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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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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總寫交游之情이로되 而自任及樂善 宛然言外로다
吾友張子野旣亡之二年 其弟充 以書來請曰 吾兄之喪 將以今年三月某日 葬于開封하니 不可以不銘이라 銘之莫如子宜라하니
嗚呼 予雖不能銘이나 然樂道天下之善以傳焉이온 況若吾子野者 非獨其善可銘이라
又有平生之舊朋友之恩與其可哀者 皆宜見於予文하니 宜其來請於予也
初天聖九年 予爲西京留守推官하니 是時 陳郡謝希深南陽張堯夫與吾子野 尙皆無恙이라
而堯夫子野 退然其間하야 不動聲氣하니 衆皆指爲長者러라
予時尙少 心壯志得하야 以爲洛陽 東西之衝이니 賢豪所聚者多 爲適然耳러니
하고 幷江漢 其行萬三四千里 山砠水厓 窮居獨遊하야 思從曩人호되 邈不可得이라
然雖洛人이라도 至今皆以謂無如嚮時之盛하니 然後 知世之賢豪不常聚 而交遊之難得 爲可惜也로라
初在洛時 已哭堯夫而銘之하고 하고 今又哭吾子野而銘하니
於是 又知非徒相得之難이요 而善人君子 欲使幸而久在於世라도 亦不可得하니 嗚呼 可哀也已로다
子野之世 曰贈太子太師諱某 曾祖也 樞密副使 累贈尙書令 諱遜 皇祖也 尙書比部郞中 諱敏中 皇考也
曾祖妣李氏 隴西郡夫人이요 祖妣宋氏 昭化郡夫人이니 之妹也 妣李氏 永安縣太君이라
子野家聯后姻하야 世久貴仕 而被服操履 甚於寒儒하고 好學自力하야 善筆札이라
咸薦其能하야 改著作佐郞 監酒稅하고
하고 就拜祕書丞하고 秩滿하다
寶元二年二月丁未 以疾卒于官하니 享年四十有八이라 이요 次幼未名이라
女五人 一適人矣 妻劉氏 長安縣君이라
子野爲人 外雖愉怡 中自刻苦 遇人渾渾하야 不見이나 而志守端直하고 臨事果決이라
平居酒半이면 脫冠垂頭 童然禿且白矣 予固已悲其早衰而遂止於此하니 豈其中亦有不自得者邪
子野諱先이니 其上世이라 自曾祖已來 家京師하야 而葬開封하니 今爲開封人也
銘曰 嗟夫子野 質厚材良이라 孰屯其亨이며 孰短其長
豈其中有不自得하야 而外物有以戕 開封之原 新里之鄕 三世于此하니 其歸其藏이라


03. 張子野墓誌銘
交游을 모두 서술하면서도 自任하고 을 즐기는 뜻이 말 밖에 宛然히 드러난다.
내 벗 張子野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에 그의 아우 이 편지를 보내와서 청하기를, “우리 형님의 을 당하여 올해 3월 모일에 開封에 장사 지내려고 하는데 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는지라 을 짓는다면 그대처럼 마땅한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 내가 비록 을 잘 짓지는 못하지만 천하의 을 말하여 전하기를 좋아한다. 하물며 우리 子野 같은 이는 그 을 지을 만할 뿐만 아니라,
또 평소의 교유나 벗으로서의 恩義 그리고 애도할 만한 점은 다 내 글에 드러내야 할 것이니, 그가 나에게 글을 보내와서 청하는 것이 당연하다.
처음 天聖 9년(1031)에 내가 西京留守推官이 되었는데 이때 陳郡 謝希深(謝絳), 南陽 張堯夫(張汝士)와 우리 子野가 여전히 모두 아무런 병이 없었다.
이때 이 지방의 선비들이 모두 걸출한 賢士 豪傑인지라 날마다 서로 왕래하면서 술을 마시고 즐거이 큰소리치고 이리저리 각축하면서 서로 선후를 다투며 어울려 웃고 즐거워했는데,
堯夫子野는 그 가운데서 溫柔하게 뒤로 물러나 聲氣를 드러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長者로 지목하였다.
