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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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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篇 大略類傳이나 而中多險棘句
하니라 其先有自潁川徙陽夏者하니 其地於今爲陳之太康이라
太康之韓 其稱蓋久 然自公始大著하니라 公諱弘이라 公之父曰海 爲人魁偉沈塞하고
以武勇許汴之間 寡言自可하야 不與人交하니 衆推以爲鉅人長者
官至遊擊將軍하고 贈太師하니라 娶鄕邑劉氏女하야 生公하니 是爲齊國太夫人이라
夫人之兄曰司徒 有功建中貞元之間하야 爲宣武軍帥하야 有汴宋亳潁四州之地 兵士十萬人하다
公少依舅氏하야 讀書習騎射하다 事親孝謹하고 하야 不縱爲子弟華靡遨放事하고 出入敬恭하니 軍中皆目之하다
嘗一扺京師하야 就明經試하고 退曰 此不足發名成業이라하고 復去從舅氏學하다
將兵數百人하고 悉識其材鄙怯勇하야 必堪其事하니 司徒歎奇之하고 士卒屬心하고 諸老將皆自以爲不及이라하다
司徒卒 하다 比六七歲 이라
貞元十五年 하니 軍中皆曰 此軍司徒所樹 必擇其骨肉爲士卒所慕賴者付之
今見在人莫如韓甥이요 且其功最大하고 而材又俊이라하고하고 而請命於天子하니
天子以爲然이라하야 遂自大理評事 拜工部尙書하야 代逸(淮)[准]爲宣武軍節度使하야 悉有其舅司徒之兵與地하니 衆果大悅하다
當此時하야 陳許帥曲環死하니하야 自將圍許하고 求援於逸(淮)[准]하야 啗之以陳歸汴하다
使數輩在館하니 公悉驅出斬之하고 選卒三千人하야 會諸軍擊少誠許下하다 少誠失勢以走하니 河南無事하다
公曰 自吾舅歿 五亂於汴者 吾苗媷而髮櫛之幾盡하다 然不一揃刈 不足令震駴라하고
自是訖公之朝京師廿有一年 莫敢有讙呶叫號于城郭者하다
公使謂曰 汝能越吾界而爲盜邪 有以相待 無爲空言하라 滑帥告急하니
公使謂曰 吾在此하니 公無恐하라 或告曰 翦棘夷道하니 兵且至矣리라 請備之하소서
公曰 兵來 不除道也리라하고 不爲應하다 師古하야 하다
誠以牛皮鞵材遺師古하고 師古以鹽資少誠하야 潛過公界하니하야 皆留輸之庫曰 此於法不得以私相餽라하다
使來告曰 我代與田氏約相保援이나 이요 하니 亦公之所惡
我將與成德合軍討之ㄹ새 敢告하노라 公謂其使曰 我不知利害 知奉詔行事耳
若兵北過河 我卽東兵以取曹하리라 師道懼하야 不敢動하니 弘正以濟하다
誅吳元濟也 命公都統諸軍曰 無自行以遏北寇하라
公請使子公武以兵萬三千人會討蔡下하고 歸財與糧하야 以濟諸軍하고 卒擒하다
於是以公爲侍中하고 而以公武爲鄜坊丹延節度使하다
師道之誅 公以兵東下하야 進圍考城克之하고 遂進迫曹하니 曹寇乞降하다
公曰 吾無事於此하니 其朝京師리라 天子曰 大臣不可以暑行이니 其秋之待하라
公曰 君爲仁하시니 臣爲恭 可矣라하고 遂行하다 旣至 獻馬三千匹絹五十萬匹他錦又三萬金銀器千하다
而汴之庫廐 錢以貫數者尙餘百萬이요 絹亦合百餘萬匹이요 馬七千이요 糧三百萬斛이요 兵械多至不可數
初公有汴 承五亂之後 掠賞之餘 且斂且給하야 恒無宿儲러니 至是公私充塞하야 至於露積不垣이라
司徒兼中書令하다 進見上殿하여 拜跪하시다 하고 不治細微하니 天子敬之하시다
元和十五年 今天子卽位하야 公爲冢宰하고 又除河中節度使하다 在鎭三年 以疾乞歸하니 復拜司徒中書令하다
病不能朝라가 以長慶二年十二月三日 薨于永崇里第하니 年五十八이라
天子爲之罷朝三日하고 贈太尉하고 賜布粟하고 其葬物有司官給之하고 京兆尹監護하다
明年七月某日 葬于萬年縣少陵原하니 京城東南三十里 楚國夫人翟氏祔하다
子男二人이니 長曰肅元 某官이요 次曰公武 某官이라 肅元早死하다
公之將薨 公武暴病先卒하니 公哀傷之라가 月餘遂薨하다 無子하야 以公武子孫紹宗爲主後하니라
이니 二寇患公居間爲己不利하야 卑身佞辭하야 求與公好하고
薦女請昏하야 使日月至 旣不可得則하야
