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袁氏世系千餘年若一線이나 中多荊棘하야 句字不可讀이라 系之以韻은 似追雅頌이라
袁公滋旣成廟
하고 明歲二月
에 自荊南以
朝京師
하야 留六日
하야 得壬子春分
하야 率宗親子屬
하고 用
于
하니라
旣事에 退言曰 嗚呼遠哉라 維世傳德이여 襲訓集余러니 乃今有濟로다
今祭
에 旣不薦金石音聲
하니 使工歌詩
로 이면 其奚以
於長久
리오
唯
하니 如具著先人名跡
하고 因爲詩繫之語下
면 於義其可
리라
雖然이나 余不敢이니 必屬篤古而達於詞者하라하고 遂以命愈하니라
愈謝非其人이나 不獲命일새 則謹條袁氏本所以出과 與其世系里居라
其語曰
하니 陳公子有爲大夫食國之地袁鄕者
한대 其子孫世守不失
하니 因自別爲袁氏
하니라
春秋世
에 陳常壓於楚
하야 與中國
尤疏
로되 袁氏猶
니라
常居陽夏
하니 陽夏至晉屬陳郡
이라 故號陳郡袁氏
라 하야 唱業於前
하고
至
하야 懷德於身
하니 袁氏遂大顯
하니라 連世有人
하야 終漢連魏晉
히 分仕南北
하니라
始居華陰하야 爲拓拔魏鴻臚하니 鴻臚諱恭이 生周梁州刺史新縣孝侯諱穎하고 孝侯生隋左衛大將軍諱溫한대
去官居華陰타가 武德九年에 以大耋薨하니 始葬華州하니라
左衛生南州刺史諱士政하고 南州生當陽令諱倫한대 於公爲曾祖라
當陽生朝散大夫石州司馬諱知玄하고 司馬生贈工部尙書咸寧令諱曄한대 是爲皇考라
袁氏는 舊族이요 而當陽은 以通經爲儒로되 位止縣令하고 石州는 用春秋持身治事로되 爲州司馬以終하고
咸寧은 備學而貫以一하고 文武隨用하고 謀行功從하야 出入有立이로되 不爵于朝하니라
公惟曾大父大父皇考比三世
는 存不大夫食
이나 歿祭在子孫
이라 惟將相能致
이나 世彌遠
이면 禮則益不及
이라
在愼德行業治하고 圖功載名하야 以待上可라하고 無細大히 無敢不敬畏하며 無早夜히 無敢不思하니라
成于家하고 進于外하야 以立于朝하야 自侍御史歷工部員外郞, 祠部郞中, 諫議大夫, 尙書右丞, 華州刺史, 金吾大將軍하니라
由卑而鉅
호대 莫不官稱
하니라 遂爲宰相
하야 以
하고 仍持節將蜀滑襄荊
하니 略苞河山
하니라
秩登祿富
하야 以有廟祀
하니 具如其志
하니라 又垂
하야 以敎無忘
하니 可謂大孝
로다 詩曰
袁自陳分
하야 初尙
이라 越秦造漢
하야 博士發論
하고 司徒任德
하야 忍不錮人
하니 收功厥後
하야 五公重尊
이라
晉氏于南
에 來處華下
라 鴻臚孝侯
는 라 南州勤治
하야 라 當陽躭經
하야 唯義之畏
라
石州
하니 學專春秋
라 懿哉咸寧
은 不名一休
라 하야 與時
라
是生孝子
하니 天子之宰
라 出把將符
면 群州承楷
라 以立廟
하고 祿以備器
라
由曾及考
를 同堂異置
라 의 其筵肆肆
라 維袁之廟
는 孝孫之爲
라
順勢卽宜하야
以諏以龜하고
以平其巇하야
屋牆持持라
孝孫來享하고
來拜廟庭이라
陟堂進室
하야 親登
하니 肩臑胉骼
이요 其樽
이라 降登受
면 于慶爾成
이라
維曾維祖
와 維考之施
니 于汝孝嗣
는 以報以祗
하라 凡我有今
은 오 刻詩
하야 維以告之
하노라
1천여 년 이어온 袁氏의 世系를 마치 한 끈에 꿴 것처럼 서술하였으나, 중간에 난삽한 곳이 많아 字句를 읽을 수 없다. 그러나 뒤에 이어놓은 韻文은 雅와 頌을 뒤따른 것 같다.
