶至三千戸하니 眞食五百戶 終焉하니라
從軍하야 四十餘年 敵攻無堅하고 城守必完이라
臨危蹈難이면 歔欷感發하야 乘機應會 捷出神怪하니라
不畏義死하고 不榮幸生이라 故其事君無疑行하고 其事上無間言하니라
僕射田公其母隔于冀州러니 公獨請往迎之하니라 經營賊城하고 出入死地하야 卒致其母하니
田公德之하야 約爲父子하니라 故公始姓田氏라가 田公終而後復其族焉하니라
嗣子通王屬良禎 以其年十月庚寅葬公于開封縣魯陵岡하고 隴西郡夫人李氏祔焉하니라
夫人 淸夷郡太守佑之孫이요 漁陽郡長史獻之女 柔嘉淑明이러니 先公而殂하니라 有男四人 女三人하니라
後夫人河南郡夫人雍氏 某官之孫이요 某官之女 有男一人 女二人이러니 咸有至性純行하니라
夫人同仁均養하니 親族不知異焉이라 君子於是知楊公之德 又行于家也니라
銘曰
烈烈大夫시여
逢時之虞하야
感泣辭親하야
從難于秦이라
維玆爰始하야
遂勤其事하야
四十餘年
或裨或專하야
攻牢保危하다
爵位已隮
旣明且愼하야
終老無隳하니라
魯陵之岡이요
蔡河在側이라
孝子
思顯勳績하니
斵石於此하야
式垂後嗣하노라


06. 淸邊郡王 楊燕奇
순서에 따라 戰功을 서술한 것이 매우 통창하다. 그러나 문장이 힘차고 분방한 것은 太史公에 미치지 못한다.
이고 燕奇인데, 弘農郡 華陰縣 사람이다. 大父(조부) 知古祁州司倉을 지냈고,
烈考(부친) 文誨天寳 연간에 平盧軍衙前兵馬使에 임명되어 官位特進檢校太子賓客에 이르렀으며 弘農郡 開國伯에 봉해졌다.
世代諸蕃(변경의 소수민족)과의 交易을 관장하였는데, 은덕과 신의가 드러나니 夷人(소수민족)들이 우러러 사모하였다.
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의 나이 20세에 가까웠는데 그 부친께 進言하기를 “아버님께서는 관직을 지키셔야 하니 응당 떠나실 수 없지만, 王室危難에 처하였으니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부친이 아들을 위해 戎帥(統帥)에게 요청해 〈허락을 받은 뒤에, 은〉 마침내 여러 將校들의 자제 중에 각각 한 사람씩을 데리고,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옷을 바꾸어 입고 비밀스럽게 행군하여 하루에 200리씩을 〈달려 황제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가니,
天子께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正員 외의 左金吾衛大將軍에 제수하고 上柱國勳爵을 내리셨다.
代宗 寳應 2년(763) 봄에 에게 조서를 내려 僕射 田公을 따라가 劉展을 평정하고, 또 田公을 따라가 河北을 함락[]하게 하였다.
代宗 大曆 8년(773)에 군대를 거느리고 戎帥(節度使) 李勉을 호위해 滑州로 들여보냈다. 9년에 戎帥를 따라 京師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였다.
德宗 建中 2년(781)에 汴州城 築造에 공로가 많았다. 3년에 戎帥를 따라 李希烈을 공격할 때에 먼저 城樓에 올라갔다.
貞元 2년(786)에 司徒 劉公(劉洽)을 따라 汴州를 수복하였다. 12년에 여러 장군이 叛亂者를 잡아 京師로 보냈다.
반란이 평정된 뒤에 御史大夫에 제수하니, 실제로 받아먹는 封戶가 100이고 추가로 繒綵를 하사하였다. 14년에 나이 61세로 5월 아무 날에 집에서 사망하였다.
처음 左金吾大將軍에 임명된 뒤로부터 모두 열다섯 차례 轉遷(승진)하여 御史大夫가 되었다. 官職節度押衙右廂兵馬使 兼馬軍先鋒兵馬使이고 官階特進이며,
勳級上柱國이고 爵位淸邊郡王으로, 명의상의 食邑은 300에서 3,000까지이지만 실제로 마지막에 받은 식읍은 500였다.
成童의 나이에 從軍하여 40여 년 동안, 적은 공격하면 굳게 버티는 자가 없었고, 성은 지키면 반드시 완전하였다.
危難을 당하면 탄식하고 분발하여 기회를 이용하고 시기를 맞추는 것이 귀신처럼 신속하였다.