公先事候情하야 壞其하야 姦不得發일새 王誅以成하니라 孰與高下
公子公武 與公一時俱授하야 處藩爲將하니 疆土相望이라
公武以母憂去鎭 公母弟充 自金吾代將渭北이라 公以司徒中書令治蒲
于時弟充自鄭滑節度平宣武之亂하고 以司空居汴하니 自唐以來 莫與爲比
公之爲治 嚴不爲煩하고 止除害本이요 不多敎條하며 與人必信하니 吏得其職이라
賦入無所漏失하야 人安樂之하니 在所以富하다 公與人有하야 不爲戲狎하니 人得一笑語 重於金帛之賜하니라
其罪殺人 不發聲色하고 問法何如하고 不自爲輕重이라 故無敢犯者하니라 其銘曰
在貞元世
汴兵五猘
將得其人하야
衆乃一愒
其人爲誰
韓姓許公이라
磔其梟狼하고
養以雨風하니
桑穀奮張하야
厥壤大豐이라

命正我宇
公爲臣宗하니
處得地所
河流兩壖
盜連爲群하야
雄唱雌和하야
首尾一身이라
公居其間하야
하야
察其嚬呻
與其睨眴이라
左顧失視하고

蔡先鄆鉏하니

槁乾四呼
終莫敢濡

孰陪孰扶


許公預焉하니
何如
悠悠四方
旣廣旣長이라

朝廷之治
許公來朝하니
車馬
相乎將乎
之多
將則是已
하야
釋師十萬하고
歸居廟堂이라

公讓太宰하고
하니
이라
하야
提兵守藩이라
一時하니
人莫敢扳이라
生莫與榮이요
歿莫與令이라
刻文此碑하야
以鴻厥慶이라


08. 太尉에 추증된 許國公神道碑銘
이 편은 대략 과 유사한데, 중간에 난삽한 가 많다.
은 원래 姬姓이었는데, 뒤에 國名로 삼았다. 그 선조 중에 潁川에서 陽夏移住한 분이 있었는데, 그 지역은 지금의 陳州 太康縣이다.
太康韓氏는 사람들이 陳述한 지 오래이나, 으로부터 크게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다. 의 부친은 인데, 사람됨이 키가 훤칠하고 생각이 깊고 성실하였다.
武勇으로 許州汴州 사이에서 遊仕하였는데, 말수가 적고 자부심이 강하여 남과 交爭(논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을 鉅人長者로 떠받들었다.
관직이 遊擊將軍에 이르고 太師에 추증되었다. 같은 鄕里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齊國太夫人이다.
夫人의 오빠는 司徒 劉玄佐인데, 建中貞元 연간에 공을 세워 宣武軍節度使가 되어 汴州宋州亳州潁州 등 네 의 땅과 병사 10만 인을 소유하였다.
공은 소년기에 外叔(劉玄佐)에게 의지해 책읽기와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웠다. 어버이를 섬김이 孝順하고 恭謹하며 몸가짐이 화락하여, 다른 富豪家의 자제들처럼 멋대로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지 않고 들고 날 때에 공경하니 軍中 사람들이 모두 공을 주목하였다.
일찍이 한번 京師로 가서 明經科에 응시한 적이 있는데,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것으로는 이름을 날리고 사업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하고서 다시 떠나서 외숙에게서 배웠다.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서 그 병사 중에 누구는 재능이 있고 누구는 비루하고 누구는 겁이 많고 누구는 용감한지를 다 파악하여 반드시 감당할 만한 자를 지정해 일을 맡기니, 司徒公은 공의 奇才에 탄복하고, 士卒들도 진심으로 복종하고, 老將들도 스스로 공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司徒公(劉玄佐)이 하자, 汴州를 떠나 宋州 南城將領이 되었다. 6, 7년 동안 계속 汴州 군대에 내란이 그치지 않았다.
