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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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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在太原者爲姬姓이라 春秋時王子成父敗狄有功으로 因賜氏러니 厥後世居太原하니라
至東漢隱士烈하야 博士徵不就하고 居祁縣하니 因號所居鄕爲君子라하니라
公其君子鄕人也 魏晉涉隋 世有名人이라 國朝大王父玄暕 하야 止尙書郞하니라
生景肅하니 守三郡하고 終傅涼王하니라 生政하니 襄鄧等州防禦使鄂州採訪使贈吏部尙書하니라
尙書之第某子 公諱仲舒 字弘中이라 少孤하야 奉母夫人家江南하니라
讀書著文하니 其譽하야 當時名公하니라
貞元初 하야 與陽城合遏裴延齡不得爲相하니라 德宗初怏怏無奈 久而嘉之하다
其後入閣 德宗顧列謂宰相曰 第幾人 必王某也라하더니 果然이라
月餘 特改右補闕이라가 遷禮部考功吏部三員外郞하니라 在禮部 奏議詳雅하니 省中伏其能하니라
在考功吏部 하니 吏無以欺하니라 同列有恃恩自得者러니 衆皆媚承이나 公嫉其爲人하야 不直視하니라
하니라 移夔州司馬라가 又移荊南이러니 因佐其節度事하야 爲參謀하야 得五品服하니 在外積四年이라
元和初 收拾俊賢할새 徵拜吏部員外郞하고 未幾 爲職方郞中知制誥하니라
由是出爲峽州刺史라가 轉廬州하니라 未至 丁母夫人憂하니라 服除 又爲婺州하니라
時疫旱甚하야 人死亡且盡이러니 公至하야 多方救活하니라 天遂雨하고 疫定하야 比數年里閭完復하니라
出巡 人塡道迎顯公德하니라 事具聞 就加金紫하니라
轉蘇州하야 變其屋居以絶火延하고 隄松江路하야 害絶阻滯하니라
秋夏賦調 自爲書與人以期하야 吏無及門而集하니 政成爲天下守之最하다
天子曰 王某之하니 最宜爲 有古風하니 豈可久以吏事役之리오하고 復拜中書舍人하다
旣至京師하니 儕流無在者하고 視同列皆邈然少年이라 益自悲하야 而謂人曰 豈可復治筆硯於其間哉
上若未棄臣인댄 宜用所長이라 在外久하야 周知俗之利病하니 俾治之 當不自愧리라
宰相以聞하야 遂得觀察江南하야 奏罷九千萬하다
人遭水旱하여 賦窘하니 公曰 我且減燕樂하고 絶他用錢이면 可足乎인저하고 遂以代之하니라
罷軍之息錢하고하며 壞其舍以葺公宇하니 三年 法大成하야 錢餘於庫하고 粟餘於廩하야
人享于田廬하고 謳謡於道途하니라 天子復思하야하야 虛吏部左丞位以待之하니라
長慶三年十一月十七日 薨於洪州하니 年六十二 上哀慟輟朝하고 贈左散騎常侍하다 某日歸葬於某處
某旣以公之德刻而藏之墓矣 子初又請詩以揭之하다 詞曰
生人之治
本乎이어늘
有事其末하고
而忘其源이라
切近昧陋
道由是堙이라
有志其本이면
而泥古陳하고
當用而迂하면
乖戾不伸이라
較是二者
其過也均이라
有美王公
志儒之本하고
達士之經하야
하고
이라
韡爲華英이로되
不矜不盈이라
孰播其馨이며
孰發其明
而居하니
士友以傾이라
敷文帝階하야
擢列侍從이라
以忠遠名하야
有直有諷이라
辨遏堅懇하니
巨邪不用이라
秀出班行하니
乃動帝目이라
帝省竭心하야
恩顧日渥이라
하고
이라
發帝之令
簡古而蔚이라
不比于權하고
以直友寃이라가
敲撼挫揠하야
竟遭斥奔이라
久淹于外하야
歷守大藩이라
所至極思하야
必悉利病이라
萎枯以膏하고
燠暍以醒이라
坦之敞之하야
必絶其徑하고
浚之澄之하야
使安其泳이라
帝思其文하사
復命掌誥하니
公潛謂人호되
此職宜少
豈無凋郡하야
庸以自效
上藉其實하야
俾統于洪이라
逋滯攸除하니
姦訛革風이라
祛蔽于目하고
釋負于躬이라
하야
禁絶浮屠
風雨順易하야
秔稻盈疇
人得其所하야
乃恬乃謳
化成有代
思以息勞
虛位而竢러니
奄忽滔滔
維德維績
志于斯石하니
遠彌高리라


07. 太原 사람 王公神道碑銘
王氏는 모두 王者後裔이니 太原에 사는 자들은 본래 姬姓이었다. 春秋時代王子 成父赤狄敗退시킨 공이 있음으로 인해 ‘’을 로 하사받았는데, 그 후손이 대대로 太原에 살았다.
