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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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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直敍 然中有諷刺 與稱美處不爽尺寸이라
公諱道古 字某 曹成王子 其先王明 以太宗子王曹러니 하야 而至成王하니라
成王諱皐 有功하고 以多才能能行賞誅 爲名하다
至今追數當時內外文武大臣이면 成王必在其間이라
公以하야 獻文輿三十卷하야 拜校書郞集賢學士하고 四遷至宗正丞하다
憲宗卽位하야 選擢宗室 遷尙書司門員外郞하고 以選爲利隨唐睦州刺史타가 遷少宗正하다
元和九年 以御史中丞持節鎭黔中하다 十一年來朝타가 遷鎭鄂州하다
以鄂岳道兵會平淮西하니 以功加御史大夫하다 十三年 徵拜宗正이라가 轉左金吾하다
上卽位하야 以先朝時嘗信妄人柳泌能燒水銀爲不死藥하야 薦之하니 泌以故起閭閻氓爲刺史
하다 其年九月三日 以疾卒于貶所하니 年五十三이라
長慶元年詔曰 左降而死者 還其官以葬하라하니 遂以其年某月日葬于東都某縣하다
公三娶하다 元配韋氏諱脩 脩生子紘하다 紘爲하고 女貢嫁崔氏하다
夫人이요 父士佺 蓬山令이라 次配崔氏諱葯 生綽紹綰하다
女會 嫁鄭氏季毗하다 夫人父昭 嘗爲京兆尹하다 今夫人韋氏無子 父光憲 光祿卿이라
其葬用古今禮하야 以元配韋氏夫人祔而葬하고 次配崔氏夫人於其域異墓하다
公宗室子 生而貴富로되 能學問하야 以中科取名하다 善自傾下하고 以交豪傑일새 身死賣宅以葬하다 銘曰
太支於今
其尙有封이러니
當公弟兄하야
未續又亡이라
其遷于南

誰黜不復하고
而以喪歸
하니
萬里于畿
하야
以哀하노라


04. 唐故 昭武校尉 守左金吾衛將軍 李公墓誌銘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諷刺美稱한 곳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道古이고 가 아무개이니 曹成王의 아들이다. 그 先王 李明太宗의 아들로 으로 봉해졌는데, 封爵이 끊겼다가 다시 봉해져서 5를 전해 成王에 이르렀다.
성왕은 인데, 建中貞元 연간에 이 있었고, 재능이 많고 賞罰를 잘 시행하는 것으로 명성이 났다.
지금도 당시 內外文武大臣을 꼽을 때면 반드시 성왕을 그 사이에 넣는다.
進士及第하여 ≪文輿≫ 30권을 올리고서 校書郞 集賢學士에 제수되고, 네 차례 승진하여 宗正丞에 이르렀다.
憲宗이 즉위하여 宗室을 선발하실 때에 尙書司門員外郞으로 승진하고, 利州隨州唐州睦州 등의 刺史로 뽑혔다가 少宗正으로 옮겼다.
元和 9년(814)에 御史中丞으로 符節을 가지고 〈나가 관찰사가 되어〉 黔中鎭守하였다. 원화 11년(816)에 조정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 鄂州를 진수하였다.
鄂岳道의 군대를 거느리고 會戰하여 淮西를 평정하니, 그 공으로 御史大夫加官되었다. 원화 13년(818)에 부름을 받고 들어가 宗正에 제수되었다가 左金吾로 옮겼다.
皇上( 穆宗)께서 즉위하시었다. 先朝(先帝, 憲宗) 때에 李公(李道古)은 일찍이 妄人(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인 柳泌水銀을 끓여 不死藥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서 그를 先帝에게 천거하였기 때문에 平民柳泌을 기용하여 刺史로 삼았다.
그러나 〈유필의 불사약이〉 효험이 없었으므로 〈今上( 穆宗)께서 벌을 내리시어 李公을〉 循州司馬貶職시키셨다. 그해 9월 3일에 貶謫된 곳에서 죽으니, 나이가 53세셨다.
長慶 元年(821)에 下詔하기를 “폄직되어 地方官으로 左遷되었다가 죽은 자는 원래의 官爵으로 환원시켜 장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니, 마침내 그해 아무 달 아무 날에 東都(洛陽)의 아무 에 장사 지냈다.
은 장가를 세 번 드셨다. 初娶 韋氏인데, 는 아들 을 낳았다. 進士試에 참가하였고, 딸 崔氏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나라 때 雍州牧使를 지낸 鄖公 韋叔裕의 5世孫이고 부친 韋士佺蓬山縣令을 지냈다. 再娶夫人 崔氏인데, 을 낳았다.
鄭季毗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의 부친 崔昭는 일찍이 京兆尹을 지냈다. 지금의 부인 韋氏는 자식이 없다. 부친 韋光憲光祿卿을 지냈다.
의 장례는 고금의 에 따라 초취 韋氏夫人祔葬(合葬)하고 재취 崔氏夫人은 같은 瑩域에 무덤을 달리하였다.
宗室의 자제로 나면서부터 富貴하였으되, 능히 학문을 하여 과거에 급제해 명성을 취하였다. 겸손과 공경으로 사람을 대하고 호걸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였기에 죽은 뒤에 집을 팔아서 장사를 지내야 했다. 은 다음과 같다.
太宗支孫이 지금까지
여전히 封國을 가졌더니
공의 형제에 이르러
잇지 못하고 또 잃으셨네
남쪽으로 옮겨갔을 때에
비로소 쇠하는 나이였으니
뉘 알았으랴 쫓겨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서 돌아올 줄을
海豐이 아득히 머니
京師에서 만 리 길이네
공의 일생을 기재하고서
애도하며 서술하노라