貞元 15년(799)에 劉逸准이 죽자, 軍中이 모두 말하기를 “이 군대는 사도공께서 세운 군대이니, 반드시 사도공의 骨肉(親族) 중에 사졸들의 仰慕信賴를 받는 분을 골라 맡겨야 한다.
지금 현재 생존한 분 중에 韓甥(甥姪 韓弘)만 한 이가 없다. 또 그 공로가 가장 크고 재능도 뛰어나다.”라고 하고는, 즉시 軍權을 공에게 내어주고서 천자께 韓公을 임명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천자께서도 옳게 여기시고서 드디어 大理評事에서 工部尙書에 제수하시어, 劉逸准을 대신해 宣武軍節度使가 되어 그 外叔 사도공이 소유했던 군대와 땅을 모두 갖게 하시니, 軍衆이 과연 크게 기뻐하며 복종[便]하였다.
이때를 당해 陳許節度使 曲環이 죽으니 吳少誠이 반란을 일으켜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許州를 포위하고, 劉逸准에게 援軍을 요청하면서 許州를 함락하면 陳州汴州에 주겠다고 꾀었다.
吳少誠이 보낸 使者 몇 사람이 汴州客館에 머물러 있었는데, 한공이 그들을 모두 끌어내어 斬首하고, 군졸 3천 명을 선발해 諸軍과 회합해 許州 아래에서 吳少誠을 공격하였다. 오소성이 戰勢가 불리하여 도주하니 河南이 무사하였다.
한공이 말하기를 “나의 外叔이 사망하신 뒤부터 汴州에서 다섯 차례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내 곡식 이랑에 잡초를 뽑아내듯, 두발 사이에 낀 때를 빗어내듯 거의 제거하였다. 그러나 하나라도 제거하지 못한다면 저들을 두렵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劉鍔에게 명하여 그 군졸 300명을 거느리고 軍門 앞에서 명을 기다리게 하고서, 누차 반란에 참여한 것을 스스로의 공으로 여긴 죄를 열거해 꾸짖고는 모두 斬首하여 梟首하니, 피가 흘러 길에 흥건하였다.
이로부터 한공이 京師로 돌아갈 때까지 21년 동안 감히 城郭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고함을 치는 자가 없었다.
李師古流言을 날조해 사단을 일으키려고 曹州에 군대를 주둔시켜 滑州節度使 李元素를 협박하고, 또 〈한공에게 사자를 보내어〉 길을 빌려달라고 고하니,
한공이 사자를 보내어 李師古에게 이르기를 “네가 나의 경계를 넘어와 약탈할 수 있느냐? 나는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빈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滑州節度使가 한공에게 위급함을 통고하니,
공이 사자를 보내어 활주절도사에게 이르기를 “내가 여기에 있으니 공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어떤 자가 고하기를 “가시나무 덩굴을 베어내고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으니, 이사고의 군대가 곧 올 것입니다. 대비하소서.”라고 하자,
한공은 “군대가 오려 했다면 길을 닦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대응하지 않았다. 이사고는 속임수와 應辯策이 바닥나자, 退却해 돌아갔다.
吳少誠은 소가죽 신을 만드는 재료를 이사고에게 보내고, 이사고는 食鹽을 보내어 오소성을 도우면서 〈이 물건들을 싣고〉 몰래 한공의 경계를 지나간 일이 있었는데, 발각되자 모두 押留해 창고로 실어 들이면서 말하기를 “에 의하면 이런 물건은 사사로이 서로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田弘正이 처음 魏博節度使가 되었을 때에 李師道使者를 보내어 韓公에게 고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田氏와 서로 보호하고 지원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지금 弘正은 전씨의 宗族이 아니고, 또 앞장서서 兩河의 일을 변경하였으니, 한공께서도 미워하실 것입니다.
내 장차 成德軍節度使 王承宗과 군대를 연합해 전홍정을 토벌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통고합니다.”라고 하였다. 한공이 그 사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利害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고, 오직 詔書를 받들어 행사하는 것만을 알 뿐이다.
만약 너희 군대가 북쪽에서 황하를 건넌다면 나는 즉시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어 曹州를 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사도가 두려워서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않으니, 전홍정이 이로 인해 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吳元濟討誅할 적에 황제께서 한공에게 명하여 각 도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직접 가서 北寇를 막지 말라.”고 하셨다.
