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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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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通篇 以衆所稱許爲誌하니 一變調
太常丞致仕吳君之夫人曰北海郡君王氏 人也 皇考諱汀 擧明經不中하고 後爲本州러라
夫人年二十三 歸于吳氏하고 天聖元年六月二日 以疾卒하니 享年三十有七이라
夫人爲人 孝順儉勤하야 自其幼時 凡於女事 其保傅皆曰 敎而不勞라하며 組紃織絍 其諸女皆曰 巧莫可及이라하고
其歸於吳氏也 其母曰 自吾女適人으로 吾之內事 無所助라하며 而吳氏之姑曰 自吾得此婦 吾之內事 不失時라하고
及其卒也하야 太常君曰 擧吾里中 有賢女者 莫如王氏라하고 於是 娶其女弟以爲繼室이라
而今夫人戒其家曰 凡吾吳氏之內事 惟吾女兄之法 是守하야 至今而不敢失이라하다
夫人有賢子曰이니 字長文이라 初擧明經하야 爲殿中丞하고 後擧賢良方正直言極諫이러니 今爲翰林學士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
夫人初用子恩하야 追封福昌縣君하고 其後長文貴顯 以夫人爲請하니 天子曰 近臣 吾所寵也 有請 其可不從가하고
乃特追封夫人하야 爲北海郡君하니 長文號泣頓首曰 臣奎不幸하야 竊享厚祿 不得及其母러니
而天子寵臣하사 以此俾以報其親하시니 臣奎其何以報리오하니
當是時하야 朝廷之士大夫吳氏之鄕黨隣里 皆咨嗟歎息曰 吳氏有子矣라하다
嘉祐四年冬 長文請告于朝하야 將以明年正月丁酉 葬夫人于鄆州之魚山할새 以書來乞銘이라
夫人生三男하니 曰奎奄胃 今夫人生一男하니 曰參이라 女三人이요 孫男女九人이요 曾孫女二人이라
銘曰 奎顯矣 奄早亡이요 胃與參 이라 以一子 榮一鄕하니 生雖不及歿有光이요 孫曾多有後愈昌이라
唐荊川曰 此銘與前作 皆是善生發處하니 此是作女人文字之法也


10. 北海郡君 王氏墓誌銘
전편이 뭇사람들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내용으로 墓誌를 삼았으니 하나의 變體이다.
太常丞으로 致仕吳君의 부인은 北海郡君 王氏濰州 北海 사람이다. 부친 明經科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고 뒤에 本州助敎가 되었다.
부인은 나이 23세에 吳氏에게 시집왔고, 天聖 元年(1023) 6월 2일에 질병으로 졸하니 享年 37세였다.
부인은 사람됨이 孝順하고 勤儉하여 어린 시절부터 모든 여자가 할 일들에 대해 그 保傅들이 모두 “가르침에 힘이 들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織工에 있어서는 그 자매들이 모두 “솜씨를 따를 수가 없다.”고 하였으며,
吳氏에게 시집와서는 그 모친이 “우리 딸이 남에게 시집가고부터 우리 집안의 일을 도움받을 곳이 없다.”라고 하였고, 吳氏 집안의 媤母가 “내가 이 며느리를 얻고부터 우리 집안의 일에 제때를 잃지 않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부인이 졸하게 되자 남편 太常君이 “우리 마을 사람들 가운데 어진 여인으로 王氏 집안 사람만 한 이가 없다.”라고 하고는 이에 부인의 동생을 아내로 맞아 繼室로 삼았다.
지금 부인이 그 집안에 당부하기를 “무릇 우리 吳氏의 집안일은 오직 우리 언니의 법도만을 지키면서 지금에 이르도록 감히 잘못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어진 아들 를 두니 長文이다. 처음에 明經科에 합격하여 殿中丞이 되었고, 뒤에 賢良方正直言極諫科에 합격하였는데 지금 翰林學士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이다.
부인은 처음에 자식으로 인해 은전을 받아 福昌縣君追封되었고, 뒤에 長文顯達하자 부인의 〈추봉을〉 청하니 天子께서 “近臣은 내가 총애하는 바이니 청이 있을 때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특별히 부인을 추봉하여 北海郡君이 되니 長文이 소리내어 울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신 가 불행하여 후한 녹봉을 누린 것이 제 어미에게 미치지 못하였는데
천자께서 신을 총애하시어 이로써 어버이에게 보답하게 해주시니 신 가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에 朝廷士大夫吳氏鄕黨과 이웃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고 탄식하면서 “吳氏가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嘉祐 4년(1059) 겨울에 長文이 조정에 請告하여 이듬해 正月 정유일에 鄆州魚山에 부인을 장사 지내려고 할 때 나에게 서신을 보내 을 청하였다.
부인은 세 아들을 낳았으니 , , 이다. 지금 부인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다. 딸은 세 사람이고, 손자 손녀는 아홉 사람이고, 증손녀는 두 사람이다.
은 다음과 같다. 는 현달하였고 은 요절하였으며 은 마흔에 벼슬길 나갔네 한 아들의 恩典을 통해 한 고을을 영화롭게 봉해받았으니 살아서 복록 누리지 못했으나 죽어서 영광 있었고 손자 증손 번성하니 뒤에 더욱 창성하리라
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과 앞 작품이 모두 자식이 發身한 근본을 잘 끄집어내어 서술하였으니 이는 부인에 대한 글을 짓는 법도이다.”


역주
역주1 北海郡君王氏墓誌銘 : 이 글은 歐陽脩가 嘉祐 4년(1059)에 吳奎의 모친 王氏를 위해 지은 墓誌銘이다.
역주2 濰州北海 : 京東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山東省 濰坊縣에 있었다.
역주3 助敎 : 宋代 諸州에 설치하여 經學을 가르치게 한 관직이다. 황제가 특별히 은택을 내려 士人에게 제수하기도 하였고, 과실이 있는 관원을 安置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米穀을 공납으로 받고 관직을 내릴 때 쓰던 명목상의 관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역주4 : 吳奎로 17세에 進士에 급제하여 여러 州縣의 長吏를 지냈고 翰林學士, 樞密副使를 역임하였으며 神宗 때 參知政事가 되어 王安石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知淸州로 폄적되었다.
역주5 仕方強 : ≪禮記≫ 〈曲禮〉에 “마흔 살이면 志氣가 강해져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다.[四十曰強而仕]”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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