역주
역주1 唐故昭武校尉守左金吾衛將軍李公墓誌銘 : 李公은 바로 李道古(768~820)로 曹成王 李皐(733~792)의 아들이다. 韓愈가 일찍이 曹成王의 碑文을 지었다. ≪新唐書≫에 李道古를 그 父親 〈李皐의〉 뒤에 附錄하였는데, 柳泌을 천거한 일이 자세히 실려 있다.
역주2 絶輒復封 : 李明의 손자 李胤이 뒤를 이어 曹王이 되었는데, 뒤에 그 封國을 停廢시켰다가 開元 12년(724)에 다시 봉하였다. ≪新唐書≫ 〈太宗諸子傳〉에 의하면 神龍(唐 中宗 연호) 초기에 李傑의 아들 李胤을 嗣曹王으로 삼았다. 이때 諸王의 자손들이 嶺外에서 돌아와 中宗을 알현하면서 모두 슬피 우니, 중종도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다. 과거 則天武后 때에 壯者들은 모두 誅殺하고 幼兒들은 모두 몰수하여 官奴로 삼았다. 간혹 민간에 숨어서 품팔이로 살아가는 자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뒤를 이어 세상에 나오니. 중종께서 親屬의 원근에 따라 封地를 주기도 하고 官職을 주기도 하였다. 뒤에 李備(李明의 셋째 아들)가 남쪽에서 돌아오니, 李胤의 封國을 정폐시키고 이비를 봉하였다가 開元 12년에 이비가 죽자, 다시 이윤을 曹王으로 봉하였다. 本書 卷11의 〈曹成王碑〉 참조.
역주3 五世 : 바로 李明‧李傑‧李胤‧李戢‧李皐의 5代이다.
역주4 建中貞元 : 建中(780~783)과 貞元(785~805)은 唐 德宗의 연호이다.
역주5 進士擧及第 : 進士科에 응시하여 급제했다는 말이다. 本書 卷11의 〈曹成王碑〉 참조.
역주6 以先朝……貶循州司馬 : ≪舊唐書≫ 〈李道古傳〉에 의하면, 唐 憲宗은 말년에 煉丹하여 不老長生할 수 있다고 자칭하는 方術士를 酷信하여 丹藥을 복용하는 일에 빠져서 천하에 조서를 내려 奇士를 찾게 하였다. 이때 재상 皇甫鎛은 아첨으로 총애를 굳히려는 참이었는데, 이도고가 ‘柳泌이 道術이 있다.’고 말하자, 황보박이 그를 천거하니, 憲宗은 그를 翰林에서 待詔하게 하였다. 헌종은 丹藥을 과도하게 복용한 탓에 갑자기 狂躁病이 도져 昇遐하는 데 이르렀다. 唐 穆宗은 東宮에 있을 때부터 이 일에 대해 분개하였는데, 居喪함에 미쳐 모두 竄逐(流配)하거나 誅殺하였다.
역주7 進士(學)[擧] : 저본에는 ‘學’으로 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擧’로 바로잡았다. 곧 進士科에 應試한 것이다.
역주8 隋雍州牧鄖公叔裕五世孫 : 隋나라 때 雍州牧使를 지낸 鄖公 韋叔裕의 5대손이라는 말이다.
역주9 年及始衰 : 始衰는 50세를 이른다. ≪禮記≫ 〈王制〉에 “50세가 되면 비로소 쇠하고, 60세가 되면 고기가 아니면 배가 부르지 않으며, 70세가 되면 비단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다.[五十始衰 六十非肉不飽 七十非帛不煖]”라고 보인다.
역주10 海豐彌彌 : 海豐은 李道古가 貶謫되어 간 循州의 屬縣이다. 彌彌는 멂이다.
역주11 載其始終 : 一生이니, 곧 李道古의 일생을 기록한다는 말이다.
역주12 表之 : 表에는 ‘기록’ 또는 ‘서술’의 訓이 있으니, 곧 애도하면서 이 碑銘을 서술한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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