의롭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요행으로 사는 것을 영예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임금을 섬길 때에 머뭇거리는 행동이 없었고 윗사람을 섬길 때에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당초에 僕射 田公母親冀州에 떨어져 있었는데, 이 홀로 冀州로 가서 맞이해 〈오겠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田公이 허락하자, 은 이에〉 賊城을 왕래하고 死地出入하여 마침내 그 모친을 모셔오니,
田公은 그의 德行에 감격하여 父子를 맺었다. 그러므로 이 처음에는 田氏로 썼다가 田公이 죽은 뒤에 본래의 으로 회복하였다.
通王의 부하[]로 있는 嗣子 良禎이 그해 10월 庚寅日開封縣 魯陵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隴西郡夫人 李氏合祔하였다.
夫人淸夷郡太守 李佑孫女이고 漁陽郡長史 李獻의 따님으로 유순하고 선량하며 賢淑하고 총명하였는데, 보다 먼저 죽었다. 4 3를 두었다.
後娶夫人河南郡夫人 雍氏某官의 손녀이고 모관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성품이 더없이 착하고 행실이 순정하였다.
夫人은 〈前室 소생과 자기 소생의 자녀들을〉 똑같이 사랑하여 공평하게 養育하니, 친척들도 차별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君子들이 여기에서 楊公德行이 가정에서도 행해졌음을 알았다.
은 다음과 같다.
강직하신 대부시여
국난의 시기 만나시어
눈물로 어버이 이별하고
으로 가서 국난 구원하셨네
이때부터 시작하여
국사에 진력하셨지
40여 년 동안
혹은 裨將으로 혹은 主將으로
견고한 적의 진지 공격하고 위험한 아군 성지 보위하셨지
작위가 높이 오른 뒤에는
지혜가 밝고 행동이 신중했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으셨네
〈그 무덤〉 魯陵 언덕에 있는데
蔡河가 곁에 있네
효성 깊은 효자들
선인의 공적 드러내기 생각하리니
이 돌에 그 공적 새겨
후손들에 전해 보이리


역주
역주1 淸邊郡王楊燕奇碑 : 이 비문은 한유가 宣武軍節度推官으로 있던 貞元 14년(798)에 지은 것이다.
역주2 (奇) : 저본에는 있으나, ≪韓文考異≫에 “혹 ‘奇’자가 없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衍字로 처리하였다.
역주3 烈考 : 故人이 된 자기 先人에 대한 美稱이다.
역주4 祿山之亂 : 唐 玄宗 天寶 14년(755) 겨울에 安祿山이 일으킨 반란을 이른다. ≪舊唐書≫ 〈安祿山傳〉에 의하면 안녹산은 營州의 雜種胡人으로 그 어미가 무당이었다. 본래 성은 없고, 이름은 軋犖山(알락산)인데, 突厥에서는 싸움을 잘하는 자를 ‘軋犖山’이라 하므로 이를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누차의 전공으로 玄宗의 신임을 받아 平盧‧范陽‧河北 등 세 곳의 절도사를 겸임하였다. 天寶 末年에 반란을 일으켜 長安을 함락하고서 ‘雄武皇帝’라 칭하고 國號를 ‘燕’이라 하였다. 뒤에 그 아들 慶緖에게 살해되었다.
역주5 從僕射(야)田公平劉展 : 田公은 田神功이다. 上元 2년(761)에, 宋州刺史 劉展이 兵權을 장악하고 하남에 있으면서 딴 뜻을 품었다 하여, 〈조정에서는〉 이에 거짓으로 유전을 淮南節度使에 제수하고서, 揚州長史 鄧景山과 李峘에게 密旨를 내려 유전을 도모하게 하였다. 이때 유전의 도당이 한창 강성하였다. 유전은 詔令을 받은 뒤에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淮水를 건넜다. 鄧景山과 李峘이 壽春에서 유전을 막다가 도리어 패배하니, 유전은 전진해 揚‧潤‧升 등 세 州를 함락하였다. 寶應 2년 봄 정월에 平盧軍兵馬使 田神功이 유전을 사로잡으니, 揚州와 潤州가 평정되었다. ≪舊唐書≫, ≪五百家注昌黎文集≫
역주6 : 함락 또는 항복을 받음이다.
역주7 食虛邑 : 명의상의 봉읍일 뿐, 부세를 징수할 수 있는 실권이 없다는 말이다.
역주8 結髮 : 머리털을 묶어 상투를 트는 것이니, 곧 成童의 나이(15세)를 이른다.
역주9 烝烝 : 孝誠이 深厚한 모양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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