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直敍 須看他句法字法淘洗鼓鑄處
公諱啓 字某 河南人이라 其大王父融이요 王父琯이니 仍父子爲宰相이라
融相天后하니 事遠不大傳하니라 琯相玄宗肅宗하야 處艱難中에도 與道進退하고
薨贈太尉하야 流聲于玆하니라 父乘 仕至祕書少監하고 贈太子詹事하니라
하고 하야 하야 不學以能하니라
始爲鳳翔府參軍 尙少로되 人吏迎觀望見하고 咸曰 眞房太尉家子孫也라하야 不敢弄以事하니라
轉同州澄城丞하야 益自飾理하니 同官憚伏하니라 求佐得公하야 擢摘良姦하니大喜하니라
還進昭應主簿하니라 表公爲佐하고 拜監察御史하니 部無遺事하니라
冑遷江西하고 又以節鎭江陵 公一隨遷佐冑하니 累功進至刑部員外郞하야 賜五品服하고 副冑使事爲하니라
上聞其名하고 徵拜虞部員外하니라 在省籍籍러니 遷萬年令 하니라
貞元末 材公之爲하야 하고 拜御史中丞하야 이요 管有嶺外之地하니라
하야 不相이어늘 하니 公私有餘하니라
削衣貶食하며 하고 以班親舊朋友爲義하니라 在容九年타가 하고 封淸河郡公하니 食邑三千戶
應待失禮하야 客主違言하니 徵貳太僕하니라 未至 貶虔州長史하고하니라
以疾卒官하니 年五十九 其子越 能輯父事無失하야 하니라 旣葬 碣墓請銘이어늘 銘曰
房氏二相하니
厥家以聞이라
이온

公初爲吏
亦以

乃始已致
旣辦萬年
命屛容服이라
功緖卓殊하니
이라
維不順隨라가
失署亡資
非公之怨이라
銘以著之하노라


16. 淸河郡公 房公墓碣銘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모름지기 句法字法을 세탁하고 鑄造한 곳을 보아야 할 것이다.
房公이고 가 아무개인데, 河南 사람이다. 그 曾祖父房融이고 祖父房琯이니, 연이어 父子가 재상을 지냈다.
房融則天武后 때에 재상을 지냈으니, 시대가 이미 오래되어 事蹟이 크게 전해지지 않는다. 房琯玄宗肅宗 때에 재상이 되어, 어려운 가운데 있으면서도 出仕隱退에 맞게 하였고,
薨逝하자 太尉에 추증되어, 명성이 오늘까지 전해진다. 父親 房乘은 벼슬이 祕書少監에 이르렀고, 太子詹事에 추증되었다.
房公祖先의 공덕으로 〈가문이 영예로울 때에〉 胚胎되었고, 출생해 자랄 적에 먹고 호흡하는 사이에도 典訓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 눈에 익고 귀에 젖어서 배우지 않고도 능하였다.
처음 鳳翔府參軍이 되었을 때에 아직 나이가 적었으되 영접하는 官吏들이 바라보고는 모두 “참으로 房太尉家子孫이로다.” 하고서 감히 公事로써 을 속이지 못하였다.
同州 澄城縣丞으로 榮轉해서는 몸가짐을 더욱 삼가고 다스리니, 동료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衛晏嶺南黜陟使가 되었을 때에 輔佐할 사람을 구하여 房公을 보좌로 삼고, 良吏를 발탁하고 姦吏를 제거하니 남방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돌아온 뒤에 昭應主簿로 승진하였다. 裴冑湖南觀察使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 表奏하여 房公輔佐로 삼고, 監察御史에 임명하니 소관부서에서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裴冑江西觀察使가 되고, 또 江陵尹 荊南節度使가 되었을 때에도 房公은 한결같이 移動하는 裴冑를 따라가 보좌하니, 이 쌓여 승진해 刑部員外郞에 이르러 5品服을 하사받고 裴冑節度使의 일을 補助[]하는 上介가 되었다.
