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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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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敍生平交游感慨爲志
予友黃君夢升 其先이러니 後徙하다
하다 黃氏 世爲江南大族이라
自其祖父以來 樂以家貲賑鄕里하고 多聚書以招四方之士러라 夢升兄弟皆好學하고 尤以文章意氣自豪
러니 하야 官于隨
予爲童子하야 立諸兄側하야 見夢升하니 年十七八이요 眉目明秀하고 善飮酒談笑 予雖幼 心已獨奇夢升이러라
夢升得하야 初任永興主簿하야 怏怏不得志라가 以疾去러니 久之 復調主簿하니
한대 夢升顔色憔悴하야 初不可識이라가
久而握手하고 噓嚱라가 相飮以酒하야 夜醉起舞하고 歌呼大噱하니 予益悲夢升志雖衰而少時意氣尙在也러라
하고 夢升復調主簿 又遇之于鄧하야 間常問其平生所爲文章幾何하니
夢升慨然歎曰 吾已諱之矣 窮達有命하니 非世之人 不知我 我羞道于世人也라하야늘 求之不肯出이라
遂飮之酒하야 復大醉하야 起舞歌呼 因笑曰 子知我者라하고 乃肯出其文이어늘
讀之 博辯雄偉하고 意氣奔放하야 若不可禦 予又益悲夢升志雖困而未衰也러라
是時 謝希深出守鄧州 尤喜稱道天下士
하고 予亦去鄧이러라 後之守鄧者 皆俗吏 不復知夢升이라
夢升素剛不苟合하고 負其所有하야 常怏怏無所施라가 卒以不得志 死于南陽하다
夢升 諱注 하니 享年四十有二 其平生所爲文曰破碎集公安集南陽集凡三十卷이라
娶潘氏하야 生四男二女 將以慶曆四年某月某日 葬于董坊之先塋이라
其弟渭泣而來告曰 吾兄患世之莫吾知하니 孰可爲其銘고하야늘 予素悲夢升者 因爲之銘曰
予嘗讀夢升之文이라가 至於哭其兄子之詞 曰子之文章 電激雷震이라가 雨雹忽止 闃然滅泯하야
未嘗不諷誦歎息而不已러라 嗟夫夢升 曾不及庠하니 不震不驚하고 鬱塞埋藏이라
孰予其有하고 不使其施 吾不知所歸咎하고 徒爲夢升而悲하노라


02. 黃夢升墓誌銘
평생 교유를 나눈 감개를 서술하여 墓誌로 삼았다.
내 벗 黃夢升은 그 先祖婺州 金華 사람이었는데 뒤에 洪州分寧으로 移住하였다.
그 증조부 元吉과 조부 와 부친 中雅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黃氏는 대대로 江南大族이었다.
그 조부 이래로 家産을 베풀어 鄕里 백성들 구휼하기를 좋아하였고 서적을 많이 모아 사방의 선비들을 불러 맞이하였다. 夢升 형제는 모두 학문을 좋아하였고 특히 文章意氣自負하였다.
나는 어려서 隨州에 살았는데 夢升이 그 형 茂宗을 따라 隨州에서 벼슬살이하였다.
내가 이 시절에 아직 童子로서 형들 곁에 있으면서 夢升을 보니 그는 나이 열일고여덟 살이었고 眉目淸水하고 음주와 담소를 좋아하였다. 내가 비록 어렸으나 마음으로 이미 夢升을 유독 뛰어나다고 여겼다.
7년 뒤에 나와 夢升이 모두 京師에서 進士試應擧하였다.
夢升丙科에 급제하여 처음에 興國軍 永興主簿에 임명되어 불만에 가득한 채 뜻을 펴지 못하다가 질병으로 관직을 떠났는데 오랜 뒤에 다시 江陵府 公安主簿調用되었다.
이때 나는 夷陵令으로 貶謫된지라 江陵에서 그를 만났는데 夢升顔色憔悴해져서 처음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오래 지나고 나서야 〈그를 알아보고〉 손을 잡고 탄식하다가 함께 술을 마시고서 밤에 취해 일어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크게 웃으니 나는 夢升이 뜻은 비록 쇠하였지만 젊은 시절의 意氣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더욱 서글퍼하였다.
