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諱洪
이요 字濬川
이라 其先姓烏石蘭
이라 九代祖猛始從
氏入夏
하야 居河南
으로
遂去烏與蘭하고 獨姓石氏하고 而官號大司空하니라 後七世至行褒하야 官至易州刺史하니 於君爲曾祖라
易州生婺州金華令하니 諱懷一이요 卒葬洛陽北山하니라
金華生君之考諱平하니 爲太子家令이라 葬金華墓東하고 而尙書水部郞劉復爲之銘하니라
君生七年喪其母하고 九年而喪其父로되 能力學行하니라
去黃州錄事參軍
하고 則不仕而退
하야 處東都洛上十餘年
한대 行益修
하고 學益進
하고 交遊益
하야 聲號聞四海
하니라
故相國鄭公餘慶留守東都에 上言 洪可付史筆하니라 李建拜御史하고 崔周禎爲補闕에 皆擧以讓하니라
宣歙池之使
와 與浙東使
도 交牒署君從事
하다 河陽節度烏大夫重胤間以幣先走廬下
라 故
하니라
佐河陽軍에 吏治民寬하야 考功奏從事考에 君獨於天下爲第一하니라
元和六年에 詔下河南하야 徵拜京兆昭應尉校理集賢御書하니라 明年六月甲午에 疾卒하니 年四十二라
娶彭城劉氏女하니 故相國晏之兄孫이라 生男二人하니 八歲曰壬이요 四歲曰申이라 女子二人이라
曰 葬死所
하라 七月甲申
에 葬萬年白鹿原
하니라 旣病
에 謂其遊韓愈曰 子以吾銘
하라 銘曰
生之艱이어니와
成之又艱이라
若有以爲러니
而止於斯로다
石君은 諱가 洪이고 字가 濬川이다. 그 선조의 姓은 烏石蘭이었는데, 9대 祖父 猛이 처음 拓拔氏를 따라 中原으로 들어와 河南에 살면서부터
드디어 ‘烏’자와 ‘蘭’자를 버리고 ‘石’ 한 자만으로 성을 삼았는데, 官號(관직의 명칭)가 大司空이었다. 그로부터 7대 뒤에 石行褒에 이르러 관직이 易州刺史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石君의 증조이시다.
易州刺史가 婺州 金華縣令을 낳았는데 諱는 懷一이다. 金華縣令이 죽자 洛陽 北山에 장사 지냈다.
金華縣令이 石君의 부친을 낳았는데, 諱는 平이니 太子家令을 지냈다. 金華縣令의 무덤 동쪽에 장사 지내고, 尙書 水部郞 劉復이 그를 위해 墓誌銘을 지었다.
石君은 일곱 살에 모친을 여의고 아홉 살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학문과 德行에 힘썼다.
黃州의 錄事參軍 자리를 버리고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東都(洛陽) 洛水 가에서 10여 년 동안 隱居하였는데, 덕행이 더욱 수양되고 학문이 더욱 增進되며 交遊(벗)가 더욱 많아져서 名聲이 四海에 전파되었다.
옛 相國 鄭公 餘慶이 東都留守로 있을 때에 “石洪은 史筆을 맡길 만한 사람입니다.”라고 上言하였다. 이때 李建이 御史에 제수되고, 崔周禎이 補闕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석홍을 천거하며 관직을 양보하였다.
宣歙池觀察使와 浙東觀察使도 번갈아 문서를 보내어 石君을 從事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河陽節度使 烏大夫 重胤이 〈사람을 보내어〉 禮物을 가지고 샛길로 먼저 석군의 집으로 달려가게 하였기 때문에 河陽節度使가 石君을 얻을 수 있었다.
石君이 河陽軍을 보좌할 때에 관리로서 백성들을 너그럽게 다스려서 考功員外郞이 從事들의 성적을 奏課할 때 石君의 성적이 유독 천하제일이었다.
元和 6년(811)에 河南(河陽)에 조서를 내려 석군을 불러 京兆昭應尉 校理集賢御書에 제수하였다. 이듬해 6월 甲午日에 병으로 卒하였으니, 향년이 42세였다.
彭城 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옛 相國인 劉晏의 형님의 孫女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石壬은 여덟 살이고 石申은 네 살이다. 딸은 둘이다.
石君은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곳에 埋葬하라.”고 하였다. 7월 甲申日에 萬年縣 白鹿原에 장사 지냈다. 그가 병에 걸린 뒤에 그의 벗인 나 韓愈에게 “그대가 나의 묘지명을 지어 주게.”라고 하였다. 銘은 다음과 같다.
생장하기도 어렵지만
덕행을 이루기는 더욱 어렵네
큰일을 할 것 같았는데
여기서 그치고 말았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