皇上께서 房公의 이름을 들으시고 그를 불러들여 虞部員外에 제수하셨다. 尙書省에서 명성이 자자하더니 萬年縣令으로 승진해서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과감히 결단하고 밝게 분변하고 급속히 처리하였다.
貞元 말엽 王叔文執政[用事]하였을 때에 房公人材로 여겨 房公을 천거해 容州經略使로 삼고 御史中丞에 제수하고서 3에 준하는 官服佩帶를 내리고 嶺外(嶺南) 13개 의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숲속과 굴속에 거주하는 蠻夷가 〈房公善政에 감화하여〉 조약을 사수하여 서로 약탈하지도 겁박하지도 않자, 〈방공은〉 賦稅를 줄여주고 제때에 징수하니 公家私家에 모두 여유가 있었다.
房公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줄이고 재물을 물려줄 계책을 세우지 않고서 친척과 벗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義理로 여겼다. 容州에 9년 동안 있다가 승진하여 桂管觀察使가 되고 淸河郡公에 봉해지니 食邑이 3천 였다.
中人(宦官)이 使者로 와서 房公에게 詔書를 전하였는데, 房公이 그를 에 맞게 접대하지 않아, 主客 사이에 언어로 인한 不和가 생기니 이에 〈황제는〉 房公徵召하여 太僕少卿으로 삼았다. 이에 京師에 당도하기 전에 虔州長史貶斥하고, 使者死刑에 처하였다.
질병으로 에서 하니 향년이 59세였다. 그 아들 房越은 부친의 事跡을 빠짐없이 수집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효도를 다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墓碣을 세우고자 나에게 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을 짓는다.
房氏 가문에 두 재상 나오시어
그 가문의 명성 드러내셨네
支孫들도 은택 입었는데
손자인 공이야 말해 뭣하랴
공이 처음 관리 되신 것도
조상의 공덕 힘입어서이지
남방에서 黜陟使 보좌할 때에
처음임에도 치적을 이루셨네
萬年縣에서 현령의 직무 마친 뒤에
명을 받고 멀리 容州에서 복무했네
공적이 탁월하니
蠻夷들도 도리를 따르고 생업을 즐겼네
使者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가
관직도 잃고 재물도 잃으셨네
房公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명을 지어 그 평생을 드러내기 위함이네


역주
역주1 淸河郡公房公墓碣銘 : 이 墓碣銘은 元和 10년(815)에 房啓를 위해 지은 것이다.
역주2 胚胎前光 : 受胎할 때 이미 祖先의 공덕으로 가문이 영예로웠다는 말이다. 前光은 先人의 功德을 이른다.
역주3 生長食息 : 생장하는 과정에 먹고 호흡함이다.
역주4 不離典訓之內 : 준칙이 되는 교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음이다.
역주5 目擩耳染 : 눈에 익고 귀에 젖음이니, 곧 항상 접하여 영향을 받음이다.
역주6 衛晏使嶺南黜陟 : 衛晏이 嶺南黜陟使가 된 것이다. 黜陟使는 人才의 진퇴와 官吏의 昇降을 관리한다. ≪舊唐書≫ 〈德宗紀〉에 “建中 元年(780) 2월 丙申日에 黜陟使 11인을 파견하여 천하를 나누어 巡行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7 (士)[土] : 저본에는 ‘士’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와 사고전서본 ≪唐宋八大家文抄≫에 의거하여 ‘土’로 바로잡았다.
역주8 裴冑領湖南 : ≪舊唐書≫ 〈德宗紀〉에 “貞元 3년(787) 윤5월 乙卯日에 國子司業 裴冑를 潭州刺史 湖南觀察使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9 上介 : 軍政을 맡은 長官의 고급 보좌역을 가리킨다.
역주10 果辯憿絶 : 과감히 결단하고 밝게 분변하여 신속히 처리함이다. 憿絶은 빠름(疾速)이다.
역주11 王叔文用事 : 王叔文이 執政했을 때를 이른다. 王叔文에 대해서는 앞의 〈柳子厚墓誌銘〉의 譯註를 참조.
