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尙書比部員外郞陳君
을 卜以至和二年正月某日
로 葬于
이라
其素所知祕書丞李詡與其孤安期謀하야 將乞銘於廬陵歐陽脩할새 安期曰 吾不敢이라하니 詡曰 我能得之라하야
乃相與具書
하야 遣君之客賈繹
하야 自長安
으로 走京師以請
이라
蓋君以至和元年五月某日로 卒于長安하니 享年四十有六이라 其仕未達而所爲未有大見于時也라
然詡는 節義可信之士니 以詡能報君하고 而君能知詡하니 則君之爲人을 可知也已로다
君諱漢卿
이요 字師黯
이니 世居
이라 其先
人
이러니 이라
其曾叔祖省華가 官至諫議大夫하고 生堯叟堯佐堯咨하니 先後爲將相이요 而君自曾祖而下로 三世不顯이라
曾祖諱省恭
은 不仕
하고 祖諱堯封
은 擧進士
하야 爲
主簿
러니 에 詣闕上書
하야 獻破賊策
한대 不報
라
遂退老于嵩山
이러라 父諱淵
은 亦擧進士
하야 官至大理寺丞
하고 로 皆以文學知名
이라
君生一歲而孤하고 年十三에 與其母入蜀할새 過鳳翔에 謁其府尹한대 而吏少君하야 不爲之通이어늘
君直入하야 伏庭下曰 陳某請見이라하고 因責尹慢士하고 戒吏不謹하니 尹慙하야 笞吏以謝君이러라
君用叔祖
하야 廕補將作監主簿
하고 累遷大理寺丞
權知
이라
君爲往視其田하고 辨其券書하야 而以田與弟하니 其兄謝曰 我悔欲歸弟以田者數矣로되 直懼笞而不敢耳라하고
弟曰 我田故多나 然恥以不直訟이라 兄今我直矣니 願以田與兄이라하야
兄弟相持慟哭하고 拜而去라 由是로 縣民有事에 多相持詣君하야 得一言以決曲直이라
又知
이러니 縣有惡盜十人
이 已謀
요 未發
이어늘 而尉方以事出
한대 君募少年
하고 選
하야 夜往捕獲之
라
明日召尉歸하야 以賊與之曰 得是하니 可以論賞이라한대 賞未及下而尉卒이라 尉는 河南儒者魏景山也니 老而且貧이라
通判
에 治田訟三十年不決者
하야 一日決之
러니 秩滿
에 嘉人詣轉運使
하야 乞留不得
이라
時
에 守成都
에 薦其材
한대 而薦者十有五人
이라 通判
할새 府有妖獄二百餘人
이라
君方以公事之他州
러니 疑獄有寃
하야 召君還視之
한대 獨留其一人
하고 餘皆釋之
러라
累遷尙書虞部員外郞
한대 天子享明堂
에 推恩
하야 遂遷
하고 通判
할새 決疑獄
하야 活一家五人
이러라
君好學重氣節이라 嘗有負하니 其錢數千萬이어늘 輒毁其券棄之하고
與人交에 久而益篤이라 喜爲歌詩하고 至於射藝書法醫藥하야도 皆精妙라
尤好奇畫古書하야 每傾貲購之하고 嘗自爲錄하야 藏于家하니 其材能好尙이 皆可嘉也라
母曰仁壽縣太君王氏라 初娶王氏는 生一子하니 安期也요 後娶又曰王氏라
銘曰 在蜀僞時
에 處昏不迷
하니 라 蜀亡而東
하야 高明顯融
이 莫如陳宗
이라
故 尙書比部員外郞 陳君을 至和 2년(1055) 정월 某日에 京兆府 萬年縣 洪固鄕 神禾原에 장사 지내기로 정하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祕書丞 李詡가 진군의 아들 安期와 논의하여 廬陵의 歐陽脩에게 묘지명을 청하려 하였는데, 안기가 “저는 감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이후가 “내가 청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후와 안기가 함께 글과 폐백을 갖추고서 진군의 門客인 賈繹을 보내어 長安에서 京師로 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진군은 至和 원년(1054) 5월 某日에 장안에서 임종하였으니, 향년 46세였다. 벼슬은 현달하지 못하였고 행적도 당시에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후는 절의가 있어 신뢰할 만한 선비로서, 이후는 진군에게 보답을 하였고 진군은 이후를 알아주었으니, 진군의 사람됨을 알 만하다.
진군은 諱가 漢卿이고 字가 師黯이니 대대로 閬中에 살았다. 그 선조는 博州 사람이었는데, 僞蜀을 섬겨 縣令이 되었기에 마침내 낭중에 정착하게 되었다.
曾叔祖 省華는 관직이 諫議大夫에 이르렀고, 堯叟와 堯佐와 堯咨를 낳았으니 전후로 將相이 되었고, 진군의 집안은 曾祖 이하로부터 3대 동안 현달하지 못했다.
