徂徠先生
은 姓石氏
요 名介
요 字守道
니 人也
라 而先生非隱者也
라
其仕嘗位于朝矣
로되 魯之人
이 不稱其官而稱其德
하며 以爲
이요 先生
은 魯人之所尊
이라
故因其所居山하야 以配其有德之稱曰徂徠先生者는 魯人之志也라
先生貌厚而氣完하며 學篤而志大라 雖在畎畝나 不忘天下之憂하야 以謂時無不可爲요 爲之無不至라
不在其位則行其言이요 吾言用이면 功利施於天下니 不必出乎己며 吾言不用이면 雖獲禍咎하야 至死而不悔라하다
其遇事發憤하고 作爲文章에 極陳古今治亂成敗하야 以指切當世賢愚善惡是是非非하야 無所諱忌하니 世俗頗駭其言이라
由是로 謗議喧然하고 而小人尤嫉惡之하야 相與出力하야 必擠之死하되 先生安然하야 不惑不變하야 曰 吾道固如是요 吾勇過孟軻矣라하더니
賴天子仁聖하야 察其誣하야 得不發棺而保全其妻子러라
先生世爲農家라가 父諱丙이 始以仕進하야 官至太常博士라
先生年二十六
에 擧進士甲科
하야 爲鄆州觀察推官 南京留守推官
이러니 라
秩滿
에 遷某軍節度掌書記
하고 代其父官于蜀
하야 爲
事判官
이라가
丁內外艱하야 去官하여 垢面跣足으로 躬耕徂徠之下하야 葬其五世未葬者七十喪하고 服除에 召入國子監直講하다
天子奮然思欲振起威德하야 而進退二三大臣하고 增置諫官御史하니 所以求治之意甚銳라
先生躍然喜曰 此盛事也
라 吾職
이니 其可已乎
아하고 乃作慶曆聖德詩
하야 以褒貶大臣
하며 分別邪正
이 累數百言
이라
詩出
에 太山
曰 子禍始於此矣
라하니 明復
은 先生之師友也
라 其後所謂姦人作奇禍者 乃詩之所斥也
라
先生自閒居徂徠하고 後官于南京으로 嘗以經術敎授하고
及在大學하얀 益以師道自居에 門人弟子從之者甚衆하니 太學之興은 自先生始라
其所爲文章
은 其斥佛老時文
은 則有怪說中國論
하니 曰去此三者然後
에 可以有爲
라하고
其戒姦臣宦女는 則有唐鑑하니 曰 吾非爲一世監也라하다 其餘喜怒哀樂을 必見於文하니 其辭博辯雄偉而憂思深遠이러라
其爲言曰 學者는 學爲仁義也니 惟忠이라야 能忘其身이요 信篤於自信者라야 乃可以力行也라하야 以是行於己하며 亦以是敎於人이라
所謂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孟軻揚雄韓愈氏者를 未嘗一日不誦於口하야
思與天下之士로 皆爲周孔之徒하야 以致其君爲堯舜之君하며 民爲堯舜之民하야 亦未嘗一日少忘於心이라
至其違世驚衆하야 人或笑之하면 則曰 吾非狂癡者也라하니 是以로 君子察其行而信其言하며 推其用心而哀其志러라
先生直講歲餘에 杜祁公薦之天子하야 拜太子中允이러니 今丞相韓公又薦之하야 乃直集賢院하고
又歲餘
에 始去太學
하야 通判
하야 方
于徂徠
라가 以慶曆五年七月某日
로 卒于家
하니 享年四十有一
이라
先生旣沒에 妻子凍餒하야 不自勝이어늘 今丞相韓公與河陽富公이 分俸買田以活之러라
後二十一年
에 其家始克葬先生于某所
라 將葬
에 其子師訥與其門人
徐遁等
이 來告曰 謗焰熄矣
니 可以發先生之光矣
라 敢請銘
하노라하야늘
某曰 吾詩不云乎아 子道自能久也라 何必吾銘이리오하니 遁等曰 雖然이나 魯人之欲也라하야늘 乃爲之銘曰
徂徠之巖巖과 與子之德兮여 魯人之所瞻이로다 汶水之湯湯과 與子之道兮여 逾遠而彌長이로다
道之難行兮
여 孔孟亦云遑遑
이니 一世之屯兮
여 萬世之光
이로다 曰
이리오
徂徠先生은 성이 石氏이고 이름이 介이고 자가 守道니 兗州 奉符 사람이다. 徂徠는 魯나라 동쪽 산인데 선생은 은거한 사람이 아니다.