한공은 아들 韓公武를 보내어 군대 1만 3천 인을 거느리고 가서 다른 군대와 회합하여 蔡州를 토벌하게 하기를 청하고서 재물과 식량을 운송하여 각 도의 군대에게 공급하고, 마침내 蔡州姦賊(吳元濟)을 생포하였다.
이에 한공을 侍中으로 삼고 韓公武鄜州坊州丹州延州節度使로 삼았다.
李師道討誅할 적에 韓公이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가서 考城을 포위해 승리하고서 드디어 進軍하여 曹州를 압박하니 曹州이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鄆部가 평정된 뒤에 韓公은 “내 여기에서 할 일이 없으니 京師로 가서 천자를 朝見해야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天子께서 “大臣은 무더위에 길을 가서는 안 되니 가을을 기다리라.”고 하시니,
한공은 “황제께서 인자하시니 신하가 공경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서, 드디어 길을 떠났다. 도성에 도착한 뒤에 말 3천 필, 비단 50만 필, 이밖에 또 등이 또 3만 필, 金銀器 천 개를 바쳤다.
그런데도 汴州의 창고와 마구간에 아직도 남아 있는 돈이 백만 이고, 비단도 도합 백여만 필이고, 말이 7천 필이고, 糧穀이 3백만 이고, 兵器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한공이 처음 변주절도사가 되었을 때는 다섯 차례의 변란을 겪은 뒤이고 약탈과 施賞으로 〈재정이 고갈된〉 끝이라서 한편으로는 징수하고 한편으로는 공급하다 보니 항상 남은 저축이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는 公私의 재물이 충족하여, 심지어 담도 치지 않고 한데 쌓아두기까지 하였다.
공을 司徒 兼中書令冊拜하셨다. 한공이 조정에 나아가 황상을 알현하려고 大殿으로 올라가 절하고 꿇어앉을 때에 부축할 사람을 붙여주셨다. 황상을 보좌해 국가의 大事만을 다스리고 미세한 일은 다스리지 않으니 천자께서 공을 공경하셨다.
元和 15년(820)에 지금 천자께서 즉위하시어 공을 冢宰로 삼고, 또 河中節度使에 제수하셨다. 鎭守한 지 3년 만에 질병으로 鄕里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다시 司徒 中書令에 제수하셨다.
병으로 인해 朝會에 나가지 못하다가, 長慶 2년(822) 12월 3일에 永崇里 집에서 薨逝하였으니 향년이 58세셨다.
天子께서 공을 위해 3일 동안 政務를 정지하고 공을 太尉에 추증하고, 布帛粟米를 하사하고, 그 밖에 장사에 필요한 물건들은 담당 관원이 公費로 지급하고, 京兆尹葬事監護하였다.
이듬해 7월 아무 날에 萬年縣 少陵原에 장사 지냈으니, 京城에서 동남으로 30리 거리이다. 楚國夫人 翟氏合祔하였다.
아들이 둘인데, 장자 肅元은 아무 관직을 지냈고, 차자 公武는 아무 관직을 지냈다. 肅元은 일찍 죽었다.
韓公이 죽으려 할 때에 公武急病으로 먼저 죽으니, 공이 슬픔으로 상심하다가 한 달여 만에 薨逝하였다. 아들이 없어 公武의 아들인 손자 紹宗後事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정하였다.
汴州의 남쪽은 蔡州이고 북쪽은 鄆州이니, 두 寇賊(채주의 吳元濟와 운주의 李師道)은 공이 중간에 있는 것이 저희들에게 불리할 것을 근심하여, 몸을 낮추고 듣기 좋은 말로 공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요구하고,
딸을 바쳐 혼인하기를 청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사자를 보내왔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헛소문을 퍼뜨려 한공을 비방하여 우리를 이간하고 중상하였다.
공이 사전에 먼저 저들의 정황을 정탐[]해 要害處를 파괴하여 저들이 간계를 부리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王師(王軍)가 誅伐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을 계산해 차례를 정한다면 누가 한공과 고하를 다툴 수 있겠는가?
의 아들 公武는 공과 동시에 弓矢斧鉞을 받아 藩鎭에 있으면서 장군이 되니, 管轄疆土가 서로 바라보였다.