2년 뒤에 나는 乾德令으로 옮겼고 夢升은 다시 南陽主簿調用된지라 다시 그를 鄧州에서 만나 중간에 그가 평소 지은 문장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夢升이 개연히 탄식하기를 “나는 이미 그것들을 숨겨두었네. 窮達에는 天命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네.”라고 하였는데, 내가 문장을 보여달라 요구하였으나 꺼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술을 마시고서 다시 크게 취하여 일어나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 이어 웃으면서 “그대는 나를 아는 자이다.”라고 하고는 비로소 그 문장을 기꺼이 꺼내주었는데,
내가 그 문장을 읽어보니 해박한 논변이 雄偉하고 意氣奔放하여 막을 수 없을 듯하였다. 내가 다시 夢升이 뜻이 비록 곤궁해졌으나 문장은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서글퍼하였다.
이때에 謝希深(謝絳)이 외직으로 나가 鄧州를 맡고 있었는데 특히 천하의 선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내가 이로 인해 夢升의 글 한 통을 손수 써서 希深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는데 미처 보여주지 못하고 希深이 졸하였고 나 역시 鄧州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로 등주를 맡은 자는 모두 俗吏인지라 다시 夢升을 알지 못하였다.
夢升은 평소 剛直하여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고 자신이 품은 재능을 자부하여 늘 불만스러워하며 재능을 펴지 못하다가, 끝내 뜻을 얻지 못한 채 南陽에서 세상을 떠났다.
夢升이다. 寶元 2년(1039) 4월 25일에 졸하니 享年 42세였다. 그가 평생 지은 문장은 ≪破碎集≫, ≪公安集≫, ≪南陽集≫인데 모두 30권이다.
潘氏를 아내로 맞아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慶曆 4년(1044) 모월 모일에 董坊先塋安葬하게 되었다.
그 아우 가 흐느끼며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형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알지 못할까 근심하였으니 누가 형의 을 지을 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내가 평소 夢升을 서글퍼하였으므로 인하여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이 을 짓는다.
내 일찍이 夢升의 글을 읽다가 그 조카 黃庠하는 에서 “그대의 文章은 마치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다가 비와 우박이 홀연 그침에 고요히 다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는 대목에 이르러
언제나 諷誦하고 歎息하기를 마지않았네 서글프구나, 夢升은 내게 黃庠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울리지도 않고 놀래키지도 않으며 울울하게 막힌 채 매장되어버렸네
누가 그에게 재능을 주고는 재능을 펴지 못하게 하였는가 나는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른 채 그저 夢升을 위하여 서글퍼하노라


역주
역주1 黃夢升墓誌銘 : 본집 原註에 따르면, 이 글은 歐陽脩가 慶曆 3년(1043)에 지은 것이다. 黃夢升은 이름이 注(998~1039)로, 歐陽脩와 同年 進士이고 黃庭堅의 叔祖이다. 黃庭堅은 자기 叔祖의 분방한 才氣를 몹시 흠모하는 한편으로, 그가 불우하게 생을 마친 데 대해 깊은 同情을 표하였다. 이러한 감정은 그가 지은 〈跋歐陽文忠公撰七叔祖主簿墓誌後〉에서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過方城尋七叔祖舊題〉라는 제목의 詩에서 더 곡진하게 서술하였다.
역주2 婺州金華 : 唐代에 江南道에 속했고 宋代에는 兩浙路에 속했다. 치소는 지금의 浙江省 金華縣에 있었다.
역주3 洪州之分寧 : 江南西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江西省 修水縣에 있었다.
역주4 其曾祖諱元吉……皆不仕 : ≪山谷集≫에 수록된 黃氏世系에 근거하면, 黃注의 曾祖父는 이름이 贍이고, 祖父는 이름이 元吉이며, 父親은 이름이 中雅이다. 그리고 黃庭堅이 지은 〈叔父和叔墓碣〉에 따르면, 黃贍은 南唐 때 著作佐郞으로 分寧知縣을 지냈고 楚王 馬殷이 또한 兵馬副使를 제수한 적이 있어 벼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역주5 : 본집에는 없다.