東漢 때에 이르러 隱士 王烈博士徵召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祁縣에 거주하니 사람들이 그가 사는 마을을 일러 ‘君子鄕’이라 하였다.
王公은 군자향 사람이다. 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著名한 사람이 있었다. 나라에 들어와서 공의 大王父(曾祖) 王玄暕三院에 속한 御史를 역임하였는데, 관직이 尙書郞에 그쳤다.
王仲舒王仲舒
왕현간이 王景肅을 낳았는데, 세 고을의 郡守를 지내고 涼王師傅로 벼슬을 마쳤다. 왕경숙이 王政을 낳았는데, 襄州鄧州 등의 防禦使鄂州採訪使를 지내고 吏部尙書에 추증되었다.
尙書(王政)의 몇째 아들이다. 공은 휘가 仲舒이고 자가 弘中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母夫人을 모시고 江南에서 살았다.
글을 읽고 문장을 지으니 그 명성이 성대하여 당시의 名公들이 모두 官位輩行을 낮추고서 벗이 되기를 원하였다.
貞元 초년에 과거에 응시하여[射策] 左拾遺에 제수되어, 陽城과 협력하여 裴延齡이 재상이 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德宗께서 처음에는 매우 불평스러워하셨으나 오랜 뒤에는 가상하게 여기셨다.
그 뒤 공이 內閣에 들어갔을 때에 德宗께서 반열을 돌아보며 재상에게 “몇 번째의 사람은 반드시 왕 아무개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달포 뒤에 특별히 공을 右補闕에 제수하였다가 禮部考功吏部 등 세 員外郞으로 승진시키셨다. 공이 禮部에 있을 적에는 올린 奏議가 자상하고 정당하니 온 省中이 그 재능에 탄복하였다.
考功吏部에 있을 적에는 規約提示하고 故事(前例)를 밝히니 胥吏들이 속일 수 없었다. 同列(동료) 중에 皇恩을 믿고서 우쭐대는 자가 있었는데, 百官[]들은 모두 아첨해 그자의 비위를 맞추었으나, 공은 그자의 사람됨을 미워해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로 인해 連州司戶左遷되었다. 夔州司馬로 옮겼다가 또 荊南으로 옮겼는데, 荊南節度使의 일을 도움으로 인해 參謀가 되어 5品服을 받았으니, 外職으로 떠돈 지 4년 만이었다.
元和 초년에 才德이 뛰어난 人才를 모을 때에 공을 불러 吏部員外郞에 제수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職方郞中 知制誥에 임명하였다.