袁公 滋가 先人의 廟宇를 세우고, 이듬해 2월에 荊南節度史로서 京師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고서 엿새를 머물러 壬子日 春分이 되자, 親屬의 자제들을 거느리고서 三室에 少牢로써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친 뒤에 물러나 말하기를 “아! 오래되었도다. 대대로 德을 전해온 지가. 遺訓을 계승할 책임이 내 몸에 있는데, 오늘에야 완수하였다.
오늘 제사에 이미 金石의 音樂을 올리지 못하였으니, 歌詩에 능한 자를 시켜 祖先의 功烈을 기재하고 모습을 묘사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후손들을 어찌 장구히 敎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행히 희생을 매어두는 碑石이 있으니, 그 비석에 先人의 명성과 업적을 상세히 기재하고, 이어 詩를 지어 기재한 글 아래에 附記한다면 아마도 도의에 맞을 것이다.
비록 그러나 나는 감히 지을 수 없으니 반드시 옛것을 좋아하고 文詞에 달통한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하고, 마침내 나 韓愈에게 지으라고 명하였다.
나 한유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승낙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袁氏의 근본이 나온 곳, 世系, 모여 살던 곳을 삼가 기록하였다.
周나라로부터 시작해 漢‧魏‧晉‧拓拔魏(北魏)‧周(北周)‧隋를 거쳐 唐나라에 들어온 이후로 高祖‧曾祖‧祖‧考께서 몸소 고생해가며 후손을 보호하여 公에게 복이 내리게 한 내용과,
공이 때를 만나 장군이 되고 詔命을 받들어 조정에 들어오게 된 까닭을 대략 서술하기도 하고 상세히 서술하기도 하고서 詩를 지어 붙였다.
碑文은 아래와 같다. 周 武王이 舜의 후손을 陳나라에 세워주었다. 陳나라 公子 중에 大夫가 되어 陳나라 땅 袁鄕을 食邑으로 받은 자가 있었는데, 그 자손이 그 땅을 대대로 지켜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따로 袁을 氏로 삼았다.
春秋時代에 陳나라는 항상 楚나라의 압제를 받아 중국과의 왕래가 더욱 소원하였으나, 袁氏는 오히려 드러난 업적이 있어 譜錄할 만하였다.
원씨는 항상 陽夏에 거주하였는데, 양하는 晉나라 때에 와서 陳郡에 소속되었다. 그러므로 陳郡袁氏로 불리었다. 博士 袁固는 儒學을 闡明하고 黃老를 억제하여 앞에서 儒業을 제창하였고,
司徒 袁安에 이르러 몸에 도덕을 품었으니, 袁氏가 드디어 크게 드러났다. 世代마다 인재가 나와서 漢이 망하고 魏‧晉에 이르기까지 남북에 흩어져 벼슬하였다.
華陰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拓拔魏(北魏)의 鴻臚가 되었다. 鴻臚는 諱가 恭인데 北周의 梁州刺史 新縣孝侯 諱 穎을 낳았고, 孝侯가 隋나라 左衛大將軍 諱 溫을 낳았다.
〈溫은〉 관직을 버리고 華陰으로 가서 살다가 武德 9년(626)에 大耋(80)의 연세로 薨逝하시니 비로소 華州에 장사 지내었다.
左衛가 南州刺史 諱 士政을 낳고, 南州가 當陽令 諱 倫을 낳았는데, 이가 公에게 曾祖가 되신다.
當陽이 朝散大夫 石州司馬 諱 知玄을 낳고, 司馬가 贈工部尙書 咸寧令 諱 曄을 낳았는데, 이가 公의 皇考(先考)이시다.
袁氏는 舊族이고 當陽은 經典에 통달해 儒生이 되었으되 職位가 縣令에 그쳤고, 石州는 ≪春秋≫의 법을 사용해 몸을 지키고 일을 처리하였으되 州司馬로 죽었고,
咸寧은 두루 배워서 一以貫之하고 文德과 武略를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計謀를 시행하면 功效가 뒤따라서 出仕하고 隱遁함에 모두 수립함이 있었으되 조정에서 爵位를 주지 않았다.
