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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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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法度恰好
하야 出其而悲曰 吾妻謝氏亡矣라하고 丐我以銘而葬焉이라
予諾之未暇作이러니 居一歲中 書七八至 未嘗不以謝氏銘爲言하고
且曰 吾妻 希深父子爲時聞人而世顯榮이라
謝氏生於盛族하야 年二十以歸吾하야 凡十七年而卒이라 卒之夕 斂以嫁時之衣하니 甚矣 吾貧可知也
然謝氏怡然處之하야 治其家 有常法하야 其飮食器皿 雖不及豐侈 而必精以旨하며
其衣無故新而澣濯縫紉하야 必潔以完하고 所至 官舍雖卑陋 而庭宇灑掃하야 必肅以嚴하고 其平居 語言容止 必從容以和러라
吾窮於世久矣 其出而幸與賢士大夫遊而樂하고 入則見吾妻之怡怡而忘其憂하야 使吾不以富貴貧賤累其心者 抑吾妻之助也
吾嘗與士大夫語 謝氏多從戶屛竊聽之하고 間則盡能商榷其人才能賢否及時事之得失 皆有條理러라
吾官吳興할새 或自外醉而歸하면 必問曰 今日孰與飮而樂乎아하야 聞其賢者也則悅하고
否則歎曰 君所交皆一時賢儁이어늘 豈其屈己下之邪 惟以道德焉이라 故合者尤寡러니 今與是人飮而歡邪아하다
而天旱且蝗如此하니 我爲婦人이라 死而得君葬이면 我幸矣라하니 其所以能安居貧而不困者 其性識明而知道理 多此類
嗚呼 其生也迫吾之貧하고 而沒也又無以厚焉하니 謂惟文字可以著其不朽
且其平生 尤知文章爲可貴하니 歿而得此 庶幾以慰其魂이요 且塞予悲 此吾所以請銘於子之勤也라하니 若此어니 予忍不銘
夫人 享年三十七이요 用夫恩하야 封南陽縣君이라 二男一女 以其年七月七日 卒于
梅氏世葬宛陵이나 以貧不能歸也 某年某月某日 葬于之某縣某原하다
銘曰 高崖斷谷兮 之原이로다 山蒼水深兮 土厚而堅이로다
居之可樂兮 卜者曰然이라 骨肉歸土兮 魂氣升天이로다 何必故鄕兮 然後爲安이리오
唐荊川曰 敍女德簡이나 敍書詞纖悉이라


07. 南陽縣君 謝氏墓誌銘
法度가 몹시 좋다.
나의 벗 宛陵 梅聖兪吳興에서 와서 그 부인을 를 꺼내놓고 슬퍼하면서 “나의 아내 謝氏가 세상을 떠났네.”라고 말하고, 나에게 을 청하여 받아 장사 지내려 하였다.
내가 그의 청을 수락하고는 지을 겨를이 없었는데 한 해 동안 〈梅聖兪의〉 서신이 일고여덟 번 올 적에 謝氏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아내는 太子賓客 의 딸이고 希深의 누이이네. 希深 부자는 당대의 명망 있는 분들로 대대로 顯達하였네.
謝氏가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나이 스물에 나에게 시집와서 17년을 함께하다 졸하였네. 졸하던 날 밤에 시집올 때의 옷으로 斂襲하였으니 몹시도 내가 가난했음을 알 만하네.
그렇지만 謝氏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면서 집안을 다스릴 때 일정한 법도가 있어, 음식과 그릇을 비록 풍성하게 하지는 못하였지만 반드시 정갈하고 맛있는 것으로 마련하였고,
그 의복은 헌옷과 새옷에 상관없이 빨고 바느질하여 반드시 깨끗하고 온전하게 하였고, 부임하는 곳에 官舍가 비록 낡았더라도 뜰과 집을 청소하여 반드시 엄숙하게 하였고, 평소 거처할 때 언어와 행동을 반드시 조용히 온화하게 하였네.
내가 세상에서 곤궁하게 지낸 지 오래였네. 그런데 집을 나서서는 다행히 어진 士大夫들과 교유하며 즐거워하고 집에 들어오면 내 아내의 온화한 모습을 보고 그 근심을 잊어, 나로 하여금 富貴貧賤으로 마음을 얽매지 않게 해준 것은 바로 내 아내의 內助라네.
내가 일찍이 士大夫들과 이야기할 때 謝氏가 문과 병풍 뒤로 몰래 듣고는 간간이 그 사람의 재능과 어짊 및 時事의 득실을 다 판별해내곤 하였는데 이것들이 모두 條理가 있었네.
