樊紹述旣卒
하야 且葬
할새 愈將銘之
하야 從其家求書
하야 得書
하니 者三十卷
과 曰樊子者又三十卷
과
道路所遇及器物門里雜銘二百二十賦十詩七百一十九하고
曰 多矣哉라 古未嘗有也라 然而必出於己하고 不襲蹈前人一言一句하니 又何其難也오
然而不煩於
而自合也
라 嗚呼
라 紹述於斯術
에 其可謂至於斯極者矣
라
生而其家貴富
로되 長而不有其藏一錢
이라 妻子告不足
이면 顧且笑曰
라하니
皆應曰 然
이라하고 無不意滿
하니라 嘗以金部郞中
이라가 還言某師不治
하야 罷之
하니라
以此出爲綿州刺史하니라 一年에 徵拜左司郞中하고 又出刺絳州하니라
綿絳之人至今皆曰 於我有德이라하니라 以爲諫議大夫하야 命且下에 遂病以卒하니 年若干이라
紹述諱宗師
라 父諱澤
이니 嘗
하야 官至右僕射
하고 贈某官
하니라 祖某官
이요 諱泳
이라
紹述無所不學이요 於辭於聲天得也나 在衆若無能者라 嘗與觀樂에
問曰 何如오 曰 後當然이리라 已而果然하니라 銘曰
惟古於詞必己出이러니
降而不能乃剽賊이라
後皆指前公相襲하야
從漢迄今用一律이라
은 神徂聖伏道絶塞
이라 旣極乃通發紹述
하니 이라 有欲求之此其躅
이라
昌黎의 문장에는 奇崛한 곳이 많으나, 難澁한 곳도 많다.
樊紹述이 서거하여 장사 지내려 할 때에 나 韓愈가 그의 墓誌銘을 지으려고 그 집안에 그가 지은 글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지은 ≪魁紀公≫ 30권, ≪樊子≫ 30권,
≪春秋集傳≫ 15권, 表牋‧狀策‧書序‧傳記‧紀誌‧說論‧今文讚銘 등 모두 291편과
도로에서 만났던 器物이나 門里에 새긴 雜銘 220篇, 賦 10篇, 詩 719편을 얻고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많기도 하구나. 옛사람 중에도 〈지은 문장이〉 이처럼 많은 이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이 반드시 자기에게서 나왔고 前人의 一言半句도 因襲하지 않았으니 또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의 문장은〉 반드시 仁義를 出入하여 내용의 풍부함이 마치 〈천지가〉 생산하고 蓄養하여 만물이 모두[必] 갖추어진 것 같고, 바다가 百川을 용납하듯, 大地가 만물을 싣듯, 자유분방하게 문장을 구사하여 얽매임이 없었다.
번거롭게 바로잡고 깎아내지 않아도 저절로 문장의 법도에 맞았다. 아! 紹述은 문장에 대해 지극한 경지에 이른 자라고 이를 만하다.”
紹述이 출생했을 때는 그 집안이 富貴하였는데, 장성한 뒤에는 집안에 간직한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아내나 자식이 돈이 부족하다고 고하면 紹述은 돌아보고 웃으면서 “나의 道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라고 하니,
그 妻子는 모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불만스러워하는 뜻이 없었다. 일찍이 金部郞中으로 南方에 告哀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아무 節度使가 정치를 잘못한다고 보고하여 그 절도사를 파직시킨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紹述도 綿州刺史로 나갔다. 1년 뒤에 부름을 받아 左司郞中에 제수되고, 또 絳州刺史로 나갔다.
綿州와 絳州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모두 “우리에게 恩德이 있었다.”라고 한다. 그를 諫議大夫로 삼고서 任命狀을 내리려 하였는데 마침내 병으로 卒하였으니 향년이 若干 歲였다.
紹述은 諱가 宗師이다. 父親은 諱가 澤인데 일찍이 襄陽節度使와 江陵節度使를 지냈으며, 관직이 右僕射에 이르고 某官에 추증되었다. 祖父는 某官을 지냈고, 諱는 泳이다.
祖父로부터 紹述에 이르기까지 3대가 모두 軍謀宏遠堪任將帥科의 對策에 상등으로 급제하여 進用되었다.
紹述은 배우지 않은 것이 없고, 문장과 음악에 天賦의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하였다. 그와 음악을 감상한 적이 있는데,
그에게 “이 음악이 어떻게 흘러가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 曲은 뒤에 응당 저렇게 펼쳐질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銘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文詞가 반드시 자기에게서 나왔는데
후세에는 그럴 능력 없어서 표절하였네
후인들 모두 前人을 공공연히 표절하여
漢代부터 지금까지 시문의 격식이 판에 박은 것 같네
오랫동안 적막하여 문장 짓는 방법 깨닫지 못한 것은
神人은 가고 聖人은 은둔하여 道統이 끊어졌기 때문이네
궁극에 도달하면 통하는 것이라서 紹述이 나오니
문맥이 잘 통하고 용어사용이 적절하여 각각 합당하였네
작문의 방법을 배우려 하면 소술이 바로 그 궤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