公武母喪을 당해 번진을 떠나니, 공의 同母弟 金吾衛大將軍 韓充渭北節度使代理하였다. 韓公司徒 中書令으로 蒲州를 다스렸는데,
이때 同母弟 韓充鄭滑節度使宣武軍의 반란을 평정하고서 司空이 되어 汴州에 있었으니, 나라가 開國한 이래로 이들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정무를 治理함에 엄격하면서도 번잡하지 않았으며, 해악의 뿌리만을 제거하고 敎條를 많이 설치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반드시 誠信으로 대하니 임용한 관리들이 모두 職務에 적합하였다.
거두어들인 賦稅가 새어나가거나 손실됨이 없어 사람들이 편안히 생활하며 生業을 즐기니, 공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부유하였다. 공은 남과 상대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 희롱을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공과 우스갯소리라도 한마디 할 수 있으면 황금이나 비단을 하사받은 것보다 더 중하게 여겼다.
공은 罪人를 심리해 죽일 때에도 얼굴을 붉히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았고, 법률에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만을 묻고, 자의로 법을 가볍거나 무겁게 적용시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감히 법을 범하는 자가 없었다. 은 다음과 같다.
貞元 연간에
汴州에 다섯 번 병란 발생했건만
훌륭하신 장군을 만나서
대중이 휴식하게 되었네
그분이 누구신가
韓氏 성의 許國公이시지
올빼미 이리들 찢어 죽이고
비바람으로 길러주니
뽕나무랑 곡식들 힘차게 자라서
그곳에 크게 풍년 들었네
貞元皇帝元孫께서
우리나라 바루라고 명하실 때에
공이 신하들의 首席되시니
적합한 곳 얻어 머무르셨네
黃河兩岸
도적이 무리를 이루어
수컷이 부르면 암컷이 화답하듯
서로 호응하여 한 몸이 되었어라
한공이 그 사이에 계시면서
황제 위해 저들의 奸情 감시하여
저들이 괴로워하는 것과
저들이 엿보는 것을 정찰하였네
공이 왼쪽 바라보면 저들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공이 오른쪽을 바라보면 저들은 꿇어앉았네
蔡州鄆州보다 먼저 주벌하니
3년 만에 모두 폐허가 되었네
곤궁하여 사방에 소리쳐보았지만
끝내 누구도 구제해주지 않았네
常山이건 幽州
누가 同伴하고 누가 도왔는가
하늘이 주신 땅은 지체시킬 수 없고
하늘의 정벌은 피할 곳 없으리
허국공이 이 일에 참여했으니
어떤 상을 주어야 하나
아득한 사방이
넓고도 긴데
전쟁이 없는 것은
조정이 다스려서이지
허국공이 조정으로 들어오시니
車馬士卒들 거느리셨네
재상이신가 장군이신가
호종하는 의장 많기도 하네
본래 장군이셨지만
三公에 올라 재상되시어
10만의 군대를 버리고
조정으로 돌아오셨네
황상께서 居喪하실 때
한공은 太宰 자리 사양하고서
蒲坂에서 편안히 휴양하시니
만방에 동등한 대우 받는 자 絶無하네
훌륭한 아우 있고 아들 있어
군대 거느리고 藩鎭 지키었네
동시에 한 집에서 세 節度使 나왔으니
누구도 감히 기어오르지 못하였네
생시엔 공보다 영예로운 자 없었고
사후에도 공보다 아름다운 이 없네
이 비석에 글을 새겨서
그 경사 크게 드날리노라


역주
역주1 贈太尉許國公神道碑銘 : 許國公은 元和 연간의 名臣 韓弘(765~822)이다. 淮西를 討平할 때에 節度使로서 諸軍을 總領하였고, 아들 韓公武를 파견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參戰하게 하였다. 淮西를 平定하는 데 父子가 함께 戰功을 세워 명성이 멀리까지 전파되었다.
역주2 韓姬姓 以國氏 : 韓은 周 武王의 아들 唐叔虞에게서 나왔으니, 원래는 姬姓이다. 曲沃 桓叔의 아들 萬이 대대로 晉나라의 卿이 되었다. 뒤에 晉나라를 나누어 韓나라가 되었다. 秦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國名을 氏로 삼았다.
역주3 遊仕 : 外地로 가서 벼슬함이다.
