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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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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通篇述書
少府監胡公者 諱珦이요 字潤博이라 年七十九以官卒하고
明年八月十四日 葬京兆奉先하다 夫人天水趙氏祔焉하다
其子逞迺巡遇述遷造 與公壻廣文博士吳郡張籍 以公之族出行治歷官壽年爲書하야
使人京師南走八千里至閩南兩越之界上하야 請爲公銘하야 刻之墓碑於潮州刺史韓愈曰
胡姓本出安定하고 後徙淸河하니 於今爲宗城으로 屬貝州
大父諱秀 武后時 以文材徵爲하니라
父宰臣 用進士卒官平陽冀氏令하니 贈潭州大都督하다
公早孤하야 能自勸學하고 立節槪하야 非其身力이면 不以衣食하다
凡一試進士하고 二卽吏部選하야 皆以文章占上第하다
樂爲儉勤하야하고 하야 以矯時弊하다 及爲富平尉 一府稱其斷決하다
建中四年 侍郞趙贊爲度支使하야 薦公爲監察御史하야 主餽給渭橋以東軍하니 洗手奉職하야 不以一錢假人하다
賊平 有司考覈群吏하야 多坐貶死로되 獨公以淸苦能檢飭하야 無漏失 遷河南倉曹하다
魏公賈躭以節鎭鄭滑 以公佐觀察事하고 檢校尙書工部員外郞이나 以剛直齟齬不阿 忤權貴하야 除獻陵令하다
居陵下七年 市置田宅하고 務種樹爲業以自給하며 敎授子弟하다
貞元十一年 吏部大選 以公考選人藝學이러니 以勞遷奉先令하다遷尙書膳部郞中이라가 改坊州刺史하다
州經亂으로 無孔子廟하다 公至則命築宮造祭器하고
率博士生講讀以時하며 如法以祠하니 人吏聚觀歎息하다 遷舒州刺史하다
州歲大熟하야 麥一莖數穗 閭里歌舞之하다 以聞하니 遷尙書駕部郞中하다
數以事犯尙書李巽하니라 巽時主鹽鐵事하야 富驕恃勢하야 以語丞相하니 由是退公爲鳳翔少尹하니라
巽死 遷少大理라가 改少詹事하다 元和十二年 朝廷以公年老 能自祗力하고 事職不懈하니
可嘉라하야 拜少府監兼知內中尙하다 明年以病卒하다
公始以進士孤身旅長安이러니 致官九卿爲大家하다 七子皆有學守하고 女嫁名人하다
年幾八十이로되 堅悍不衰하야 事可傳載하니 可謂成德이라 銘曰
朅朅胡公이여
旣果以方이라
挾藝射科
每發如望이라
人求於人이나
我己爲之
自始訖終
不降色辭하다
因官立事하고
隨有可載
發跡餽軍이나
遭讒府介하야
去居陵下하야
爲吏爲隱이라
坊舒之政
于玆有靳이라
守官駕部하니
名昇已屈이라
躋于少府하야
甚宜秩物이어늘
不配其有
君子恥之
少府古卿이니
公優止之로다
刻文碑石하야
以顯公行하니
維公後人
無怠嗣慶하라


09. 唐故 中散大夫 少府監 胡良公墓神道碑
전편이 敍述文이다.
少府監 胡公이고 潤博이다. 79세에 官職을 띤 체 하였고,
다음해 8월 14일에 京兆 奉先縣에 장사 지냈다. 夫人 天水 趙氏合祔하였다.
胡公의 아들 와 사위 廣文館博士 吳郡 張籍氏族이 나온 곳, 언행과 치적, 역임한 관직, 生卒年月을 기록해,
京師에서 남쪽으로 8천 리를 달려 閩南兩越의 경계에 있는 〈潮州로〉 사람을 보내어 潮州刺史인 나 韓愈에게 공을 위해 을 지어 墓碑에 새기게 해주기를 청하면서 말하였다.
胡姓은 본래 安定에서 나왔고, 뒤에 淸河로 옮겼는데, 지금의 宗城縣으로 貝州에 속해 있다.
祖父 則天武后 때에 文材로 부름을 받고 나아가 麟臺正字가 되었다.
부친 宰臣進士平陽 冀氏縣令으로 있다가 하니, 潭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
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스스로 부지런히 學習하여 절개를 세우고서 자기 힘으로 마련한 衣食이 아니면 입지도 먹지도 않았다.
무릇 進士試에 한 번 참가하고, 吏部 銓選에 두 번 참가하였는데, 모두 文章으로 상등을 차지하였다.
공은 근면함과 검소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절약[刻削]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아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았다. 富平縣尉가 됨에 미쳐서는 온 府中이 공의 결단을 칭찬하였다.