증조 휘 省恭은 벼슬하지 않았고, 祖父 휘 堯封은 進士에 급제하여 虢縣主簿가 되었는데, 王均이 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궐에 가서 글을 올려 적도들을 깨뜨릴 책략을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마침내 물러나 嵩山에서 여생을 보냈다. 부친 휘 淵 또한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이 大理寺丞에 이르렀고, 그 형인 金龜子 漸과 함께 모두 문학으로 알려지고 명성이 났다.
진군은 태어난 지 한 해 만에 부친을 여의고 나이 13세에 모친과 함께 蜀으로 들어올 적에 鳳翔府를 지나면서 府尹을 배알하려 하였는데, 관리가 진군을 어리게 보고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진군이 곧장 들어가 뜰아래에 엎드리고서, “진 아무개가 뵙기를 청합니다.”라고 하고는 부윤이 선비를 홀대함을 책망하고 관리가 근엄하지 못함을 경계하니, 부윤이 부끄러워하면서 관리에게 笞刑을 내려 진군에게 사과하였다.
진군은 叔祖 堯咨의 지위에 의해 蔭補로 將作監主簿가 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大理寺丞 監沙苑監 權知渭南縣이 되었다.
백성들 중에 형제끼리 밭을 두고 다투는 자가 있었는데, 관리가 항상 그 형이 옳다고 판결하였음에도 아우가 송사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군이 직접 가서 그 전답을 살펴보고서 文券을 판별하여 전답을 아우에게 주니, 그 형이 사죄하면서 “제가 뉘우치고서 아우에게 전답을 돌려주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나, 다만 태형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우는 “저는 전답이 본래 많습니다. 그러나 옳지 못하다고 판결이 난 것이 수치스러워 송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형이 이제 제가 옳다고 하니 형에게 전답을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형제가 서로 붙들고서 통곡을 하고 절을 하고서 떠나갔다. 이 일로 인해 縣民들이 일이 생기면 함께 진군에게 와서 진군의 한마디 말로 시비를 결판 짓는 자가 많았다.
또 登封知縣이 되었는데, 현에 악랄한 도적 열 사람이 도적질을 모의하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때 縣尉가 일이 있어 출타하였는데, 진군이 젊은이들을 모으고 手力을 선발하여 밤에 가서 도적들을 잡아왔다.
이튿날 진군이 현위를 불러 돌아오게 하여 잡아온 도적들을 현위에게 넘기면서 말하기를 “이 도적들을 잡았으니 論賞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미처 상을 내리기 전에 현위가 사망하였다. 현위는 河南의 儒者인 魏景山으로, 늙고 가난하였다.
진군이 현위를 위하여 그 喪事를 주관하고 汝州에 田宅을 매입해 그 妻子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嘉州通判이 되었을 적에 30년 동안이나 판결이 나지 않은 전답의 송사를 맡아 하루 만에 판결 내었다. 임기가 다 차자 가주 사람들이 轉運使에게 가서 留任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당시
文丞相(
文彥博)이
成都府知事로 있으면서 재주 있는 이를 천거하게 하였는데, 진군을 천거한 사람이 15명이었다. 진군이
河中府通判으로 있을 때
府에 요사스러운
獄事에 200여 명이 연루되는 사건이 있었다.
文彥博(≪萬苦際會圖像≫)
진군이 그때 공무로 다른 주에 가 있었는데, 提點刑獄司가 옥사에 억울한 점이 있다고 의심하여 진군을 불러 돌아와서 옥사를 살피게 하였다. 그러자 진군은 그중에 한 사람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尙書虞部員外郞이 되었는데 천자가 明堂에서 祭享할 때 은혜를 베풀어 마침내 比部로 승진하였고, 寧州通判으로 있을 때 의심스러운 옥사를 판결하여 한 집안의 다섯 사람을 살려주었다.
진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氣節을 중시하였다. 일찍이 남에게 받을 채무가 있어 그 금액이 수천만 전이었는데, 문득 그 채무 증서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교유할 적에 관계가 오래될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歌詩를 짓기를 좋아하였고 활쏘기, 書法, 醫藥의 경우에도 모두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奇畫와 古書를 더욱 좋아하여 매번 재물을 다 털어 구매하고 일찍이 스스로 그것들을 기록하여 집에 보관하니, 그 재능과 嗜好가 모두 아름다웠다.
모친은 仁壽縣太君 王氏이다. 初娶 王氏는 아들 하나를 낳으니 安期이고, 後娶도 왕씨였다.
銘은 다음과 같다. 僞蜀 시대에 혼미한 세상을 살면서 미혹하지 않았으니 오직 陳氏가 가장 한미하였네 위촉이 망하고 동쪽으로 가서 부귀하고 현달함이 진씨의 조상만 한 사람이 없었네
진씨가 명성이 난 것은 고조와 증조 때부터이고 진군의 세대에는 흥성하지 못했네 흥성하고 침체하면서 때를 기다리며 덕을 쌓으니 운수가 순환하여 반드시 돌아오네
실로 진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자손이 창성하리니 묘지명을 살펴보면 글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