가까이 3代(曾‧祖‧考)는 顯達함이 마땅한데 막혔던 것은 성공을 후손에게 돌리기 위함이었으니, 그 운수가 公에게 닥쳤다.
袁公은, ‘曾大父‧大父‧皇考 3대는 生存時에 大夫의 俸祿을 누리지 못하셨으나, 돌아가신 뒤에 자손에게 제사를 받으신다. 오직 장군이나 宰相이라야 각종 器物을 갖춘 제사를 올릴 수 있으나, 그것도 세대가 멀어지면 祭禮가 더욱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오로지 덕행과 사업을 삼가고 공훈을 도모하고 명성을 남겨 조정의 허가를 기다리기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고서,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감히 敬畏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낮이건 밤이건 감히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집안에서 〈德業을〉 이룬 뒤에 밖으로 나아가 조정에 진출하여 侍御史로부터 시작해 工部員外郞‧祠部郞中‧諫議大夫‧尙書右丞‧華州刺史‧金吾大將軍을 歷任하였다.
낮은 관직으로부터 높은 관직에 올랐으되, 거친 관직마다 그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함이 없었다. 드디어 宰相이 되어 〈百官의 우열을〉 분별하여 밝히는 황제의 정사를 돕고, 이어 符節을 가지고 나아가 蜀州‧滑州‧襄州‧荊州를 통솔[將]하니, 다스리는 지역이 河山(國土)을 포괄하였다.
官位가 올라가고 祿俸이 많아져서 사당을 세워 祖先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모든 일이 뜻대로 된 것이다. 또 공적을 드러낸 비석을 남겨 〈후손들에게〉 잊지 않도록 가르쳤으니 大孝라고 이를 수 있다. 詩는 다음과 같다.
袁氏가 陳나라에서 갈려나와
처음에는 곤란한 일을 겪었지
秦나라를 지나 漢나라에 와서
博士(轅固)는 儒學의 논의를 일으켰고
司徒(袁安)는 도덕을 임무로 삼으시어
차마 남을 禁錮하지 않으셨는데
후손들이 그 보답을 받으시어
다섯 분이 연달아 존귀해지셨네
晉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하니
원씨는 華陰으로 와서 살았지
鴻臚(袁恭)와 孝侯(袁穎)는
用人에 취사가 적합하였지
南州刺史(袁士政)는 정치에 근면하여
최상의 등급 받고도 해이하지 않았고
當陽縣令(袁倫)은 경전을 좋아하여
오직 義만을 두려워하셨지
石州司馬(袁知玄)는 공업과 덕행이 혁혁하여
학문은 ≪春秋≫를 전공하셨지
아름다운 咸寧縣令(袁曄)은
한 가지 덕으로 이름나지 않으셨네
고난으로 나가고 성공을 피하고서
당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네
이분이 孝子 낳으시니
천자의 재상 되었네
장군의 부절 가지고 나가면
모든 고을이 모범으로 받들었지
禮의 등급에 맞게 사당을 세우고서
녹봉으로 기물을 마련하였지
증조부에서 부친까지 신주를
같은 堂의 각 방에 안치하였네
측백나무 판자에 소나무 기둥
안치한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네
袁氏의 사당은
효성스런 자손들이 세운 것
地勢가 순한 곳을 찾아가서
점을 쳐서 자리를 정하고서
험한 곳 깎아내고 평지로 만들고서
세운 집과 담 장엄하기도 하구나
효성스런 자손들 와서 제물 바치고
내려와 묘정에서 절을 올리네
당으로 올라 묘실로 들어가서
몸소 제기에 제물을 올리는데
앞다리 정강이뼈 어깨뼈 넓적다리뼈이고
잔에는 맑은
玄酒를 채워놓는다
내려와 뜰에서 절 올리고 올라가 당에서
胙肉 받으면
경사스러운 제사가 끝난다
籩 鉶
증조부와 조부 그리고
부친께서 복을 베푸셨으니
너희 효성스런 후손들은
보답하고 공경하라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것은
근본이 아니면 무엇을 생각하랴
희생을 매어두는 돌에 시를 새겨
앞으로 올 후손들에게 고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