建中 4년(783)에 侍郞 趙贊度支使가 되어 을 추천해 監察御史로 삼아, 渭橋 이동의 군대에게 軍糧을 공급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니, 공은 청렴하게 직무를 봉행하여 한 푼의 돈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다.
叛賊이 평정된 뒤에 主管部署監査官[有司]이 각 부문의 담당관을 감사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죄에 걸려 貶職되거나 死刑되었으나, 유독 공만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몸을 단속하여 과오가 없었으므로 河南倉曹로 승진하였다.
魏國公 賈躭鄭滑觀察使가 되었을 때에 胡公에게 관찰사의 事務를 보좌하게 하고 檢校尙書工部員外郞으로 삼았으나, 공은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음으로 인해 權貴의 비위를 거슬러 獻陵令으로 좌천되었다.
獻陵 아래에 거주하는 7년 동안 田地家屋을 구입해 나무 심는 일을 으로 삼아 자급자족하고, 자제(後生)들을 가르쳤다.
貞元 11년(795)에 吏部에서 인재를 대대적으로 선발할 때에 호공에게 사람들을 藝學(經學)으로 考査해 선발하는 일을 맡겼는데, 그 공로로 奉先縣令으로 승진하였다. 공무를 처리함이 합당함으로 인해 尙書膳部郞中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坊州刺史에 제수되었다.
坊州는 난리를 겪은 뒤로 孔子廟가 없었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工人에게 명하여 廟宇를 건축하고 祭器를 만들게 하고서,
博士生徒들을 거느리고서 정한 시간에 講讀하고 법도에 맞게 제사를 지내니, 백성과 관리들이 모여 이 광경을 보고서 감탄하였다. 舒州刺史로 승진하였다.
舒州에 크게 풍년이 들어 보리 한 줄기에 이삭이 여러 개 달리니 마을 사람들이 노래하며 춤췄다. 吏部官吏들의 政績考覈해 조정에 보고하니, 공을 尙書駕部郞中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공은 어떤 일로 인해 여러 차례 尙書 李巽觸犯(불쾌하게 함)하였다. 李巽은 이때 鹽鐵의 사무를 주관하고 있었으므로 재산이 부유하여 교만하였는데 권세를 믿고서 승상에게 〈호공의 결점을〉 말하니, 승상이 이로 말미암아 호공을 降等[退]시켜 鳳翔少尹으로 삼았다.
이선이 죽은 뒤에 少大理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少詹事에 제수되었다. 元和 12년(817)에 朝廷은 공이 年老하였는데도 스스로의 직무에 盡力하고 직무에 게을리하지 않으니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고 하여 少府監 兼知內中尙에 제수하였다. 이듬해에 병으로 하였다.
공은 처음에 進士로서 홀로 長安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셨는데, 관직이 九卿에 올라 大家가 되셨다. 일곱 아들은 모두 學問操守가 있고, 딸은 명망 있는 사람에게 출가하였다.
나이가 80에 가까웠으되 壯健함이 쇠하지 않아, 사적을 기재해 전할 만하니, 성대한 이라 이를 만하다. 은 다음과 같다.
용감하고 씩씩하신 胡公이시여
과감하고 방정하셨네
藝學을 가지고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바람대로 되시었네
사람들은 남에게 구하지만
공은 자력으로 이르셨네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빛과 말씨 낮추지 않으셨네
관직에 따라 업적 세우셨고
가는 곳마다 기재할 만한 공 있으셨네
군량 수송하는 일로 공을 세웠으나
魏公府介로 있을 때 참소 만나서
獻陵 아래로 가서 살면서
관리 노릇도 하고 은사 노릇도 하였네
坊州舒州에서의 정치는
이런 곳에 계셨던 일 애석하네
駕部郞中으로 승진하시니
명색은 승진이지만 사실은 좌천이었네
少府監으로 오르시어
품계와 녹봉이 적의했는데
재능이 관직에 맞지 않는 것을
군자는 이를 치욕으로 여기지요
少府는 옛날에 九卿 중의 하나인데
호공은 이 관직을 여유 있게 수행하셨네
이 글을 비석에 새겨
공의 행적 드러내니
공의 후손들은
태만하지 말고 慶福을 이으라


역주
역주1 唐故中散大夫少府監胡良公墓神道碑 : 이 碑文은 元和 14년(819)에 지은 것이다. 唐나라의 少府監은 百工技藝의 일을 맡는다. 소부감 1人을 두는데, 그 품계는 從3品이다. 胡良公은 胡珦으로 良公은 시호이다. 張籍의 妻父이다.
역주2 (皆)[自] : 저본에는 ‘皆’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自’로 바로잡았다.
역주3 麟臺正字 : 祕書監의 正9品 官員이다.
역주4 刻削 : 節儉이다.
역주5 不干人 : 남에게 요구하지 않음이다.
역주6 治辦 : 일처리가 합당함이다.
역주7 考功 : 官吏들의 성적을 관리하는 吏部의 部署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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