維年月日
에 行軍司馬守太子右庶子兼御史中丞韓愈
는 謹遣某乙
하야
彼
者
는 實憚吾曹
하야 나 라 我落陽山
하야 以尹鼯猱
하고 君飄臨武
하야 라
에 하야 顚於馬下
하니 我泗君咷
라 夜息
에 同臥一席
하니 가 觝頂交跖
이라
洞庭漫汗
하야 하고 風濤相豗
하니 中作霹靂
이라 하니 颿船箭激
이라
君止于縣
하고 我又南踰
라 把𧣴相飮
에 아 하야 一
相語
라
自別幾時
완대 遽變寒暑
아 라 僕來告言
호대 虎入廐處
나 無敢驚逐
터니 以我𩦺去
라
君云是物
은 이라 虎取而往
하니 이라 我預在此
하니 與君俱膺
하리라 猛獸果信
인댄 惡禱而憑
가
余出嶺中
에 君俟州下
라 은 非余望者
라 郴山奇變
하고 其水淸寫
라
泊沙倚石
하고 有遌無捨
라 衡陽
하고 熊咆虎嗥
하야 라
湘流
하고 往觀南嶽
하니 하고 이라 避風
하야 七日
이라
予徵博士
하고 하야 相見京師
는 라 分敎東生
하고 라
兩都相望
하니 於別何有
리오 이 遂十一年
이라 君出我入
하니 如相避然
이라 生闊死休
니 呑不復宣
하리라
刑官屬郞
에 하니 權臣不愛
하야 하고 明條謹獄
하니 戶歌
라
用遷灃浦
하얀 라 還家東都
라가 起令河南
이라 하니 憤所不堪
이라
屢以正免
하니 이라 竟死不昇
하니 孰勸爲善
가 에 余辱司馬
라 議兵大梁
하고 走出洛下
라
哭不憑棺하고 奠不親斝하며 不撫其子하고 葬不送野로라 望君傷懷하야 有隕如瀉라
銘君之績하야 納石壤中에 爰及祖考히 紀德事功하야 外著後世하고 鬼神與通하리니 君其奚憾하야 不余鑑衷가 嗚呼哀哉라 尙饗
韓文公의 문장 중에 신기하고 강건하여 마치 귀신이 싸우는 것 같은 곳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현란하게 한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彰義軍行軍司馬 守太子右庶子 兼御史中丞 韓愈는 삼가 아무개를 보내어
여러 가지 음식과 맑은 술을 제물로 바쳐 亡友 前 河南縣令 張十二員外의 英靈에 제사를 올립니다.
貞元 19년(803)에 그대가 御史가 되었을 적에 무능한 나도 조서를 받아 御史가 되어 함께 조정에 섰지요.
그대는 德行이 질박하고 강직하여 고상함을 표방하고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보면 치욕으로 여겨 唾棄했지요.
그러나 나는 어리석고 광망하여 나이가 채 36세도 못 되었으면서 오기를 부려 남을 능멸하고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부하였다오.
저 아첨하는 소인은 실로 우리를 겁내어 비굴하게 굽실거렸지만 칼날 같은 혀를 갖고 〈우리를 참소해〉 나는 陽山으로 貶斥되어 날다람쥐와 원숭이 같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현령[尹]이 되었고, 그대는 臨武로 폄척되어 山林에 갇혔지요.
우리는 모질게 추운 歲末에 〈任地로 길을 떠났는데,〉 눈이 모질고 바람이 거세어 말에서 떨어지니, 나는 콧물(눈물)을 흘렸고 그대는 목 놓아 울었지요. 밤이 되어 南山에서 휴식할 때에 한 자리에 같이 누우니, 守衛하는 士卒들과 이마가 서로 닿고 다리가 서로 얽혔지요.
광활한 洞庭湖는 하늘과 맞닿아 끝이 없는데 거대한 물결이 서로 부딪쳐 천둥소리 냈지요. 길을 재촉해 급히 前進하니 돛단배 쏜살같이 달렸지요.
남쪽의
湘水로 올라가니
屈原이 빠져 죽은 곳이고,
二妃(
娥皇‧
女英)가 길을 헤매다가 통곡하며 흘린 눈물의 흔적이 대나무를 물들인 곳이기도 하지요.
屈原 娥皇 女英
山도 슬피 울고 개[浦]도 그리워하며 새와 짐승도 부르짖었지요. 내가 詩를 부르면 그대가 화답하여 우리 백 편의 시를 읊었지요.
그대는 臨武縣에서 멈추었고 나는 남쪽으로 더 가야 했지요. 〈이별에 앞서〉 술잔 들고 함께 마실 적에 뒤에 다시 만날 약속 있었던가요? 州縣의 경계에서 묵으며 하루 저녁 내내 이야기 나누자고 약속했지요.