내가 당시에 아직 어려서 마음이 壯大하고 의기가 양양하여, 洛陽東西要衝이니 賢士 豪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이후에 낙양을 떠나 京師에 왔고 남쪽으로 夷陵江漢으로 쫓겨가게 되어 그 여정이 만삼사천 리나 되었다. 산속과 물가에서 곤궁하게 지내며 홀로 노닐면서 그 시절 사람들을 從遊하고자 생각하였으나 아득히 멀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낙양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두 예전 그 시절만큼 성대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 뒤에야 세상의 현사 호걸들이 늘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니 좋은 벗들과 교유하기 어려움이 애석한 줄을 알았다.
처음 낙양에서 지내던 때 이미 堯夫하고 을 지었으며, 6년이 지난 뒤에 또 希深을 곡하고 을 지었으며, 지금 다시 우리 子野를 곡하고 을 지으니,
이에 서로 만나 어울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善人 君子를 다행스럽게 오랫동안 세상에 살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음을 또 알았으니 아, 서글플 뿐이다.
子野世系는, 贈太子太師 曾祖이고, 宣徽北院使 樞密副使로 누차 증직되어 尙書令이 된 은 조부이고, 尙書比部郞中 敏中皇考이다.
曾祖妣 李氏隴西郡夫人이고, 祖妣 宋氏昭化郡夫人이니 孝章皇后의 자매이고, 李氏永安縣太君이다.
子野는 가문이 황후의 인척으로 연결되어 대대로 오랫동안 高官을 지냈으나 衣服操行寒微儒者보다 더 못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여 스스로 힘써 글씨를 잘 썼다.
天聖 2년(1024)에 進士에 급제하여 漢陽軍司理參軍, 開封府 咸平主簿, 河南法曹參軍을 역임하였다.
王文康公(王曙), 錢思公(錢惟演), 謝希深(謝絳)과 현 參知政事 宋公(宋庠)이 모두 그가 유능하다고 천거하여 著作佐郞 監鄭州酒稅로 옮기고
知閬州閬中縣이 되고 곧이어 祕書丞에 임명되었고 임기가 차자 知亳州鹿邑縣이 되었다.
寶元 2년(1039) 2월 정미일에 질병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졸하니 享年 48세였다. 아들은, 郊社掌坐이고 둘째 아들은 이고, 셋째 아들은 어려서 아직 명명하지 않았다.
딸 다섯 명 가운데 맏딸만 시집을 갔다. 부인 劉氏長安縣君이다.
子野는 사람됨이 밖으로는 비록 화락한 모습을 보였으나 안으로는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하였다. 사람을 만날 때 원만하여 圭角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지조를 지킴이 바르고 곧았으며 일에 임해서는 과감하게 결단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 술이 반쯤 거나해지면 을 벗고 머리를 드러냄에 훤하게 머리가 벗겨지고 하얗게 세었다. 내가 참으로 이미 그가 일찌감치 노쇠하여 끝내 여기에 그친 것을 서글퍼하였으니, 어쩌면 그가 내면에 자득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子野이니 그 上世에는 博州 高堂 사람이었다. 曾祖로부터 京師에서 世居하여 開封葬事를 지내니 지금은 開封 사람이 되었다.
은 다음과 같다. 서글프다, 子野여 자질 淳厚하고 재주 훌륭하였네 누가 그가 형통할 걸 막았으며 누가 그의 장수를 짧게 하였는가
어쩌면 그 내면에 자득하지 못함이 있어 외물이 그를 해쳤던 것인가 開封의 언덕과 新里의 시골에 張氏 삼대가 이어오니 이곳에 돌아오고 이곳에 묻히도다


역주
역주1 張子野墓誌銘 : 이 글은 歐陽脩가 仁宗 康定 원년(1040)에 지은 것이니 바로 張子野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이다. 張子野는 張先이다. 宋代 周密의 ≪齊東野語≫에 “本朝에 張先이 둘 있는데 모두 字가 子野이다. 한 사람은 博州 사람이니 天聖 3년(1025) 進士로, 歐陽脩가 그를 위해 墓誌銘을 지어주었다. 다른 한 사람은 天聖 8년(1030) 進士로, 바로 우리 州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역주2 初天聖九年……以爲笑樂 : 歐陽脩는 이해(1030) 進士에 급제하고 西京留守推官에 임명되었는데, 당시에 함께 西京에 있던 이들로는 河南府通判 謝絳, 戶曹參軍 尹洙, 主簿 梅堯臣, 司錄參軍 張汝士, 河南府法曹參軍 張先 등이 있었다.
