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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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整潔이라
公諱溪 字惟深이니 第二子 十九歲로되 沈厚精敏하야 未嘗有子弟之過하다
賓接門下하고 推擧人士하며 侍側無하고 退而見其人이라도 淡若與之無情者
太師賢而愛之하야 父子間自爲知己하니 諸子雖賢이나 莫敢望之
太師累踐大官하야 臻宰相하야 致平治로되 終始以禮하야 號稱名臣이라 蓋有賴云이라
로되 하고 하야 納之而已 無所遺漏 繄公之功이라
尙書左僕射陸公長源 太師 絶人이러니 聞其所爲 每稱擧以戒其子하니라
以材德顯名朝廷이로되 及來佐幕府 詣門請交하고 屛所挾爲하다
太師薨 始以祕書郞選參軍京兆府法曹하야 日伏階下하야爭是非하니 大尹屢黜己見하니라
歲中 奏爲司錄參軍하야 與一府政하다 以能拜尙書度支員外郞이라가 遷倉部郞中萬年令하다
改度支郞中하고 攝御史中丞하야 爲糧料使라가 遷商州刺史하다
糧料吏有忿爭相牽告者하야 事及於公하니 因徵下御史獄하다 公不與吏辨하고 一皆하다
受垢除名하야 徙封州라가 元和六年五月十二日 하니 年四十九
明年 立皇太子하야 有赦令許歸葬하니 其子居中 始奉喪歸하야
元和八年十一月甲寅 葬於河南河南縣萬安山下太師墓左하고 夫人鄭氏祔하다
公凡再娶하니 皆鄭氏女 生六子하니 四男二女 長曰全正 惠而早死하고 次曰居中 好學하고 善爲詩하야 稱之하다
次曰從直 曰居敬 尙小 長女嫁吳郡陸暢하고 其季女 後夫人之子
公之母弟全素 孝慈友弟하다 公坐事 棄同官令歸하다
公歿하야 比葬三年 哭泣如始喪者하다 大臣高其行하야 白爲太子舍人하다
將葬 舍人與其季弟澥 問銘於太史氏韓愈어늘 愈則爲之銘하노라 辭曰
하고

考致要歸
孰有彼此
由我者吾
不我者天이라

其誰使然


05. 唐故 朝散大夫 商州刺史로서 除名되어 封州로 유배된 董府君墓誌銘
정결하다.
은 휘가 이고 惟深이니 丞相 贈太師 隴西 恭惠公의 둘째 아들이시다. 19세에 두 經書에 밝아 有司에게 뽑혀 급제하였으되, 사람됨이 深厚하고 精敏하여 世家子弟로서 걸맞지 않는 허물이 없었다.
賓禮門客들을 접대하고 인재를 천거하였으며, 太師를 곁에서 모시면서 허황된 말을 한 적이 없고 물러나와 자기가 천거한 사람을 만나도 마치 그와 親分이 없는 것처럼 냉담하게 대하였다.
태사께서 공을 어질게 여겨 사랑하시어 부자 사이가 저절로 知己가 되니, 다른 아들들도 비록 어질었으나 누구도 감히 공과 비교[]하지 못하였다.
태사께서는 누차 大官을 거쳐 宰相에 올라 태평을 이룩하였으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에 맞게 行事하여 名臣으로 호칭되었다. 이는 이 태사를 좌우에서 모시면서 〈태사의 功業治績에〉 도움을 드린 것에 힘입은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太師께서 汴州를 평정할 때에 연세가 더욱 높았으되 紀綱을 유지하고 역적을 제거하여 나라를 태평에 이르게 하고야 말았다. 자질구레한 公務에 빠트린 것이 없었던 것은 바로 (董溪)의 공로이다.
上介 尙書左僕射 陸公 長源은 나이는 太師보다 조금 적었으나 名聲은 태사보다 높았는데, 董公의 행위를 들으면 매양 칭찬하면서 그 행위를 들어 아들을 훈계하였다.