이별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갑자기 寒暑가 바뀌었단 말입니까? 〈그날 밤 함께 잠을 잘 적에 그대는〉 팔을 베고 비스듬히 누워서 내 몸 위에 다리를 얹어놓았지요. 그때 僕夫(구종)가 와서, “호랑이가 마구간으로 들어갔으나 겁이 나서 감히 쫓아내지 못했더니 우리 당나귀를 물어갔습니다.” 하고 아뢰었지요.
그러자 그대는 “나귀란 물건은 타고 달릴 만큼 빠르지 못하다. 호랑이가 물어갔으니, 오는 해 寅月(정월)에 좋은 일이 있을 징조이다. 나도 이곳에서 이 일에 참여하였으니 나도 그대와 함께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라고 하였지요. 猛獸(호랑이)의 靈驗함을 과연 믿을 수 있다면 어찌 기도하여야 효험이 나타나겠소.
내가 陽山嶺中에서 나왔을 때에 그대는 이미 와서 郴州에서 나를 기다렸지요. 우리 함께 江陵의 掾吏된 것은 내가 바란 바가 아니었지요. 郴山은 경치가 기이하여 변화가 무상하고 郴水에는 맑은 물이 빠르게 흘렀지요.
모래 언덕에 배를 대고 바위에 기대었으며 아름다운 경치 만나면[遌] 그냥 지나지 않았지요. 衡陽에서 술을 실컷 마시고 곰처럼 범처럼 포효하여 酒令을 마음에 두지 않으니 罰을 세는 산가지 고슴도치 털처럼 많았지요.
배를 타고
湘水를 따라 내려가서
南嶽(
衡山)을 구경하니, 구름 위로 솟은 봉우리들은 높기도 하고, 깊숙한
樹林에는 나무들 곧게 뻗었지요.
太湖에서 바람을 피해
鹿角洲에서 7일을 머물렀지요.
衡岳圖
거대한 메기를 낚아 올리니 아가미 벌렁거리며 돼지 우는 소리 냈지요. 그 메기 구워 소반에 담고 술을 데워 함께 먹고서 남은 것은 노복들에게 먹였지요. 江陵에 부임해선 뜰아래에서 절을 하였고, 길에서 從事를 만나면 말에서 내려 길가에 엎드려 절을 했지요.
나는 부름을 받아 博士가 되고, 그대는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가지 않아서 우리가 京師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은 당초에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었지요. 나는 分司하여 東都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그대는 京兆府의 司祿參軍이 되었지요.
東都(洛陽)와 西都(長安)에서 서로 아득히 바라볼 뿐이니, 이별과 무엇이 다르겠소. 우리가 서로 헤어진 지가 드디어 11년이 되었구려. 그대가 나오면 내가 들어가니 마치 서로 피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소. 살아서의 이별이 죽어서야 끝났으니, 내 슬픔을 삼키고서 다시 말하지 않겠소.
刑部의 員外郞이 되었을 때에는 법률에 근거해 남의 非理를 적발하여 끝까지 공격하니 權臣에게 미움 사서 南康으로 左遷[斡]되었고, 〈南康에 있을 때는〉 法條를 嚴明(엄정하고 명확함)하게 적용하고 獄事를 신중하게 판결하니, 남방의 백성들이 집집마다 頌歌를 불렀지요.
灃州刺史로 榮轉[遷]해서는 백성들을 위하다가 도리어 해를 입었지요. 東都의 집으로 돌아왔다가 河南縣令으로 起用되셨지요. 굴욕을 참아가며 날마다 後生에게 절을 하자니 울분을 견딜 수 없으셨지요.
정직함으로 인해 누차 免職되니 몸가짐은 곧았으나 벼슬길은 막혀서, 끝내 죽을 때까지 승진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사람들에게 善行을 하라고 권장하겠소. 丞相이 남방을 토벌하실 때에 나는 行軍司馬였는데, 大梁으로 가서 兵事를 의론하고는 洛陽으로 달려갔지요.
나는 그대의 棺에 기대어 哭도 하지 못하고, 친히 술잔 들어 奠도 올리지 못하고, 그대의 아들을 慰撫하지도 못하고, 郊野까지 나가 送葬하지도 못하였소. 그대를 바라보니 가슴이 아파 눈물이 흐르오.
그대의 事績 돌에 새겨 땅속에 묻을 때에 그대의 祖考(祖先)까지 德行과 공적을 기록하여 밖으로 후세에 전하고 귀신과 통하게 할 것이니, 그대 무슨 한이 있어서 나의 衷心 살피지 않겠소. 아! 슬프오. 흠향하기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