陳郡 謝希深은 이름이 絳으로, 先代에 陳郡에 살았는데 富陽으로 옮겼다. 大中祥符 연간 進士가 되어 仁宗朝에 州府의 通判을 역임하고 뒤에 知制誥로 승진하였다. 陳郡은 본래 秦나라 때 설치된 지방 명칭으로, 치소는 陳縣에 있었다. 대체로 宋代 陳州 지역과 비슷하다.
南陽 張堯夫는 이름이 汝士로, 堯夫는 그의 字이다. 開封 襄邑 사람이다. 河南府司錄參軍이 되었는데 明道 3년(1033) 8월에 관직에 있으면서 졸하였다.
역주3 其後去洛來京師 : 〈年譜〉에 따르면, 景祐 원년(1034) 3월에 歐陽脩는 西京에서의 임기가 만료되어 汴京으로 돌아갔다. 王曙의 추천을 통해 學士院에 충원되었다가 6월에 大理評事 兼監察御史에 제수되고 鎭南軍節度掌書記, 館閣校勘에 충원되었다.
역주4 南走夷陵 : 景祐 3년(1036) 范仲淹을 변호하다가 폄적되어 夷陵令이 된 일을 가리킨다.
역주5 其後六年 又哭希深而銘之 : 歐陽脩가 지은 〈尙書兵部員外郞知制誥謝公墓誌銘〉에 따르면, 謝絳은 寶元 2년(1039)에 죽었는데 이는 張汝士가 졸한 지 6년이 지난 때였다.
역주6 宣徽北院使 : 宣徽北院의 長官이다. 唐代에 宣徽院南北使를 설치하여 환관을 임명하고서 궁중의 諸司와 三班內侍의 名籍과 郊祀, 朝會, 宴享 때 장막을 치는 등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宋代에는 官位가 높고 직임은 낮아 항상 樞密院 관원으로 임명하였는데, 寄祿官으로 설치하였다. 北院使는 南院에 비해 資望은 조금 못하고 南使와 北使가 건물은 공유하면서 각기 일을 보았다.
역주7 孝章皇后 : 太祖의 皇后 宋氏로, 孝明皇后가 崩御한 뒤 들어가 황후가 되었다. 至道 원년(995)에 崩御하니 시호는 孝章이다.
역주8 歷漢陽軍司理參軍……河南法曹參軍 : 漢陽軍은 荊湖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湖北省 武漢 漢陽에 있었다. 司理參軍은 州府의 보좌관으로 獄訟에 관계된 일을 관장하였다. 開封府 咸平은 京畿路 開封府 咸平縣으로, 치소는 지금의 河南省 許縣에 있었다. 法曹參軍은 州府의 보좌관으로 법률을 檢定하고 사건을 審議, 判決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역주9 王文康公錢思公謝希深與今參知政事宋公 : 王文康은 바로 王曙로, 文康은 시호이다. 字는 晦叔으로, 대대로 河汾에 살았는데 뒤에 河南 사람이 되었다. 知河南府를 두 번 역임하고 조정에 불려가 樞密使가 되었으며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錢思는 錢惟演으로, 字는 希聖인데 吳越王 錢傶의 아들이다. 天聖 7년(1029) 이후 判河南府가 되었다. 졸하였을 때 시호는 文墨이었는데 뒤에 思로 改諡하였고 慶曆 연간에 다시 고쳐 文僖라고 하였다. 이 당시에는 아직 시호를 다시 고치지 않은 때라서 思라고 일컬은 것이다.
宋公은 宋庠을 가리킨다. 宋庠은 字가 公序이고 初名은 郊인데 安州 安陸 사람이다. 뒤에 開封 雍丘로 이주하였다. 天聖 연간 진사가 되었고, 寶元 2년(1039) 右諫議大夫로 參知政事가 되었다.
역주10 鄭州 : 京西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管城에 있었다.
역주11 閬州閬中縣 : 利州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閬中縣에 있었다.
역주12 亳州鹿邑縣 : 淮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河南省 鹿邑縣에 있었다.
역주13 郊社掌坐 : 郊社齋郞이라고도 한다. 宋代에 太廟齋郞과 郊社齋郞이 있었는데, 臺省의 6品官과 諸司의 5品官의 자제들을 蔭敍로 임명하여 朝臣 자제들이 벼슬길에 들어가는 방편이 되었다.
역주14 圭角 : 圭玉의 모서리로, 鋒芒과 같은 말인데, 자신의 뜻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비유한다.
역주15 博州高堂 : 河北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山東省 高唐에 있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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