楊凝孟叔度材德으로 朝廷에까지 이름이 난 사람이었으되, 〈동공이 汴州로〉 와서 幕府에서 董太師를 보좌할 적에, 직접 동공을 찾아와서 交分을 맺기를 청하면서 종전의 행위를 은폐하였다.
太師薨逝한 뒤에 이 비로소 祕書郞으로 參軍京兆府法曹에 선임되어, 날마다 階下에 엎드려 大尹是非를 논쟁하니 장관이 누차 자기의 의견을 거두어들였다.
그해에 장관의 奏請으로 司錄參軍이 되어 한 政事에 참여하였다. 유능함으로 인해 尙書度支員外郞에 제수되었다가 倉部郞中 萬年縣令으로 승진하였다.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어 恒州討伐[]할 때에 度支郞中改授되고 御史中丞代理[]하여 糧料使가 되었다가 朝廷恒州에서 撤兵한 뒤에 商州刺史로 승진하였다.
糧料管理하던 官吏가 분쟁하여 서로 고발하는 일이 발생하여, 사건이 에게까지 미쳤으므로 이로 인해 소환되어 御史獄에 갇혔다. 은 관리들과 변론하지 않고 모두를 인정하였다.
汚名을 쓰고 除名되어 封州로 귀양 가다가 元和 6년(811) 5월 12일에 湘中에서 죽으니, 향년이 49세셨다.
다음 해에 皇太子를 세우고서 大赦令을 내려 歸葬을 허락하니, 그 아들 居中이 비로소 喪柩를 모시고 돌아와서
원화 8년(813) 11월 甲寅日河南府 河南縣 萬安山 아래에 있는 太師墓 왼편에 장사 지냈다. 夫人 鄭氏合祔(合葬)하였다.
은 장가를 두 번 드셨는데, 모두 鄭氏의 따님이다. 자식이 여섯으로 4남 2녀이다. 맏이 全正은 총명하였으나 일찍 죽었고, 둘째 居中은 학문을 좋아하고 를 잘 지어 張籍의 칭찬을 받았다.
셋째 從直과 넷째 居敬은 아직 어리다. 맏딸은 吳郡 陸暢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딸은 後夫人의 소생이다.
同母弟 董全素는 효도와 友愛가 지극하였다. 事件連坐되자 同官縣令 자리를 버리고 돌아왔다.
이 사망하여 장사 지낸 지 3년이 지났는데도 初喪 때처럼 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大臣이 그의 행위를 고상하게 여겨 皇帝께 아뢰어 太子舍人으로 삼았다.
장사 지내려 할 적에 舍人이 그 막내아우 董澥와 함께 와서 太史氏 韓愈에게 墓誌銘을 청하기에 나 한유는 그들을 위해 묘지명을 지어주었다. 銘辭는 다음과 같다.
물건은 오래되어 파손되는 것도 있고
차바퀴에 갈리어 망가지는 것도 있으나
그 귀결을 추구해보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내가 한 일은 내 책임이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은 天命이다
이 사람이 이리 된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역주
역주1 唐故朝散大夫商州刺史除名徙封州董府君墓誌銘 : 董府君은 董溪(763~811)를 가리킨다. 동계는 董晉(724~799)의 아들이다. ≪新唐書≫ 〈董晉傳〉에 附記된 〈董溪傳〉에 의하면 “王師가 王承宗을 토벌할 때에 度支郞中(탁지낭중)에 발탁되어 東都行營糧料使가 되었는데, 軍資를 훔친 사건에 連坐되어 封州로 귀양가던 도중에 長沙에서 賜死되었다.”고 하였다.
除名은 名籍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원래의 신분을 취소함이다.
