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諱適
이요 姓王氏
라 好讀書
하고 하야 不肯隨人後
하니라
見
로되 하야 不能自出
일새 乃以
諸公貴人
하야 借助聲勢
하니라
諸公貴人旣志得
이라 皆
요 不喜聞生語
하야 一見
하곤 輒戒門以絶
하니라
卽提所作書
하고 하며 趨直言試
하니라 旣至
에 對語驚人
이나 不中第
하야 益困
하니라
久之
에 聞
年少喜
可撼
하고 乃
告曰 天下奇男子王適
이 願見將軍白事
하노라
하야 往來門下
하니라 盧從史旣節度昭義軍
에 하야 法度士
하고 欲聞無顧忌大語
하니라
有以君生平告者
하니 卽遣客
하니라 君曰 狂子不足以共事
라하고 立謝客
하니라
李將軍由是待益厚
하고 奏爲其衛冑曹參
하야 充
하고 盡用其言
하니라
將軍遷帥鳳翔
에 君隨往
하야 改試大理評事
하야 攝監察御史觀察判官
한대 하니 民獲蘇醒
하니라
居歲餘에 如有所不樂이러니 一旦載妻子入閿鄕南山不顧하니라
中書舍人王涯獨孤郁吏部郞中張惟素比部郞中韓愈가 日發書問訊이나 顧不可強起일새 不卽薦하니라
明年九月疾病하야 輿醫京師하야 某月某日卒하니 年四十四라 十一月某日에 卽葬京城西南長安縣界中하니라
曾祖爽은 洪州武寧令이요 祖微는 右衛騎曹參軍이요 父嵩은 蘇州崑山丞이라 妻는 上谷侯氏處士高女라
高固奇士
로 自方
나 世莫能用吾言
이요 하야 發狂投江水
하니라
初
에 處士將嫁其女
에 懲曰
이로되 一女憐之
하니 必嫁官人
이요 不以與凡子
리라
君曰 吾求婦氏久矣
로되 惟此翁
요 且聞其女賢
이라하니 不可以失
이라하고
卽
호되 吾明經及第
하야 且選
이니 卽官人
이라 侯翁女幸嫁
라하니 若能令翁許我
면 請進百金爲嫗謝
하리라
하니 翁曰 誠官人耶
아 取文書來
하라 君計窮吐實
하니
嫗曰 無苦
하라 翁
은 大人
이니 不疑人欺我
리라 得
하야 我袖以往
이면 翁見
코 未必取
요
幸而聽我리라하고 行其謀하니 翁望見文書銜袖하고 果信不疑曰 足矣라하고 以女與王氏하니라
生三子하니 一男二女라 男三歲夭死하고 長女嫁亳州永城尉姚侹하고 其季始十歲라 銘曰
祗繫其逢
이요 라 不諧其須
면 有銜不祛
니라 鑽石埋辭
하야 以列幽墟
하노라
君은 諱가 適이고 姓이 王氏이다. 讀書하기를 좋아하며 가슴에 기이한 재주를 품고 志向과 氣槪를 자부하여, 남들이 하는 대로 덩달아 科擧를 보려 하지 않았다.
〈科擧가 아니더라도〉 功業을 쉽게 취할 수 있는 길이 있고, 〈正道를 따르지 않더라도〉 名節을 이룰 수 있는 허다한 節目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자격도 없고 지위도 없는 처지에 갇히어[困] 자력으로 진출할 수 없었으므로 公卿 貴人들에게 도움을 청해 그들의 聲勢를 빌리고자 하였다.
公卿 貴人들은 이미 뜻을 얻은 사람들이라서 모두 아첨하고 영합하여 이목을 즐겁게 하는 자들을 좋아하고 생경한 말을 듣기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번 만나본 뒤에는 이내 문지기에게 당부하여 다시는 문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今上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四科를 開設하여 천하의 선비들을 모집하니, 王君은 웃으면서 “이것은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 아닌가?”라고 하고서,
즉시 자기가 지은 글을 가지고 길을 떠나 노래하고 읊조리면서 直言極諫科를 치르는 試驗場으로 달려갔다. 科場에 당도한 뒤에 策問에 대답한 말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여 더욱 곤궁하였다.
얼마 뒤에 金吾衛 李將軍이 나이가 젊고 선비들을 좋아하니, 언어로써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이에 이장군의 문 앞에 가서 고하기를 “천하의 비범한 사내 王適이 將軍을 뵙고 일을 아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 번 만나 이야기해보니 서로 뜻이 맞아 장군의 문하를 왕래하게 되었다. 盧從史가 昭義軍節度使가 된 뒤로는 함부로 잘난 체하여, 법도를 준수하는 선비를 輕視[奴視]하고 꺼리거나 망설임 없이 큰소리치는 말을 듣고자 하였다.
