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諱公達이요 字大順이요 薛姓이라 曾祖曰希莊이니 撫州刺史요 贈大理卿하니라
祖曰元暉니 果州流溪縣丞이요 贈左散騎常侍하니라 父曰播니 尙書禮部侍郞이라
侍郞命君後兄據하니 據爲尙書水部郞中이요 贈給事中하니라
君少氣高하야 爲文有氣力하고 務出于奇하야 以不同俗爲主하니라
始擧進士
에 不與先輩揖
하니라 作
러니 京師人未見其書
오도 皆口相傳以熟
하니라
及擢第
하야 補
하야 佐鳳翔軍
하니라 軍帥武人
이라 君爲作書奏
에 讀不識句
하니 傳一幕以爲笑
로되 不爲變
하니라
後九月九日에 大會射할새 設標的호되 高出百數十尺하고 令曰 中이면 酬錦與金若干하리라 一軍盡射나 莫能中이라
君執弓하고 腰二矢하고 指一矢以興하야 揖其帥曰 請以爲公歡이라하고 遂適射所하니 一座皆起隨之하니라
射三發하야 連三中하니 的壞하야 不可復射라 中에 輙一軍大呼以笑하니라
連三大呼笑하니 帥益不喜어늘 卽自免去하니라 後佐河陽軍에 任事去害興利하야 功爲多하니라
拜協律郞하얀 益棄奇하고 與人爲同하니라 今天子修太學官에 有公卿言하니 詔拜國子助敎하야 分敎東都生하니라
元和四年에 年四十七이라 二月十四日疾暴卒하니라 君再娶하니 初娶琅邪王氏요 後娶京兆韋氏라
凡産四男五女나 男生輙卽死하니라 自給事至君히 後再絶이나 皆有名하니라 遺言曰 以公儀之子己巳後我하라하니라
其年閏三月卄一日에 弟試太子通事舍人公儀와 京兆府司錄公幹이 以君之喪歸하야
以五月十五日葬于京兆府萬年縣少陵原하니라 合祔王夫人塋하니라 銘曰
宦不遂는
歸譏於時어니와
身不得年은
又將尤誰오
世再絶而紹하니
祭以不隳로다
君은 諱가 公達이고 字가 大順이며 姓은 薛氏이다. 曾祖父 薛希莊은 撫州刺史를 지냈고 大理卿에 추증되었다.
祖父 薛元暉는 果州 流溪縣丞을 지냈고 左散騎常侍에 추증되었다. 父親 薛播는 尙書禮部侍郞을 지냈다.
侍郞公께서 君에게 명하여 그 형님 薛據의 뒤를 잇게 하였는데, 설거는 尙書水部郞中을 지냈고, 給事中에 추증되었다.
薛君은 소년 때부터 기개가 高大하여 문장에도 힘이 있고, 특별하기를 힘써서 流俗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主義로 삼았다.
처음 〈京師에 와서〉 進士試에 참가했을 때에도 先輩들에게 揖을 하지 않았다. 〈胡馬〉 詩와 〈圓丘〉 詩를 지었는데, 京師 사람 중에 그 詩稿를 〈직접〉 본 사람이 없었는데도 모두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하여 익히 알고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자, 家令主簿에 補任되어 鳳翔軍을 보좌하였다. 鳳翔軍의 軍帥(軍中의 將帥)는 武人이라서 薛君이 그를 위해 지은 書簡이나 章奏를 읽을 때에 句를 뗄 곳을 알지 못하니, 〈이 소문이〉 온 幕府에 전해져서 사람들은 軍帥를 비웃었으나, 薛君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 뒤 9월 9일에 전군이 모여 활쏘기를 할 적에 標的을 지면에서 백수십 척이나 되는 높은 곳에 설치하고서 명령하기를 “화살이 과녁을 맞히면 약간의 비단과 돈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전군이 모두 쏘았으나 누구도 맞히지 못하였다.
이에 薛君이 활을 잡고 허리에 두 대의 화살을 차고 손에 한 대의 화살을 쥐고서 일어나 軍帥에게 읍하며 말하기를 “제가 활을 쏘아 장군을 즐겁게 하기를 청하오니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활 쏘는 장소로 가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뒤를 따랐다.
薛君이 세 대를 쏘아 연거푸 맞히니 과녁이 망가져서 더 이상 쏠 수가 없었다. 맞힐 때마다 全軍이 크게 환호하며 웃었다.
연거푸 세 번 크게 환호하며 웃으니, 軍帥가 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자 薛君은 즉시 스스로 辭職하고 떠났다. 뒤에 薛君이 河陽軍을 보좌할 때에 일을 맡아 해로움을 제거하고 이로움을 일으켜 세운 공이 많았다.
協律郞에 제수되어서는 특별하기를 더욱 포기하고 사람들과 함께하였다. 지금 天子께서 太學官을 정비할 때에 어떤 公卿이 進言하니, 조서를 내려 薛君을 國子助敎에 제수하여 洛陽으로 가서 東都의 學生을 敎授하게 하였다.
나이 마흔일곱이던 元和 4년(809) 2월 14일에 병이 나서 暴卒(急死)하였다. 薛君은 장가를 두 번 들었는데, 初娶는 琅邪 王氏이고, 後娶는 京兆 韋氏이다.
모두 4남 5녀를 낳았는데, 사내아이는 매번 낳자마자 죽었다. 그래서 給事中(薛君의 養父인 薛據)으로부터 설군에 이르기까지 두 代에 後嗣가 끊겼으나 두 분 모두 명망이 있었다. 〈설군은 죽을 때에〉 “公儀의 아들 己巳를 나의 후사로 삼으라.”고 遺言하였다.
그해 윤3월 21일에 아우 試太子通事舍人 薛公儀와 京兆府司錄 薛公幹이 君의 喪柩를 모시고 돌아와서
5월 15일에 京兆府 萬年縣 少陵原에 장사 지냈다. 王夫人의 무덤에 合祔하였다. 銘은 다음과 같다.
벼슬길 순조롭지 못했던 것은
시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자신이 수명 얻지 못한 것은
또 누구를 탓할 건가
대가 두 번 끊겼다가 이어졌으니
제사 끊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