역주2 丞相贈太師隴西恭惠公 : 檢校尙書左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汴州刺史‧宣武軍節度使‧宋亳潁觀察使를 지낸 董晉을 이른다. 太師는 그의 贈職이고, 隴西는 封爵인 隴西郡開國公이고, 恭惠는 諡號이다.
역주3 明兩經 獲第有司 : ≪唐六典≫에 “貢擧人 중에 두 가지 이상의 經書에 통달한 자는 明經科에 합격시킨다.[凡貢擧人通二經以上者 爲明經]”라고 보인다.
역주4 虛口 : 실없는 빈말을 이른다.
역주5 晨昏之助 : 董溪가 부친을 좌우에서 모시면서 부친의 功業과 治績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다. 晨昏은 ‘昏定晨省’의 준말로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봉양함을 이른다.
역주6 太師之平汴州 : 汴州刺史 李萬榮이 病死하자, 그 아들 李迺가 스스로 兵馬使가 되었다. 그러자 汴州의 군대가 그를 축출하고 변란을 일으켰다. 이때 董晉이 幕僚와 奴僕 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변주의 軍亂을 평정하였다.(≪舊唐書≫ 〈董晉傳〉)
역주7 年考益高 : 年考는 年壽(사람의 수명)로 老人의 年齡을 이른다. 貞元 12년(796)에 董晉이 73세였다.
역주8 挈持維綱 : 挈持는 부지함이고, 維綱은 법도이니, 곧 법도를 부지함이다.
역주9 鋤削荒纇 : 鋤削은 제거함이고, 荒纇는 逆賊을 이른다.
역주10 太和 : 太平이다.
역주11 囊篋細碎 : 細碎한 公務를 이른다. 囊篋은 書籍과 文稿를 간직하는 상자인데, 여기서는 公務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12 上介 : 古代에 外交使節團의 副使나 軍政長官의 고급 輔佐官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貞元 12년에 陸長源이 宣武軍의 行軍司馬가 되어 汴州의 정사를 모두 결단하였다.(≪舊唐書≫ 〈陸長源傳〉)
역주13 齒差 : 나이가 약간 적음이다.
역주14 標望 : 聲望이 매우 높음이다.
역주15 楊凝 : ?~803. ≪新唐書≫ 〈楊凝傳〉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宣武節度使 董晉이 表文을 올려 황제의 성은을 받아 楊凝을 判官으로 삼았다. 亳州에 刺史 자리가 비자, 董晉은 楊凝을 보내어 州의 政事를 맡아보게 하였다.”
역주16 孟叔度 : ≪舊唐書≫ 〈董晉傳〉에 “錢穀의 支計(收入支出의 會計)를 判官 孟叔度에게 맡겼다.”는 말이 보인다.
역주17 大尹 : 府와 縣의 長官을 이른다.
역주18 兵誅恒州 : 朝廷에서 군대를 보내어 恒州를 토벌함이다.
역주19 兵罷 : 撤軍함이다.
역주20 引伏 : 죄를 인정함이다.
역주21 死湘中 : 湘中은 湘江 一帶를 이른다. ≪資治通鑑≫에 의하면 “元和 6년(811) 5월에 전 行營糧料使 于皐謨와 董溪가 軍資 수천 꿰미[緡]를 절취한 贓罪에 걸렸으나, 勅命으로 死刑을 면제하고 于皐謨는 春州로, 董溪는 封州로 流配하였는데, 이들이 潭州(지금의 長沙)에 이르렀을 때에 〈황제는 이들의 벌이 너무 가벼움을 후회하고서〉 中使를 뒤따라 보내어 賜死하였다.”고 하였다.
역주22 張籍 : 767~830. 字는 文昌이다. 한유의 벗으로 당시에 詩文으로 명성을 떨쳤다.
역주23 物以久弊 : 수명대로 살다가 죽음을 비유한다.
역주24 或以轢毁 : 非命橫死를 비유한다.
역주25 斯而以然 : 董溪가 非命橫死한 것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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