어떤 자가 王君의 生平(행적)을 盧從史에게 일러주니, 盧從史는 즉시 王君을 招致하기 위해 說客을 보냈다. 그러자 王君은 “〈從史는〉 狂妄한 자이니,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라고 하고서 즉시 그 說客을 사절하였다.
이로 인해 李將軍은 王君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고, 조정에 奏請하여 王君을 禁衛軍冑曹參軍으로 삼아 引駕仗判官의 職을 充任(담당)하게 하고 그의 주장[言]을 다 받아들였다.
李將軍이 鳳翔節度使로 승진해 가자 王君도 따라가서 試 大理評事에 임명되어 監察御史 觀察判官을 代理[攝]하였는데, 弊政을 제거하고 疾苦를 어루만지니 백성들이 소생하였다.
鳳翔에 있은 지 1년 남짓했을 때에 心中에 즐겁지 않음이 있는 것 같더니, 어느 날 妻子를 수레에 싣고 〈봉상을 떠나〉 閿鄕의 南山으로 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中書舍人 王涯‧獨孤郁, 吏部郞中 張惟素, 比部郞中 韓愈 등이 날마다 書信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으나, 억지로 出仕[起]시킬 수 없기에 즉시 추천하지 않았다.
이듬해 9월에 병이 위중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의원을 찾아 京師로 왔다가 아무 달 아무 날에 卒하였으니 향년이 44세였다. 11월 아무 날에 京城 서남쪽 長安縣 경계에 장사 지냈다.
曾祖父 王爽은 洪州 武寧縣令을 지냈고, 祖父 王微는 右衛 騎曹參軍을 지냈고, 父親 王嵩은 蘇州 崑山縣丞을 지냈다. 아내는 上谷 侯氏 處士 侯高의 따님이다.
侯高는 본래
奇士로 스스로를
阿衡(
伊尹)과
太師(
呂望)에 비유하였으나 세상에 누구도 그의 말을
採納하지 않았고, 두 번
官吏가 되었으나 두 번
譴責[
怒]을 받자
狂症이 발작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
伊尹 呂望(太公望)
당초 處士(侯高)가 그 딸을 시집보내려 할 적에 집안 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남과 뜻이 맞지 않음으로 인해 곤궁하게 살지만 하나뿐인 딸만은 매우 사랑하니, 반드시 官員에게 시집보내고 보통 사람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君이 말하기를 “내 아내감을 구한 지 오래였으나 오직 이 노인만이 나의 생각에 맞고, 또 듣자니 그 따님도 賢淑하다 하니 놓칠 수 없다.”고 하고서,
즉시 媒婆에게 거짓말로 이르기를 “나는 이미 明經科에 급제하여 장차 선임될 것이니, 곧 관직에 오를 사람이오. 侯翁의 따님이 出嫁하기를 희망[幸]한다 하니, 그대가 만약 侯翁으로 하여금 딸을 나에게 주기로 허락하게 한다면 나는 百金으로써 그대에게 사례하겠소.”라고 하였다.
매파가 허락하고서
侯翁에게 가서 아뢰니,
侯翁이 “진정 벼슬아치더냐?
文書(
告身)를 가져와보라.”고 하였다. 〈매파가 가서
侯翁의 말을 전하자〉
王君이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吐說하니,
告身
매파가 말하기를 “괴로워할 것 없습니다. 侯翁은 大人이니, 남이 자기를 속일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告身牒 비슷한 두루마리 하나를 구해서 내 소매에 넣고 가면 侯翁이 보고서 굳이 가져다가 직접 살펴보려 하지 않고,
혹시 내 말을 믿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하고서 계획대로 행하니, 侯翁은 소매 속에 있는 문서를 바라보고는 과연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만족하다.”라고 하고서 딸을 王氏에게 주었다.
자식 셋을 두었으니 아들 하나에 딸이 둘이었다. 아들은 세 살 때에 夭死하였고, 큰딸은 亳州의 永城尉 姚侹에게 출가하였고, 작은딸은 이제 막 열 살이다. 銘은 다음과 같다.
鼎은 수레를 멈추는 버팀목으로 써서는 안 되고
말은 문을 지키는 일에 부려서는 안 된다
옥을 차고 소매 긴 옷 입었으니
빨리 달리기에 불리하였네
鼎 佩玉
時運을 만나느냐에 달렸을 뿐
총명하고 우둔함과는 무관하니
사람들의 수요에 맞지 않으면
품은 뜻이 있어도 펼칠 수 없네
돌에 銘辭 새겨
깊은 무덤 속에 진열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