역주4 玄佐 : 729~792. 본명은 洽인데, 貞元 연간에 李希烈을 擊退한 공으로 ‘玄佐’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涇原四鎭北庭兵馬副元帥 檢校司徒에 제수되었다.
역주5 偘偘自將 : 偘偘은 和樂한 모양이고, 自將은 스스로의 몸가짐이니, 곧 항상 화락한 모습을 가졌다는 말이다.
역주6 指付 : 사람을 지정해 일을 맡김이다.
역주7 去爲宋南城將 : 劉玄佐가 죽고, 그 아들 劉士寧이 축출되니, 韓弘도 汴州를 떠나 宋州 南城의 將領이 되었다.
역주8 汴軍連亂不定 : 汴州 군대에 여러 해 동안 계속해 內亂이 그치지 않은 것이다. 韓愈의 〈贈太傅董公行狀〉에 “汴州는 大曆(唐 代宗 1년부터 14년까지) 이래로 兵事(전쟁)가 많았으므로 劉玄佐는 군대의 수를 10만까지 늘렸다. 劉玄佐가 죽자 그 아들 士寧이 뒤를 이어 節度使가 되었는데, 사냥하며 노는 데에 빠져 절제가 없으니, 그의 部將 李萬榮이 그가 사냥 나간 기회를 이용해 그를 축출하고서 〈제가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李萬榮이 節度使가 된 지 1년 만에 그의 部將 韓惟淸과 張彦林이 반란을 일으켜 이만영을 죽이려 하였으나, 전쟁에 승리하지 못하였다. 3년이 되던 해에 이만영이 중풍으로 정신을 잃어 의식이 없자, 그의 아들 李迺가 다시 劉士寧이 했던 것처럼 절도사가 되고자 하니, 監軍使 俱文珍이 그의 부장 鄧惟恭과 함께 그를 잡아 京師로 보냈다. 李萬榮이 죽었다.[汴州自大曆來多兵事 劉玄佐益其師至十萬 玄佐死 子士寧代之 畋遊無度 其將李萬榮乘其畋也逐之 萬榮爲節度一年 其將韓惟淸 張彦林作亂 求殺萬榮 不克 三年 萬榮病風 昏不知事 其子迺復欲爲士寧之故 監軍使俱文珍與其將鄧惟恭執之歸京師 而萬榮死]”고 하였다.
역주9 劉逸(淮)[准] : ≪舊唐書≫ 〈德宗本紀〉에 “貞元 15년(799) 2월에 宋州刺史 劉逸准을 宣武軍節度使로 삼고 全諒이란 이름을 下賜하였다.”라고 하였다. 그해 9월에 劉全諒이 죽었으니, 節度使가 된 지 8개월 만이다. 劉逸准의 ‘准(준)’은 저본에 ‘淮(회)’로 되어 있으나, ≪舊唐書≫ 〈劉全諒列傳〉에 의거하여 ‘准’으로 바로잡았다. 이하 모두 이와 같다. ‘准’은 ‘準’의 俗字이다.
역주10 柄授 : 權柄을 줌이다.
역주11 便之 : 便에는 順從 또는 順服의 뜻이 있다.
역주12 吳少誠反 : 吳少誠이 蔡州節度使로서 陳許節度使 曲環이 죽자,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許州를 공격한 것을 이른다.
