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大家韓文公文抄 卷15 墓誌‧碣‧銘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君諱繼祖
니 司徒贈太師
之孫
이요 少府監贈太子少傅諱暢之子
라
生四歲
에 以
拜太子舍人
하야 積三十四年
에 五轉而至殿中少監
하고 年三十七以卒
하니라 有男八人
과 女二人
하니라
始余
에 在京師
에 窮不自存
이라 以
로 拜北平王於馬前
하니 王問而憐之
하야
因得見於安邑里第
하니라 王軫其寒饑
하야 賜食與衣
하고 하시니라 遇我特厚
하니 少府監贈太子少傅者也
라
姆抱幼子立側
에 하고 髮漆黑
하며 肌肉玉雪
하니 殿中君也
라
後十五六年
에 吾爲尙書都官郞
하야 分司東都
에 而
少傅卒
하야 哭之
하고 又十餘年
에 至今哭少監焉
이라
嗚呼
라 吾未
요 自始至今
히 未四十年
이로되 而哭其祖子孫三世
하니 于人世何如也
오 人欲久不死
나 而觀居此世者何也
오
평생의 벗이었으므로 墓誌 중에 가장 슬프고 처량하여 눈물이 흐를만하다.
馬君은 諱가 繼祖이니, 司徒로 太師에 追贈된 北平 莊武王의 손자이고, 少府監으로 太子少傅에 추증된 諱 暢의 아들이다.
馬繼祖는 네 살 때에 家門의 功績으로 太子舍人에 제수되어 34년을 지나는 동안 다섯 차례 轉遷(승진)하여 殿中少監에 이르렀고, 37세에 卒하였다. 아들 여덟과 딸 둘을 두었다.
전에 내가 막 成年이 되었을 때에 進士科에 응시할 貢生으로 京師에 머물렀는데, 그때 너무 곤궁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옛 벗의 어린 아우라는 구실로 말 앞에서 北平王을 拜謁하였더니, 王께서 사정을 물어보시고는 나를 가엽게 여기셨다.
나는 이로 인해 安邑里의 邸宅에서 王을 뵐 수 있게 되었다. 王께서는 나의 饑寒을 딱하게 여기시어 음식과 의복을 내려주시고, 두 아들을 불러 주인이 되어 〈나를 賓禮로 접대하게 하셨다.〉 두 아들 중에 작은 아들이 나를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으니, 이가 바로 少府監으로 太子少傅에 추증된 분이시다.
그때 乳母[姆]가 어린아이를 안고 곁에 서 있었는데, 그 아이의 용모[眉眼]는 그림 같고 頭髮은 漆黑 같고 살결은 玉雪 같아 매우 사랑스러웠으니, 이가 바로 殿中君이었다.
이때 王을 北亭에서 뵈었는데, 마치 높은 산 깊은 숲 큰 골짜기에 있는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龍虎 같았으니 걸출한 大人이었다.
물러나와 少傅를 뵈니 마치 푸른 대와 푸른 오동 위에 서 있는 鸞鳥와 黃鵠 같았으니 그 家業을 능히 지킬 분이었다.
어린아이는 용모가 아름답고 빼어나서 美玉과 같고 돋아나는 난초의 새싹 같았으니 그 집안에 걸맞는 아이였다.
그로부터 4, 5년 뒤에 나는 進士에 급제하여, 京師를 떠나 東遊할 때에 客舍에서 北平王을 弔哭하였고,
그로부터 15, 6년 뒤에 나는 尙書都官郞이 되어 分司東都할 적에 分府의 少傅께서 卒하시어 弔哭하였고, 또 10여 년이 지난 지금 少監을 弔哭하였다.
아! 내 아직 늙지 않았고, 처음 서로 만날 때로부터 지금까지 아직 40년이 되지 않았는데, 그 祖‧子‧孫 3代를 弔哭하였으니, 인간 세상에 대해 어찌 생각해야 하겠는가?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을 보면 어떠한가?
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편은 歐陽脩의 文章인 〈黃夢升墓誌銘〉‧〈尙書屯田員外郞張君墓表〉 등 여러 작품의 원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