내가 吳興에서 벼슬살이할 때 간혹 밖에서 취하여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오늘 누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즐거운 것입니까?’라고 물어 어진 자와 마신 것을 들으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탄식하면서 ‘당신께서 교유하는 분들은 모두 당대의 어질고 뛰어난 이들인데 어찌 자신을 굽혀 그들에게 낮추는 것입니까. 오직 道德으로 사귀므로 마음이 맞는 자가 더욱 적었는데 지금 이런 사람들과 마시고 즐거워하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해에 南方에 가뭄이 들었다. 우러러 날아가는 蝗蟲을 보고 탄식하기를, ‘지금 서쪽 변방의 군대가 아직 풀리지 않아 천하가 더욱 곤궁하고 도적들이 江淮에서 갑자기 일어났는데
가뭄에다 황충이 이와 같으니 저는 일개 부인인지라 죽어서 당신께서 저를 장사 지내주실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니, 내 아내가 가난에 처함을 편안히 여기고 곤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性識이 밝고 道理를 안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기 때문이네.
아, 아내는, 살아서는 나의 가난에 시달리고 죽어서는 또 후한 葬事를 치르지 못했으니, 오직 글만이 아내를 不朽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네.
게다가 아내가 평소에 文章이 귀한 줄 더욱 잘 알았으니 죽어서 이를 얻는다면 그 혼령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고 나의 슬픔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간절하게 을 청하는 이유라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차마 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인은 享年 37세이고 남편의 恩典을 통해 南陽縣君에 봉해졌다. 2남 1녀가 있다. 이해 7월 7일에 高郵에서 졸하였다.
梅氏는 대대로 宛陵에 장사를 지냈으나 가난하여 돌아갈 수가 없는지라 모년 모월 모일에 潤州某縣 某原에 장사 지냈다.
은 다음과 같다. 높은 언덕 깊숙한 골짜기여 京口의 언덕이로다 산은 푸르고 물은 깊음이여 흙이 두텁고 견고하도다
머물러 살기에 즐거워할 만함이여 터를 보는 이가 마땅하다 하네 骨肉이 흙으로 돌아감이여 혼령의 氣運이 하늘로 올라가도다 어찌 꼭 고향에 돌아가 그런 뒤에야 편안하겠는가
唐荊川이 말하였다. “부인의 을 서술함은 간결하나 文辭를 서술함은 자세하다.”


역주
역주1 南陽縣君謝氏墓誌銘 : 이 글은 歐陽脩가 梅堯臣의 처 謝氏夫人을 위해 지은 墓誌銘이다. 梅堯臣은 天聖 5년(1027) 謝氏를 아내로 맞았다. 經曆 4년(1044) 梅堯臣이 湖州를 경유하여 배를 타고 汴京으로 돌아갔는데, 도중에 高郵에 이르러 배에서 謝氏夫人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37세였다. 歐陽脩는 謝氏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이 글을 지었다. 본집에는 이 글 맨 앞부분에 ‘經曆四年秋’ 5字가 있다.
역주2 予友宛陵梅聖兪來自吳興 : 梅聖兪는 이름이 堯臣으로 宣城 사람인데 歐陽脩의 절친한 벗이다. 본서 권28 〈梅聖兪墓誌銘〉 참조.
吳興은 古號로, 宋代 湖州를 가리킨다. 兩浙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烏程에 있었다. 經曆 원년(1041) 梅堯臣은 監湖州鹽稅가 되었다가, 4년 봄에 遞職되어 汴京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역주3 哭內之詩 : 梅堯臣이 經曆 4년(1044)에 지은 〈悼亡三首〉를 가리킨다.
역주4 故太子賓客諱濤之女 希深之妹也 : 濤는 謝濤로, 富陽 사람이다. 進士가 되어 梓州榷鹽院判官, 知興國軍 등을 역임하였다. 希深은 謝絳의 字이다.
역주5 是歲……盜賊暴起於江淮 : 이해는 經曆 4년(1044)을 가리킨다. ≪宋史≫ 〈仁宗紀〉 經曆 4年條에는 南方의 旱蝗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3월 계해일 초하루에 가뭄으로 內侍를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만 있다. 한편 이해에 비록 西夏와 講和를 하였으나 아직 경계를 풀지는 않고 있었다. 江淮에서 일어난 도적은 經曆 3년 張海, 郭貌山이 굶주린 백성들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킨 일을 가리킨다.
역주6 高郵 : 高郵軍으로, 淮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江蘇省 高郵縣에 있었다.
역주7 潤州 : 兩浙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丹徒(지금의 江蘇省 鎭江)에 있었다.
역주8 京口 : 지금의 江蘇省 鎭江縣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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