왕공의 벗이 죄를 얻어 축출된 뒤로는 그 집안의 친척이나 知人들도 그 집 앞을 지날 적이면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였는데, 왕공은 홀로 가서 형편과 안부를 물었으며, 벗을 위해 계획하고 논의하여 벗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이로 인해 外職으로 나가 峽州刺史가 되었다가 廬州刺史轉職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母親喪을 당하였다. 喪期를 마친 뒤에 또 婺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이때 疫病과 가뭄이 심하여 사람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는데, 왕공은 부임하자마자 여러 방법으로 救活하였다. 드디어 비가 내리고 역병도 진정되어 몇 년 전에 비해 민간의 생활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황제의 使者巡視를 나오자, 사람들이 길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이 나와서 사자를 맞이해 왕공의 功德을 칭송하였다. 사자가 이 일을 구체적으로 아뢰니, 황제께서는 즉시 공에게 추가로 金紫官位를 내리셨다.
蘇州刺史로 옮겨가서는 家屋의 형태를 변경하여 불이 번지는 것을 끊고, 松江에 제방을 쌓아 길을 만들어서 길이 막혀 생기는 피해를 없앴다.
가을과 여름에 부세를 징수할 때에는 직접 문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기한을 정해주어, 官吏가 찾아가지 않아도 백성이 스스로 와서 바치게 하니, 政事의 성적이 천하의 刺史 중에 으뜸이었다.
天子께서 말씀하기를 “王某의 문장은 뜻이 깊으면서도 通暢하니 誥文에 가장 적합하고, 古人의 풍모가 있으니 어찌 오래도록 吏事(政事)로써 부려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시고서, 다시 中書舍人에 제수하셨다.
王公京師에 와서 보니, 같은 또래는 하나도 없고, 同列(동료)을 보니 모두 까마득한 소년들이었으므로 더욱 슬퍼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찌 다시 저들 사이에서 문장을 지을 수 있겠는가.
皇上께서 만약 을 버리지 않으신다면 신의 장점을 쓰심이 마땅하다. 신은 外職에 있은 지 오래여서 세속의 利害를 잘 아니, 신으로 하여금 외직을 다스리게 하신다면 응당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상이 이 말을 황상께 아뢰어, 마침내 江南西道觀察使가 되었다. 〈왕공은 관찰사로 부임해서〉 榷酤錢 9천만을 면제할 것을 奏請하였다.
軍錢의 이자놀이가 끝이 없어서, 이를 맡아 관리하던 吏胥가 〈息錢 50만을 잃은 에 걸려〉 家産을 다 내놓았으나 여전히 변상하기에 부족하여 감옥에 갇혀 있었다. 왕공은 부임하자마자 項鎖足鎖를 풀어주고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다.
백성들이 水災旱災를 만나 徵稅가 곤란해지자, 왕공은 말하기를 “내 장차 연회를 줄이고 다른 비용을 없앨 것이니 그러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그 돈(절약한 돈)으로 〈세수의 부족분을〉 대신 채웠다.
息錢을 없애고, 승려가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의 집(佛舍)을 허물어다가 公館의 지붕을 이었다. 〈이렇게 한 지〉 3년 만에 법이 크게 이루어져서 창고에는 돈이 남아돌고 곳간에는 곡식이 남아돌아,
사람들은 田舍에서 풍요를 누리고 길에서 〈왕공의 덕을〉 노래하였다. 천자께서는 다시 왕공을 그리워하시어, 다른 사람을 王公 대신 江西로 보내고 공을 부르시면서 吏部左丞의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셨다.
長慶 3년(823) 11월 17일에 洪州에서 薨逝하시니 향년이 62세셨다. 황상께서 애통해하시어 정무를 정지하시고[輟朝] 左散騎常侍에 추증하셨다. 아무 날에 아무 곳에 歸葬하였다.
아무개가 이미 공의 공덕을 비석에 새겨 무덤에 묻었는데, 아들 王初가 또 를 청하여 공의 명성을 드러내었다. 는 다음과 같다.