역주13 命劉鍔以其卒三百人待命于門……幷斬之以徇 : 劉鍔은 宣武軍節度使府의 部將이다. ≪新唐書≫ 〈韓弘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汴州는 劉士寧 이후로 군대가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고, 陸長源이 살해됨에 미쳐서는 자못 主帥(節度使)를 輕視하였다. 그 亂魁와 亂黨이 수십백 인이었으나, 한홍은 절도사로서 직무를 살핀 지 몇 달 만에 〈部將과 군졸들의〉 사람됨을 모두 알았다. 部將 劉鍔이란 자는 흉악한 군졸들의 우두머리였다. 한홍은 크게 위엄을 떨치고자 하여, 하루는 短兵을 가진 군사들을 이끌고 衙門으로 들어가서, 劉鍔과 그 徒黨 300인을 불러 그 罪를 열거해 꾸짖은 뒤에 모두 斬首하여 梟示하였다.[汴州自劉士寧之後 軍益驕恣 及陸長源遇害 頗輕主帥 其爲亂魁黨數十百人 弘視事數月 皆知其人 有部將劉鍔者 凶卒之魁也 弘欲大振威望 一日 引短兵于衙門 召鍔與其黨三百 數其罪 盡斬之以徇]”
역주14 李師古作言起事 : 李師古가 流言을 날조하여 事端을 일으킨 것이다. 李師古는 淄靑節度使 李納의 아들이다. 貞元 8년(792)에 李納이 죽자, 軍中에서 李師古를 淄靑節度使로 세워줄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그 청에 따라 李師古를 淄靑節度使에 제수하였다. ≪舊唐書≫ 〈李師古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貞元 21년(805)에 德宗이 崩御하였다. 遺詔를 내렸으나, 告哀使가 아직 당도하기 전에 李師古의 이웃 道인 義成軍節度使 李元素가 遺詔를 베껴서 李師古에게 通報하여 가까움(친함)을 표시하였다. 그러자 李師古가 드디어 將士들을 모아놓고는 李元素의 使者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근자에 邸吏의 書狀을 받고 성상께서 萬福하심을 알았는데, 李元素가 갑자기 遺詔를 위조하여 기록해 보냈으니, 이는 어찌 배반하고자 해서가 아니겠는가? 나는 3대 동안 國恩을 입었고 지위가 將相을 겸하였으니, 역적을 보고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서, 드디어 李元素의 使者에게 매질을 하고서, 李元素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급히 出兵하여, 國喪을 틈타 州縣을 侵攻하기를 冀圖하였다.[貞元二十一年德宗崩 下遺詔 告哀使未至 義成軍節度使李元素與師古隣道 錄遺詔報師古 以示無外 師古遂集將士 引元素使者謂曰 師古近得邸吏狀 具聖躬萬福 李元素豈欲反 乃忽僞錄遺詔以寄 師古三代受國恩 位兼將相 見賊不可以不討 遂杖元素使者 遽出兵以討元素爲名 冀因國喪以侵州縣]”
역주15 屯兵于曹 以嚇滑帥 : ≪新唐書≫ 〈韓弘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李師古가 曹州에 주둔하여 鄭州와 滑州를 도모하니, 或者가 ‘李師古가 길을 냈으니, 그 군대가 곧 이를 것입니다. 대비하소서.’라고 고하니, 韓弘이 ‘군대가 오려 했다면 길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師古는 정황을 파악하고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李師古屯曹州 以謀鄭滑 或告師古治道矣 兵且至 請備之 弘曰 師來不除道也 師古得情 乃引去]”
역주16 詐窮變索 : 속임수가 바닥나고 臨機應變의 방책이 다한 것이다. 索은 盡과 같다.
역주17 遷延旋軍 : 遷延은 退却함이다.
역주18 (氓)[少] : 저본에는 ‘氓’으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少’로 바로잡았다.
역주19 田弘正之開魏博 : 앞의 〈魏博節度觀察使沂國公先廟碑銘〉 참조.
역주20 李師道 : 李師古의 배다른 동생이다. 李師道는 密州知事였다. 李師古가 죽자, 그 奴僕이 喪을 발표하지 않고, 은밀히 密州로 사자를 보내어 李師道를 맞이해 오게 하여 그를 절도사로 세웠다. 그때 憲宗은 蜀川(四川)이 한창 요란하였으므로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지 못하였다. 元和 원년(806) 7월에 李師道를 淄靑節度留後에 제수하였다.(≪舊唐書≫ 〈李師道傳〉)
역주21 今弘正非其族 : 弘正은 田氏의 종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田悅이 날조한 말이다. ≪舊唐書≫ 〈田承嗣傳〉에 의하면 田弘正과 田悅은 모두 田承嗣의 조카인데, 두 사람은 단지 가는 길이 달랐을 뿐이다.
역주22 又首變兩河事 : 田弘正이 兩河의 군대 숫자와 여섯 州의 인민을 기록하여 朝廷에 귀속시키고, 河北에 세습하던 관례를 다 없애고 다른 州처럼 조정의 임명을 받게 한 일을 이른다. 앞의 〈魏博節度觀察使沂國公先廟碑銘〉 참조.
역주23 蔡姦 : 蔡州의 姦臣 吳元濟를 이른다.
역주24 鄆部旣平 : 鄆部는 平盧節度使의 治所이니, 곧 李師道를 討平한 것을 이른다.
