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其祖父以來
로 樂以家貲賑鄕里
하고 多聚書以招
四方之士
러라 夢升兄弟皆好學
하고 尤以文章意氣自豪
라
予爲童子하야 立諸兄側하야 見夢升하니 年十七八이요 眉目明秀하고 善飮酒談笑라 予雖幼나 心已獨奇夢升이러라
夢升得
하야 初任
永興主簿
하야 怏怏不得志
라가 以疾去
러니 久之
에 復調
主簿
하니
久而握手하고 噓嚱라가 相飮以酒하야 夜醉起舞하고 歌呼大噱하니 予益悲夢升志雖衰而少時意氣尙在也러라
하고 夢升復調
主簿
라 又遇之于鄧
하야 間常問其平生所爲文章幾何
하니
夢升慨然歎曰 吾已諱之矣라 窮達有命하니 非世之人이 不知我라 我羞道于世人也라하야늘 求之不肯出이라
遂飮之酒하야 復大醉하야 起舞歌呼라 因笑曰 子知我者라하고 乃肯出其文이어늘
讀之
에 博辯雄偉
하고 意氣奔放
하야 若不可禦
라 予又益悲夢升志雖困而
未衰也
러라
하고 予亦去鄧
이러라 後之守鄧者
는 皆俗吏
라 不復知夢升
이라
夢升素剛不苟合하고 負其所有하야 常怏怏無所施라가 卒以不得志로 死于南陽하다
夢升
은 諱注
라 하니 享年四十有二
라 其平生所爲文曰破碎集公安集南陽集凡三十卷
이라
娶潘氏하야 生四男二女라 將以慶曆四年某月某日로 葬于董坊之先塋이라
其弟渭泣而來告曰 吾兄患世之莫吾知하니 孰可爲其銘고하야늘 予素悲夢升者라 因爲之銘曰
予嘗讀夢升之文
이라가 至於哭其兄子
之詞
에 曰子之文章
은 電激雷震
이라가 雨雹忽止
에 闃然滅泯
하야
未嘗不諷誦歎息而不已러라 嗟夫夢升은 曾不及庠하니 不震不驚하고 鬱塞埋藏이라
孰予其有하고 不使其施아 吾不知所歸咎하고 徒爲夢升而悲하노라
평생 교유를 나눈 감개를 서술하여 墓誌로 삼았다.
내 벗 黃夢升은 그 先祖가 婺州 金華 사람이었는데 뒤에 洪州의 分寧으로 移住하였다.
그 증조부 諱 元吉과 조부 諱 某와 부친 諱 中雅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黃氏는 대대로 江南의 大族이었다.
그 조부 이래로 家産을 베풀어 鄕里 백성들 구휼하기를 좋아하였고 서적을 많이 모아 사방의 선비들을 불러 맞이하였다. 夢升 형제는 모두 학문을 좋아하였고 특히 文章과 意氣로 自負하였다.
나는 어려서 隨州에 살았는데 夢升이 그 형 茂宗을 따라 隨州에서 벼슬살이하였다.
내가 이 시절에 아직 童子로서 형들 곁에 있으면서 夢升을 보니 그는 나이 열일고여덟 살이었고 眉目이 淸水하고 음주와 담소를 좋아하였다. 내가 비록 어렸으나 마음으로 이미 夢升을 유독 뛰어나다고 여겼다.
7년 뒤에 나와 夢升이 모두 京師에서 進士試에 應擧하였다.
夢升은 丙科에 급제하여 처음에 興國軍 永興主簿에 임명되어 불만에 가득한 채 뜻을 펴지 못하다가 질병으로 관직을 떠났는데 오랜 뒤에 다시 江陵府 公安主簿에 調用되었다.
이때 나는 夷陵令으로 貶謫된지라 江陵에서 그를 만났는데 夢升은 顔色이 憔悴해져서 처음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오래 지나고 나서야 〈그를 알아보고〉 손을 잡고 탄식하다가 함께 술을 마시고서 밤에 취해 일어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크게 웃으니 나는 夢升이 뜻은 비록 쇠하였지만 젊은 시절의 意氣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더욱 서글퍼하였다.
2년 뒤에 나는 乾德令으로 옮겼고 夢升은 다시 南陽主簿로 調用된지라 다시 그를 鄧州에서 만나 중간에 그가 평소 지은 문장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夢升이 개연히 탄식하기를 “나는 이미 그것들을 숨겨두었네. 窮達에는 天命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네.”라고 하였는데, 내가 문장을 보여달라 요구하였으나 꺼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술을 마시고서 다시 크게 취하여 일어나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 이어 웃으면서 “그대는 나를 아는 자이다.”라고 하고는 비로소 그 문장을 기꺼이 꺼내주었는데,
내가 그 문장을 읽어보니 해박한 논변이 雄偉하고 意氣가 奔放하여 막을 수 없을 듯하였다. 내가 다시 夢升이 뜻이 비록 곤궁해졌으나 문장은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서글퍼하였다.
이때에 謝希深(謝絳)이 외직으로 나가 鄧州를 맡고 있었는데 특히 천하의 선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내가 이로 인해 夢升의 글 한 통을 손수 써서 希深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는데 미처 보여주지 못하고 希深이 졸하였고 나 역시 鄧州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로 등주를 맡은 자는 모두 俗吏인지라 다시 夢升을 알지 못하였다.
夢升은 평소 剛直하여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고 자신이 품은 재능을 자부하여 늘 불만스러워하며 재능을 펴지 못하다가, 끝내 뜻을 얻지 못한 채 南陽에서 세상을 떠났다.
夢升은 諱가 注이다. 寶元 2년(1039) 4월 25일에 졸하니 享年 42세였다. 그가 평생 지은 문장은 ≪破碎集≫, ≪公安集≫, ≪南陽集≫인데 모두 30권이다.
潘氏를 아내로 맞아 네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慶曆 4년(1044) 모월 모일에 董坊의 先塋에 安葬하게 되었다.
그 아우 渭가 흐느끼며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형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알지 못할까 근심하였으니 누가 형의 銘을 지을 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내가 평소 夢升을 서글퍼하였으므로 인하여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이 銘을 짓는다.
내 일찍이 夢升의 글을 읽다가 그 조카 黃庠을 哭하는 詞에서 “그대의 文章은 마치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리다가 비와 우박이 홀연 그침에 고요히 다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는 대목에 이르러
언제나 諷誦하고 歎息하기를 마지않았네 서글프구나, 夢升은 내게 黃庠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울리지도 않고 놀래키지도 않으며 울울하게 막힌 채 매장되어버렸네
누가 그에게 재능을 주고는 재능을 펴지 못하게 하였는가 나는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른 채 그저 夢升을 위하여 서글퍼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