사람을 다스림에는
禮樂이 근본인데
말단만을 일삼고
그 근본을 잊는다네
가까운 일에 어둡고 고루하면
가 이로 인해 막힌다네
그렇다고 근본에만 뜻을 두면
진부한 옛것에 빠지기 쉽고
써야 할 때에 우활하면 어그러져 펴지 못하리 이 두 가지 비교해보면 그 과오 서로 같네
아름다운 왕공은
儒學의 근본에 뜻을 두고
선비의 원칙에 통달하여
순서 따라 점진하여 학문을 쌓았고
함축하고 存養하였네
활짝 피어 꽃 아름다웠지만
뽐내지도 자만하지도 않았네
누가 그 향기 퍼뜨렸으며
누가 그 총명 발산하였나
올곧게 살아가니
벗들이 사모하네
황제의 궁중에서 문장을 짓더니
뽑히어 시종의 반열에 들어갔네
충성으로 이름 멀리 퍼져
直諫도 하고 諷諫도 하였네
변론해 막고 굳게 간청하였네
크게 간사한 자 쓰지 말라고
반열에서 빼어나니
황제께서 주목하셨네
황제께서 마음 다함을 살피시어
내리시는 은총 나날이 두터웠네
郞署에선 날개를 폈고
禁密에선 지위가 높이 올랐네
表發한 황제의 명령이
예스럽고 성대하였네
權臣에 빌붙지 않고서
벗의 억울함 풀어주려다가
맞고 흔들리고 꺾이고 뽑히어
끝내는 배척해 내쫓김 당하셨네
오랫동안 외직에 있으면서
藩鎭들 두루 지키셨네
부임한 곳마다 깊이 생각하여
반드시 利害를 자세히 아셨네
시들고 마른 자에겐 단비 같은 은택 입히고
더위에 상한 자에겐 물을 주어 깨워주셨네
평탄하고 드넓게 하여
반드시 지름길 막으셨고
준설해 맑게 해서
편안히 수영하게 하였네
황제께서 공의 문장 생각하시어
다시 知制誥에 임명하시니
공은 은밀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직책은 젊은이에게 합당하니
어찌 곤궁한 郡縣에 등용하여
힘을 다하게 하지 않으시는가
황상께서 실적을 상고하시고
洪州를 다스리게 하셨네
체납된 세금을 없애니
간사한 풍속이 변하였네
눈을 가리는 것들 제거하고
몸에서 짐을 벗어놓으셨네
관할지역에 올바른 방향을 일러주고
佛法을 금지해 막으셨네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벼들이 이랑에 가득하네
사람들 즐겁게 생활하면서
평안에 젖어 노래불렀네
교화 이루어지자 다른 이를 대신 보내신 것은
괴로운 일에서 쉬게 하려는 생각이셨네
左丞의 자리 비워놓고 기다리셨는데
공은 서둘러 먼 길 떠나셨구려
덕행과 공적을
이 돌에 기록하니
세월이 멀어질수록 더욱 높아지리라


역주
역주1 太原王公神道碑銘 : 이 碑銘은 長慶 4년(824)에 지은 것이다. 王公은 王仲舒(762~823)를 가리킨다. 왕중서가 連州司戶로 있을 때에 韓愈는 連州 陽山縣令이었는데, 이때 왕중서를 위해 〈燕喜亭記〉를 지었고, 뒤에 왕중서가 江南西道觀察使가 되었을 때 한유는 袁州刺史였는데, 또 왕중서를 위해 〈修滕王閣記〉를 지었으며, 왕중서가 서거한 뒤에 한유가 이미 그의 墓誌銘을 지었는데, 이번에 또 神道碑를 지었다.
역주2 王氏皆王者之後 : 王氏는 姬姓에서 나왔다. 周 靈王의 太子 晉이 直諫으로 인해 廢位되어 庶人이 되었다. 그의 아들 宗敬이 司徒가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王家’로 불렀다. 이로 인해 ‘王’을 氏로 삼은 것이다.
역주3 歷御史屬三院 : 侍御史‧殿中侍御史‧監察御史를 이른다.
역주4 藹鬱 : 수목이 무성한 모양인데, 여기에서는 名聲이 성대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역주5 折官位輩行 願爲交 : 折은 낮춤이고, 輩行은 상하의 서열이니, 곧 官位나 서열을 낮추고서 서로 벗이 되기를 원하였다는 말이다.