역주6 予少家隨州 : 〈年譜〉에 따르면, 歐陽脩는 4세 때 부친을 여의었는데, 이때 숙부 歐陽曄이 隨州推官으로 부임하여 모친 鄭氏가 歐陽脩를 데리고 가서 숙부에게 의지하였으니, 이때부터 隨州에 이주하게 된 것이다. 隨州는 京西南路에 속했는데, 지금의 湖北省 隨縣이다.
역주7 夢升從其兄茂宗 : 黃庭堅이 지은 〈叔父和叔墓碣〉에 따르면, 黃茂宗은 黃注의 堂兄으로, 字가 昌裔인데 大中祥符 연간 進士가 되어 崇信軍節度判官에 제수되었다. 이때 黃注가 그를 따라 隨州에 간 것이다.
역주8 後七年……皆擧進士於京師 : 〈年譜〉에 따르면, 歐陽脩는 두 번 禮部試에 응시하였는데, 첫 번째는 天聖 5년(1027)으로 급제하지 못하였고, 두 번째는 天聖 8년(1030)이었다. 여기서 夢升과 함께 응시한 것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첫 번째라고 한다면 夢升이 이때 이미 29세로, 歐陽脩가 隨州에서 처음 夢升을 만난 때로부터 11~12년의 간격이 있고, 만약 두 번째라고 한다면 벌써 14~15년의 간격이 있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7년 뒤라고 한 말이 歐陽脩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거나 처음 夢升을 알게 된 때에 그의 나이가 17~18세에 그치지 않았던 듯하다.
역주9 丙科 : 漢代에 博士弟子들을 考試할 때 甲乙丙 세 科로 구분하여 각각에 합격한 이들에게 순서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였다. 唐代 進士 역시 甲乙科가 있었다. 宋代의 科擧는 다섯 등급이 있었는데, 1, 2등은 及第라고 하고 3등은 出身이라고 하며 4, 5등은 同出身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同出身이 바로 丙科에 상응한다.
역주10 興國軍永興 : 江南西路에 속했는데 지금의 江西省 永興縣이다.
역주11 江陵府公安 : 荊湖北路에 속했는데 지금의 湖北省 公安縣이다.
역주12 予謫夷陵令 遇之于江陵 : 景祐 3년(1036)에 歐陽脩가 峽州 夷陵令으로 폄적될 때 汴河를 따라가다가 淮河를 건너 長江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래서 江陵에서 夢升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江陵은 江陵府로, 치소는 湖北省 江陵縣에 있었다.
역주13 後二年 予徙乾德令 : 景祐 4년(1037) 12월에 歐陽脩는 光化軍 乾德令에 임명되고 이듬해 3월에 乾德에 부임하였다. 乾德은 京西南路 光化軍에 속했는데 지금의 湖北省 光化縣이다.
역주14 南陽 : 鄧州 南陽郡으로, 京西南路에 속했다.
역주15 文章 : 본집에는 이 2字 앞에 ‘獨其’ 2字가 더 있다.
역주16 是時……未及而希深卒 : 謝希深은 謝絳(994~1039)으로, 希深은 그의 자이다. 歐陽脩가 지은 〈尙書兵部員外郞知制誥謝公墓誌銘〉에 “공은 寶元 2년(1039) 4월 정묘일에 鄧州에 부임해 와서 그해 11월 기유일에 질병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졸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17 以寶元二年四月二十五日卒 : 謝絳은 寶元 2년 11월에 졸하였고 歐陽脩는 그해 겨울에 乾德을 떠나 襄城에 부임하였으므로 夢升이 4월에 졸했다고 하면 앞뒤 시기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高步瀛(1873~1940)은 ≪唐宋文擧要≫에서 이를 분석하여 “이듬해 2월 병오일에 康定으로 改元하였으니 실제로는 寶元 3년인데 후인들이 깊이 상고하지 않은 것이니 아마도 寶元 3년이 없어 ‘三’을 ‘二’로 고친 듯하다.”라고 하였다.
역주18 : ≪宋史≫ 〈文苑傳〉에 “黃庠은 字가 長善으로 洪州 分寧 사람이다. 國子監, 開封府, 禮部의 시험에 응시하여 모두 제1등을 하였으므로 그가 지은 應試 文章이 천하에 널리 퍼졌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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