朝廷에서 벼슬하였지만 魯 지역 사람들이 그의 관직을 부르지 않고 그의 덕을 칭송하며 “徂徠는 魯 지역이 우러러보고 선생은 魯 지역 사람들이 존중하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그가 거처하던 산의 이름을 가지고 덕이 있는 사람의 칭호를 짝지어 徂徠先生이라 불렀으니 魯 지역 사람들의 뜻이다.
선생의 풍모는 후중하고 기운은 충실하며 학문은 독실하고 뜻이 컸다. 비록 초야에 있으면서도 천하의 근심을 잊지 않고서 이르기를 “때는 할 수 없는 적이 없고 하면 못할 일이 없다.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말을 실천할 뿐이고, 내 말이 채택되면 公利가 천하에 시행될 것이니 꼭 나에게서 나올 필요 없으며, 내 말이 채택되지 않으면 화를 입어 죽음에 이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일을 만나면 發憤하고 문장으로 지어 古今의 治亂과 成敗를 극진히 말하여 當世의 賢愚善惡과 是是非非를 指摘하여 숨기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세속 사람들은 선생의 말에 매우 놀랐다.
이로 말미암아 비방하는 말이 시끄러웠고, 小人들은 더욱 선생을 미워하여 서로 힘을 내 반드시 죽음으로 내몰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하게 미혹하지도 않고 지조를 바꾸지도 않고서 말하기를 “나의 道는 본래 이러하고, 나의 용기는 孟軻보다 더하다.”라고 하였다.
불행하게 병을 얻어 卒하였고, 卒한 뒤에 姦人 중에 선생이 죽은 것을 奇禍로 大臣을 中傷하려는 사람이 있어 오히려 선생을 끌어들여 일을 만들어 말하기를 “죽었다 거짓말을 하고는 북쪽 거란으로 망명하였다.”라고 하면서 棺을 꺼내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인자하고 성스러운 천자께서 그것이 誣告라는 것을 살펴 棺을 꺼내지도 않았고 妻子들도 보전할 수 있었다.
선생은 대대로 농사짓는 집안이었는데, 아버지 휘 丙이 처음으로 벼슬하여 관직이 太常博士에 이르렀다.
선생은 나이 26세에 進士試에 甲科로 급제하여 鄆州觀察推官 南京留守推官이 되었는데, 御史臺에서 선생을 主簿로 불렀다. 부임하기도 전에 글을 올려 사면에 대해 논하다 파직되자 어사대로 부르지 않았다.
임기가 차자 某軍節度掌書記로 옮겼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蜀에서 벼슬살이하여 嘉州軍事判官이 되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떠나 때 묻은 얼굴과 맨발로 徂徠山 아래에서 몸소 경작하면서 5世 동안 장사 지내지 못했던 70喪을 장사 지내고, 복을 벗자 소명을 받고 國子監直講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군사가 元昊를 토벌하였지만 오랫동안 戰功이 없으니 海內가 몹시 지쳐 있었다.
천자가 분연히 위엄과 덕을 떨쳐 일으키고자 생각하여 두세 大臣을 교체하고 諫官御史를 증원하였으니 治世를 도모한 뜻이 매우 강하였다.
선생이 뛸 듯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훌륭한 일이다. 雅頌을 짓는 것은 나의 직분이니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에 〈慶曆聖德詩〉를 지어 大臣을 포폄하고 邪正을 분별한 말이 수백 자였다.