역주25 紈綺纈(힐) : 紈은 흰 비단이고, 綺는 花紋이 있는 비단이고, 纈은 무늬가 있는 판을 이용해 염색한 絹織物이다.
역주26 冊拜 : 冊書를 내려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책서는 황제가 신하에게 命을 내릴 때 쓰는 글이다.
역주27 給扶 : 大臣에게 부축할 사람을 붙여주는 것이다. 古代에 君主가 大臣에게 내려주는 일종의 禮遇이다.
역주28 贊元經體 : 머리를 돕고 몸을 경영한다는 말로, 元首(임금)를 輔佐하고 國家를 다스림이다.
역주29 汴之南則蔡 : 蔡는 吳元濟가 점거해 背叛한 蔡州를 이른다.
역주30 北則鄆 : 鄆은 李師道가 점거해 吳元濟와 결탁하여 謀反한 鄆州를 이른다.
역주31 飛謀釣謗 :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퍼뜨려 비방을 끌어냄이다.
역주32 間染 : 離間하고 中傷함이다.
역주33 機牙 : 여기서는 要害處로 쓰였다.
역주34 最功定次 : 最에는 總計 또는 合計의 뜻이 있으니, 곧 功을 계산해 차례를 정한다는 말이다.
역주35 弓鉞 : 弓矢와 斧鉞인데, 帝王이 준 征伐權과 殺戮權을 상징한다. ≪禮記≫ 〈王制〉에 “諸侯는 〈天子가〉 弓矢를 하사한 뒤에야 정벌할 수 있고, 斧鉞을 하사한 뒤에야 誅殺할 수 있다.[諸侯賜弓矢然後征 賜斧鉞然後殺]”는 말이 보인다.
역주36 畛域 : 規矩(법도)와 같다.
역주37 貞元元孫 : 貞元皇帝. 唐 德宗의 長孫인 憲宗을 가리킨다.
역주38 爲帝督姦 : 황제를 위해 吳元濟‧李師道 등의 간사한 情狀을 감시하였다는 말이다.
역주39 左顧失視 右顧而跽 : 蔡州와 鄆州는 韓弘이 鎭守하는 汴州의 좌우에 있다. 韓弘이 왼쪽의 蔡州를 정벌하자 吳元濟는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달아났고, 오른쪽의 鄆州를 정벌하자 李師道는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역주40 三年而墟 : 3년 만에 蔡州와 鄆州가 모두 폐허가 되었다는 말이다.
역주41 常山幽都 : 常山은 河北의 重鎭인데, 여기서는 承德節度使 王承宗을 가리킨다. 幽都는 幽州인데, 여기서는 幽州節度使 劉總을 가리킨다.
역주42 天施不留 : 天施는 田弘正이 朝廷에 歸屬시킨 魏州와 博州 등 6州를 이르고, 不留는 각 藩鎭의 州縣을 조정으로 귀속시키는 일을 지체할 수 없다는 말인 듯하다.
역주43 其討不逋 : 王師의 정벌을 吳元濟와 李師道가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역주44 : 賞을 줌이다.
역주45 無有外事 : 蔡州와 鄆州가 이미 평정되었기 때문에 다시 군대를 쓸 外方이 없다는 말이다.
역주46 干戈 : 士卒을 뜻한다.
역주47 威儀 : 호종하는 儀仗을 이른다.
역주48 相則三公 : 三公은 太尉‧司徒‧司空을 이른다. 韓弘은 이미 司徒에 冊拜되었다.
역주49 上之宅憂 : 천자의 居喪이다. 上은 唐 穆宗을 가리킨다. 宅憂는 부모의 喪中에 있음이다.
역주50 養安蒲坂 : 蒲坂은 唐나라 蒲州의 땅인데, 지금의 山西省 永濟縣이다. 元和 15년(820)에 韓弘이 河中節度使가 되어 편안히 휴양하였다는 말이다.
역주51 萬邦絶等 : 각 藩鎭의 신하들 중에 韓弘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역주52 有弟有子 : 韓弘의 아우는 韓充이고 아들은 韓公武이다.
역주53 三侯 : 韓弘은 司徒로 蒲坂을 鎭守하고, 아우 韓充은 司空으로 汴州를 진수하고, 아들 韓公武는 鄜坊節度使가 된 것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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