역주12 擧以爲容州經略使 : 王叔文이 房啓를 천거해 容州經略使가 되게 한 것이다. ≪舊唐書≫ 〈順宗紀〉에 “貞元 21년(805) 5월 정축에 萬年縣令 房啓를 容管經略招討使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13 服佩視三品 : 視는 견줌이니, 곧 3品官에 준하는 衣服과 佩帶를 내렸다는 말이다. 佩帶는 띠에 차는 魚符를 넣는 주머니이다.
역주14 十三州 : 容管에 예속된 容州‧辨州‧白州‧牢州‧欽州‧巖州‧禹州‧湯州‧瀼州‧古州 등이다.
역주15 林蠻洞蜒 : 숲속에 사는 蠻人과 굴속에 사는 夷人을 이른다. 蜒은 蜑이 되어야 하니 南夷를 이른다.
역주16 守條死要 : 守死條要이다. 條要는 조약이니, 약조한 것을 死守함이다.
역주17 漁劫 : 漁는 掠奪함이고, 劫은 劫迫함이다.
역주18 稅節賦時 : 賦稅를 節減해 주고 정해진 시기에 징수하였다는 말이다.
역주19 不立資遺 : 資遺는 재물을 줌인데, 여기서는 재물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역주20 遷領桂州 : 桂州觀察使로 옮긴 것이다. ≪舊唐書≫ 〈憲宗紀〉에 “元和 8년(813) 4월에 房啓를 桂管觀察使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桂州는 桂管觀察使의 治所로 지금의 廣西省 桂林市이다.
역주21 中人使授命書 : 房啓가 처음 桂管觀察使로 제수되었을 때에 桂管道의 邸吏가 吏部의 官吏에게 뇌물을 주고서 사사로이 房公의 官告를 얻어 가지고 급히 驛馬를 타고 달려가서 房公에게 알려주었다. 이윽고 唐 憲宗이 직접 中使를 보내어 詔書를 가지고 가서 방계에게 전하게 하였다. 房公은 使者가 많은 賂物을 요구할 것이 두려워서 즉시 “이미 5일 전에 詔書를 받았다.”고 하니, 使者가 그 詔書를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房公이 보여주자 使者가 보고는 돌려주지 않고 가지고 돌아가서 皇帝께 아뢰니, 황제가 노하여 吏部의 관리를 杖刑에 처하고 房公도 太僕少卿으로 貶降시켰다.(≪舊唐書≫ 〈憲宗紀〉)
역주22 坐使者 : 使者를 사형에 처한 것을 이른다. ≪五百家注昌黎文集≫에 “9월 戊午에 中官 李建章이 房啓의 賂物을 받은 죄에 걸려 백 대의 杖을 맞고 사형에 처해졌다. 癸未에 房啓를 虔州長史로 貶斥하였다. 房啓는 전에 李建章에게 노비 15인을 뇌물로 준 적이 있었다. 房啓는 李建章이 官告의 일을 發告한 것을 원망해 그에게 노비를 준 일을 上言하니, 皇帝는 李建章을 죽인 뒤에 房啓도 아울러 貶黜하였다.[九月戊午 中官李建章坐受啓賂 杖一百 處死 癸未 貶啓虔州長史 啓先賂建章口十五人 旣怨其發官告事 乃具上言 帝旣殺建章 幷黜啓]”는 기록이 보인다.
역주23 謹謹致孝 : 謹謹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양이고, 致孝는 효도를 다함이다.
역주24 條葉被澤 : 條葉은 子孫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支孫을 가리킨다.
역주25 況公其孫 : ‘하물며 공은 두 분의 適孫임에랴.’라는 말이다.
역주26 門庇 : 門蔭과 같은 말로, 祖先의 功德을 이른다.
역주27 佐使于南 : 남방에서 黜陟使 衛晏을 보좌한 때를 이른다.
역주28 氓獠循業 : 氓獠는 남방에 사는 蠻族을 이르고, 循業은 도리를 따르고 生業을 즐긴다는 말인 듯하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