시가 나오자 太山 孫明復이 말하기를 “그대의 禍는 이 시에서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孫明復은 선생의 師友였다. 그 뒤에 이른바 姦人이 奇禍로 삼았다는 것이 바로 이 시에서 배척했던 사람이었다.
先生이 徂徠山에서 한가롭게 거처하고 훗날 南京에서 벼슬살이할 때로부터 일찍이 經術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太學에 있을 때에는 더욱 師道로 자처함에 선생을 따르는 門人과 제자가 매우 많았으니, 太學이 興盛하게 된 것은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생이 지은 문장으로는 某集 약간 卷이 있고, 佛敎와 道敎, 그리고 당시 과거문장을 비판한 것은 〈怪說〉, 〈中國論〉이 있으니, 이 책에서 말하기를 “이 세 가지를 제거한 뒤라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姦臣, 宦官, 宮女를 경계한 것은 ≪唐鑑≫이 있으니 이 책에서 말하기를 “나는 一世를 위하여 鑑戒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나머지 喜怒哀樂을 반드시 문장에 드러냈으니, 글은 言辯이 풍부하고 웅장하였고 憂慮는 심원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學이라는 것은 仁義를 배워서 실천해야 하니 충심을 지녀야 자신을 잊을 수 있고, 自信에 篤信한 자라야 이에 힘써 실천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스스로 실천하고 또한 이로써 남을 가르쳤다.
이른바 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孟軻‧揚雄‧韓愈 등의 글을 일찍이 하루도 입으로 외지 않은 적이 없어서,
천하의 선비와 함께 모두 周公과 孔子의 무리가 되어 자신의 임금을 堯舜의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을 堯舜의 백성으로 만들 것을 생각하여 또한 하루도 마음에서 조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선생이 세상의 常論과 어긋난 것을 주장해 대중을 놀라게 하는 데에 이르러 사람이 혹 비웃으면 “나는 미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군자는 그 행동을 살펴 그 말을 믿고 마음 씀을 헤아려보고 뜻을 가엾게 여기는 것이다.
선생이 直講으로 재임한 지 1년 남짓 되자 杜祁公(杜衍)이 천자에게 천거하여 太子中允에 배수되었는데, 지금 승상 韓公(韓琦)이 또 천거하여 이에 直集賢院이 되었다.
또 1년 남짓 되자 비로소 太學을 떠나 濮州通判이 되어 바야흐로 徂徠에서 待次하고 있다가, 慶曆 5년(1045) 7월 모일에 집에서 卒하니 향년 41세였다.
友人 盧陵 歐陽脩가 詩를 지어 선생을 哭하면서 ‘저 비방하는 화염이 사라지기를 기다린 뒤라야 선생의 도가 밝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妻子가 추위와 배고픔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지금의 승상 韓公과 河陽 富公(富弼)이 녹봉을 나눠 밭을 매입해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
21년 뒤에 선생의 집안에서 비로소 某所에 선생을 장사 지냈다. 장사를 치르려 할 때에 선생의 아들 師訥이 선생의 門人 姜潛, 杜默, 徐遁 등과 함께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선생을 비방하던 화염이 사라졌으니, 선생의 빛을 드러내도 될 것입니다. 감히 銘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시에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의 도는 절로 오래 전해지리’라고. 그러니 나의 銘이 어찌 필요하겠는가.”라고 하니, 徐遁 등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지만 魯 지역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하거늘 이에 銘을 짓는다.
높디높은 徂徠山과 그대의 덕이여 魯人들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넘실대는 汶水와 그대의 道여 세월이 지나도 더욱 장구하리라
道가 행해지기 어려움이여 孔孟 역시 바쁘게 다니셨으니 一世에 곤경을 당함이여 萬世에 길이 빛나네 나에게 命이 있지 않겠는가 어찌 桓魋와 臧倉에게 달려 있으랴
예로부터 성현들 모두 그러함이여 아 그대를 비록 비방한들 어찌 손상되리오
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글은 변화가 지극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