역주6 射策拜左拾遺 : 貞元 10년(794)에 왕중서가 賢良方正直言極諫科에 합격하여 左拾遺에 제수되었다.
역주7 提約明故 : 規約을 제시하고 故事(전례)를 밝힘이다.
역주8 同列有恃恩自得者……由此貶連州司戶 : 貞元 19년(803)에 補闕 張正一이 상소해 國事를 논한 일로 인해 皇上께서 불러 보시는 영예를 얻었다. 王仲舒‧韋成季‧劉伯芻‧裵茝‧常仲孺‧呂洞 등은 일찍이 同官으로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장정일이 불러 보시는 皇恩을 입었기 때문에 함께 가서 축하하였다. 어떤 자가 韋執誼에게 “장정일 등이 상소해 당신[君]이 王叔文과 붕당을 맺은 일을 논하였다.”고 고하니, 위집의는 그 말을 정말로 믿고서 召對할 때에 “韋成季 등이 떼로 모여 분수 밖의 것을 넘봅니다.”고 아뢰었다. 唐 德宗은 金吾로 하여금 伺察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어울려 몇 차례 음식을 먹은 사실을 알아내고는, 이에 위성계 등 6, 7인을 다 축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까닭을 헤아릴 수 없었다.(≪舊唐書≫ 〈韋執誼傳〉)
역주9 放跡 :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것이다.
역주10 友人得罪斥逐後……直其寃 : 京兆尹 楊憑이 中丞 李夷簡의 탄핵을 받아 臨賀縣尉로 貶職되었다. 王仲舒는 楊憑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조정에 선언하기를 ‘夷簡이 주워모아 楊憑의 죄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王仲舒는 이 일에 연좌되어 峽州刺史로 貶職되었다.(≪舊唐書≫ 〈文苑傳〉)
역주11 制使 : 천자가 파견한 使者이다.
역주12 文可思 : 思는 뜻이 깊으면서도 言辭가 通暢함이다[深而通].(≪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
역주13 : 皇帝가 신하에게 내리는 文體의 하나로, 誥戒나 勉勵의 뜻을 담은 글을 이른다.
역주14 (兩)[西] : 저본에는 ‘兩’으로 되어 있으나, ≪五百家注昌黎文集≫에 의거하여 ‘西’로 바로잡았다.
역주15 榷酤錢 : 술을 專賣하는 가게에서 징수하는 酒稅이다.
역주16 軍息 : 利息(이자)을 받기로 하고 軍府의 公錢을 貸出함이다.
역주17 掌吏壞産猶不釋……脫械不問 : ≪新唐書≫ 〈王仲舒傳〉에는 “吏坐失官息錢五十萬 悉産不能償 仲舒焚簿書 脫械不問”이라고 되어 있다.
역주18 浮屠誑誘 : 浮屠는 佛僧이니, 곧 황당한 말로 백성을 유혹함을 이른다.
역주19 徵以代 : 王仲舒의 代任으로 尙書左丞 薛放을 江西로 보내고, 尙書左丞의 자리를 비워놓고서 왕중서를 조정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역주20 斯文 : 禮樂制度를 이른다.
역주21 秩秩而積 : 秩秩은 순서 따라 점진함이고, 積은 쌓음이다.
역주22 涵涵而停 : 드러내지 않고 含蓄하여 存心養性하였다는 말이다.
역주23 介然 : 耿直(강직)함이다.
역주24 翔于郞署 : 郞署는 郞官의 官署이니, 곧 吏部‧考功‧禮部의 員外郞으로 있을 때에 뜻을 폈다는 말이다.
역주25 騫于禁密 : 騫은 飛翔함이고, 禁密은 궁중에 있는 官署를 이르니, 곧 中書舍人이 되어 뜻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역주26 方乎所部 : 一本에는 ‘乎’가 ‘平’으로 되어 있다.
역주27 (石)[日] : 저본에는 ‘石’으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日’로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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